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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깨었다. 어디인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기차는 멈춰서 있었다. 거리가 제각각인 도시의 역들을 모두 오전이나 오후 시간에 배치하기가 어려운지 어중간한 밤 시간에 정차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잠자는 승객들을 위해 꺼놓았던 실내등이 환하게 밝혀졌고, 나는 잠결에 기차에서 내리거나 새로 올라타는 사람들이 짐을 들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때로는 다음날 일어나면 낯선 사람이 내 아래층 자리에 앉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기차 안은 컴컴했고 들리는 건 곤히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뿐이었다. 내 맞은편 침대의 S도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기차가 덜컹,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멈춰 섰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나를 깨운 것도 이 충격이었다. 충돌사고가 일어난 걸까, 기차가 고장이 났는데 무리해서 출발하려다 계속 멈추어서는 건 아닐까. 나는 불안해졌다.

주변 승객들은 그러나 모두 평안하게 잠들어있었다. 나는 곧 전날 정차한 기차를 따라 플랫폼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본 차량들은 서로 모양이 다른가 하면 문 앞에 적힌 출발지와 목적지도 제각각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러시아 기차에 '북경'이란 한자가 적힌 중국 기차 차량 두 칸이 달려있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구간마다 승객 수나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들로 차량을 붙였다 떼어냈다 하며 가나 보았다.

생김이 다른 러시아 기차와 중국 기차 차량.
 생김이 다른 러시아 기차와 중국 기차 차량.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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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한 번 깨버린 잠은 쉽게 들지가 않았다. 이제 곧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 이 여행도 끝이 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내고 붙이면서 계속 길을 가듯 나도 이 여행에서 무언가를 버리고 또 배웠을 것이다. 내가 묻은 것은, 새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어릴 적에 본 수많은 만화영화들 중에서도 나는 <은하철도 999>를 가장 좋아했다. 기차를 타고 전 세계, 아니 전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멋진 생각 같았나 보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만화를 이번 기차여행을 앞두고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주인공 메텔이 러시아어 눈보라 '미쩰'에서 따온 이름이란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러시아 특유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처음 등장하는 우주도시는 러시아 도시를 닮아있었다. 이렇게 만화의 많은 부분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그것이 지나는 러시아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들이 가슴에 각인이 되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도 몰랐다.

서기 2221년이라는 먼 미래, 기계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비참하게 살던 소년 철이는 어느 날 그를 기계 몸을 얻을 수 있는 안드로메다의 프로메슘에 데리고 가주겠다는 메텔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만화는 철이가 꿈의 목적지까지 수십 개의 각기 다른 행성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렇게 프로메슘에 도착했을 때, 철이는 이미 자신이 바라던 세상을 바꿀 강하고 올곧은 청년으로 성장해있다. 그리고 영혼 없는 기계인간들의 디스토피아를 목격하고 원래 꿈이었던 기계 몸을 얻는 대신 인간으로 남아 인간을 위해 일하기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은 혼자여야 한다.

"네가 혼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을 때가 너와 내가 이별할 때임을 알고 있었어."

메텔이 이런 편지를 남기고 떠나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와 메텔.
 <은하철도 999>의 철이와 메텔.
ⓒ 도에이 애니메이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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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텔은 땅딸막하고 못생긴 철이에 비해 사춘기 소년이 꿈꿔봄직한 연상 여인의 성숙하고 완벽한 외모를 하고 있다. 여행을 안내하며 위기 때마다 철이를 구해주고 교훈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S는 나에게 메텔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처음 만난 스무 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서툴렀던 나를 많이 이끌어주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S를 너무 이상화시켜버렸다. 원래 S가 아닌 S를 만들어 놓고 그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그를 힘들게 했다. 우리의 현실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이 여행을 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는 환상으로 시베리아 여행을 고집했다.

마지못해 따라오긴 했지만 여행에서 더 적극적인 건 S였다. 미리 알아온 정보만 가지고 그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던 나에 비해 S는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와 즉흥적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차에서도 나는 제한된 환경에 적응하려 하는 반면 S는 환경을 최대한 평소 생활에 맞게 바꾸었다. 그리고 저녁마다 걷지 않아 퉁퉁 부운 내 다리를 마사지 해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와의 이별과 시베리아 여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고 언급한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아내가 떠올랐다. 기차를 놓쳐 하는 수 없이 하루 머물게 된 곳을 깨끗이 청소하는, 기차가 오면 언제든 떠나야 하지만 깨진 창문에 그림을 붙이고 안락한 소파를 들이는 아내를 말이다.

처음에는 주인공 남자에 감정을 대입하느라 이런 쓸데없는 일로 매번 여행을 방해하는 아내가 짜증나기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곰스크라는 먼 이상을 꿈꾸느라 바로 곁에 있는 아내가 임신한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아내는 말한다.

"곰스크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는 거죠?"

어쩌면 일상을 꾸리고 작은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이상의 모습이지 않을까.

<은하철도 999>를 닮은 러시아의 옛 기차.
 <은하철도 999>를 닮은 러시아의 옛 기차.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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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꿈과 현실을 바로 알고, 내 스스로 현실을 꿈으로 이뤄나가는 홀로서기를 할 시간이었다. 오래 정차해 있던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고 밤풍경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에 누워 나는 <은하철도 999> 시리즈의 엔딩과 같은 작별인사를 속으로 외쳐보았다.

안녕, 메텔--안녕, S. 안녕, 은하철도 999--안녕,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녕, 소년 시절이여--안녕, 내 청춘.

덧붙이는 글 | 5월부터 시작한 시베리아 이별여행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해준 독자분들과 오마이뉴스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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