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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불라칸주의 마닐라 도시빈민 이주민지역인 가야가야와 타워빌에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6월 말부터 7월 2일까지 그 활동 이야기를 싣습니다. - 기자말

필리핀 도시빈민 이주민지역 가야가야의 12세 라욘. 지금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지만 그의 꿈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필리핀 도시빈민 이주민지역 가야가야의 12세 라욘. 지금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지만 그의 꿈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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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큐~ 바나나 큐~"

뜨거운 태양 아래 12살 라욘은 오늘도 외친다. 친구들과 공을 갖고 함께 뛰어 놀아야 할 이 소년은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구슬 땀을 흘리며 바나나 큐를 팔고 있다. 바나나 큐는 바나나를 기름에 튀겨 설탕을 바른 필리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즐기는 간식이다. 하나에 6페소(180원). 이렇게 하루 종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 한 끼 먹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단다.

"하루에 10개정도 팔아서 60페소(1800원)를 받아요. 오전에 바나나 큐를 다 팔고 나면 오후에는 동네를 돌며 빈 병을 모아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우렁차던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 친다.

"바나나 큐- 바나나…. 큐…."

하교시간 교복을 입은 채 삼삼오오 학교를 빠져 나오는 또래 학생들 틈으로 라욘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라욘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매일 학교 앞을 서성이며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고된 삶의 무게를 12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 같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12살 가장의 무거운 어깨

라욘의 꿈은 무엇일까? '바나나 큐'를 외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촉촉한 눈동자 속에서 잊혀가는 그의 꿈을 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라욘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고개를 떨군다. 비로소 소년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듣는다.

라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4년 전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라욘의 가족은 집을 잃고 생활고를 겪고 있다. 어머니는 야채장사를 시작했지만 수입은 턱없이 부족했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소년의 발걸음은 더 이상 학교로 향할 수 없었다. 아버지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은 그 꿈을 잠시 접어둔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던 라욘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어 목놓아 울었다. 좌절과 상처로 얼룩져 잔뜩 곪아있던 소년의 마음을 '꿈'이라는 이 한 마디가 톡 하고 터트려 버린것이다. 참고 또 참아 마음 깊숙이 꾹꾹 눌러 놓았던, 소년 인생 12년치 울음을 한 번에 우는 것 같았다. 그 가슴저린 눈물 앞에 나는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목놓아 울고 싶었을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을까? 그를 마주한 캠프 스태프는 가만히 라욘을 꼭 안아주었다. 마음껏 꿈 꿀 나이. 그러나 그 꿈을 펼치기에 라욘에게 세상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또 다른 어딘가에 라욘처럼 가난과 슬픔을 껴안고 살고 있을 아이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벽이 종잇장처럼 얇다는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공부하고 싶은 꿈, 다시 학교에 가고 싶은 꿈,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은 라욘은 오늘도 학교주변을 서성인다. 상처 안은 라욘을 감싸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웃었다. 우리는 이 작은 소년이 오늘보다 내일을 더 기대하게 하고 싶었다.

비록 잠시 접어두었지만, 결코 그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라욘은 이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바나나 큐!" 그 작은 소년의 목소리에 힘을 가득 실어주고 싶어, 소년의 목소리 위에 우리의 목소리를 얹었다. 우리는 함께 이 세상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바나나 큐~ 바나나 큐~"

교실 밖 아이들, 세상을 만나다

캠프 스텝 브릭스가 지역 아동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캠프 스텝 브릭스가 지역 아동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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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에서 40여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불라칸주 도시빈민 이주민지역 가야가야에는 학령기 대상 가운데 25%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공부하는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생선장사, 아이스캔디, 바나나 큐, 반디살, 야채 등 각종 장사를 하기도 한다. 일부는 공사장에서 돌을 깨거나, 빈 병을 모아 팔아 돈을 벌기도 하며 험한 일도 가리지 않고 세상으로 뛰어든다.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학교라는 울타리가 부재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도둑질 혹은 무리를 지어 깡패행세를 하며 거친 행동을 일삼곤 한다. 술, 담배는 기본이고 본드 등 마약을 쉽게 접하는 등 실제로 많은 위험요소들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환경요인으로 학교 밖에서 자립을 꿈꾸는 아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은 이들에게 그리 녹록지 않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사단법인 캠프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해외지원사업으로 주민기초보건의료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교실 밖, 차갑고 냉정한 사회에서 상처받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이다.

