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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위해 무작정 상경한 아버지

 <아버지의 오토바이> 표지
 <아버지의 오토바이> 표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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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한 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숙고하게 한다.

엄시헌이란 인물이 있다. 그가 이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아버지다. 그는 끝내 아버지로서만 이 소설에 등장해서 퇴장한다. 그게 이 소설의 뚝심이라면 뚝심이지만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오로지 아버지 역할만 하다가 돌아가는 엄시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시골에서 살다가 상경해서 도시빈민이 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왜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오는가? 여기에는 그의 큰아들 종석의 병이라는 운명적 문제가 걸려 있다.

엄시헌은 종석을 큰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아보지만 뇌성마비에 간질에 자폐증까지 겹쳐 있어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통보를 받는다. 엄시헌은 시골 구석에 살면 큰아들을 일찍 잃을까봐 도시로 온다. 무슨 일을 해서든 돈을 벌고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베풀어주겠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아버지

그러나 도시 생활이 어디 쉬운가. 이 일 저 일 하다가 실패를 맛본 엄시헌은 김천의 제방 공사 현장으로 내려가고 이때부터 가족들과는 얼굴을 마주대하기 힘든 사이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 엄시헌은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추리소설처럼 시작한다. 엄시헌이 오토바이를 타고 국도를 달리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오토바이는 도로 위의 숲으로, 시신은 도로 아래 배수관으로 유기되어 있었다. 누가 엄시헌을 죽였는가. 왜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는가. 이런 물음이 독자들에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추구하는 것은 추리소설의 흥미진진한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다. 

엄시헌의 둘째아들 엄종세가 부음을 받고 아버지가 살던 김천으로 내려오게 된다. 종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 조두진이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 게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종세는 아버지와 거의 만나지 못(안)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돈을 벌러 가서 못 만난 것이었고, 나중에는 유년기를 같이 보내지 않은 원망감과 서먹함 때문에 아버지를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죽고 그의 삶을 이해하고 난 뒤에는 아쉽게도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이다. 

희생자여, 그대의 이름은 아버지

엄시헌은 두 아들과 아내를 위해 자기 한 몸의 희생했고, 자기의 욕망을 억눌렀다. 작가는 그런 엄시헌의 삶을 거룩한 것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것에 공감하는 독자는 이 소설을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독자는 이 소설을 토론을 위한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엄시헌과 같은 동네에 살고 형 아우하며 지냈던 장기풍의 입을 빌어 역설한다. 세상은 부도덕한 일들이 넘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고상한 척, 정의로운 척하고만 살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했던 아버지를 자식이 우습게 알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두가 엄시헌의 방식으로 살면 세상은 언제나 아귀다툼의 상태일 것이다. 즉 내 새끼가 귀하면 남의 새끼가 귀한 줄도 사람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엄시헌에게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종석의 존재 자체가 엄시헌에게는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생애의 부채이지 않았겠는가. 

조두진은 작가 후기에서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복고를 주장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이 작품은 세상의 아버지들을 미화하고 있으며 약간의 복고 취향을 드러낸다. (90년대 이후 소설에서 아버지들은 의무나 책임을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나약한 개인이었고, 가족이란 억압의 굴레였음을 상기해보자.)

아버지의 삶, 자식의 눈물

마지막 장면에서 종세는 귀경길에 자동차를 갓길에 세우고 운다. 그의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넘어선다. 어쩌면 그 눈물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삶을 강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눈물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버지의 오토바이>의 진수다.  

기자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나오는 엄시헌의 세계, 즉 희생하는 아버지의 삶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도 이 삶에 찬사를 보내라는 의도로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무수한 아버지들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이 정도에서 작가와 독자의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거 같다. 기자와 같은 30대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분명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 해야겠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은 값은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조두진, <아버지의 오토바이>, 예담, 2009. 값 10,000원



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예담(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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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강사입니다. 공