'청소년과 마약' 세미나, 위험에 눈뜨는 아이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뒤로 예쁘장한 여학생들도 따라 들어온다. 가야가야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이 모였다. 의학자 벤(Ben)의 강의로 진행된 세미나는 30여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젊은 에너지와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술, 담배, 마약에 이미 많이 노출되어 있었고, 이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은 마약과 술, 담배를 접하게 된 계기와 이유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함께 나누었다.

'청소년과 마약 세미나'에 참가한 학생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청소년과 마약 세미나'에 참가한 학생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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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혹은 친구를 따라서 등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본드를 접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는 이들의 부모는 5-6명의 아이들 모두를 먹일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음식 대신 값싼 본드를 사는 것이었다. 본드로 모든 감각을 마비시켜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하면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어떤 미래를 직면하게 될까?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안정된 직업을 구하기 힘든 그들은, 후에 가정을 이루더라도,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다. 그들이 그랬듯,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하기보다는 일찍 일을 시작하도록 한다. 결국 이러한 빈곤의 사이클은 반복되는 것이다.

가야가야 지역에서 초등학교에 10명이 입학하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은 6명 그 중 대학에 가는 학생은 2명이다. 물론 대학을 졸업하는 숫자는 극히 소수다. 대부분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이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다. 학업을 이어가는 대신 세상으로 일찍 발을 내디뎌 일을 시작하는 그들은 미성숙한 생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강사 벤은 이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마약의 부정적 효과와 이들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올 심각한 건강문제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이 당면한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들이 마주 할 미래를 위한 날카로운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지는 못해도, 여전히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고 호기심도, 꿈도 많은 가야가야의 청소년들과 함께한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꿈꾸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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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끝난 후 참여했던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가야가야를 다시 찾았다. 이 지역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세 번 작은 교실에서 수업이 열린다. 작은 공부방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정규고등학교 과정을 대신할 수 있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는 이 수업 과정을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면 대학에 갈 수도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사실 술, 담배와 마약에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이런 청소년들이 기회가 있다고 해서 과연 공부를 하기나 할까? 고작 몇 명이나 모여있을까? 마음 속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줄까? 의심과 선입견을 가득 안고 찾은 그곳에서 내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된 수업은 한창 더위가 무르익을 오후 한시까지 진행되었다. 그 중 유독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레이' 이 소년은 '톤도'라는 마닐라 쓰레기 매립지 허름한 집에 살다가 그마저 태풍으로 잃고 이곳 가야가야로 오게 되었단다. 한 눈에 봐도 열심인인 레이는 수업시간에 항산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모범생이었다.

"전 수학공부가 너무 좋아요. 에세이 쓰는 게 좀 어렵긴 하지만,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싶어요. 전 공부가 너무 재미있거든요."

공부의 꿈을 버리지 안고 열심히 수업에 임하는 레이
 공부의 꿈을 버리지 안고 열심히 수업에 임하는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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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장난기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웃는다. 무엇이 소년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어떤 꿈이 이 소년을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걸까?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년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편하게 사는 거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부모님 고생시키지 않고 다 같이 편하게 사는 거요."

열 아홉 소년에게 가난은 이렇게 슬프도록 소박한 꿈을 가지게 했다. 아버지 혼자 버는 수입으로는 다섯 형제와 온 가족이 지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단다. 그래서 레이도 학교보다는 공부방에서 공부를 하고 남는 시간에 일거리를 찾아 살림에 보탠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자동차 부품 파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매일 일하지는 않고, 사장님이 부르시는 날만 가요."

이 고단한 삶의 끝자락에서 레이가 놓지 않고 있는 작은 희망이 있다.

"저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요. 대학에 갈 수 있다면, 자동차 관련 공부를 하고 싶어요. 사실은 정말로 대학에 가고 싶어요.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이 허락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아르바이트 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 부모님께 드리고 있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자동차 전문가가 되어, 언젠가 '레이 표' 자동차를 꼭 만들고 싶어요."

학교를 다닐 수 없지만 꿈을 잃지 않고 공부방에서 꿈을 키우는 청소년들
 학교를 다닐 수 없지만 꿈을 잃지 않고 공부방에서 꿈을 키우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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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실에는 레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달리기 선수라는 꿈을 가지고 매일 온 동네를 달리는 존, 요리사를 꿈꾸며 음식이란 음식은 모두 맛보아야 하는 비나, 간호사가 되는 그날을 꿈꾸며 매일 의료 센터 앞을 서성이는 마리아노, 호텔 매니저를 꿈꾸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조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꾸는 청소년들의 눈은 진심으로 빛났다.

아직 '어떤 것'도 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푸르디 푸른 청소는들. 나는 오늘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태그:#가야가야, #이주민, #캠프, #필리핀빈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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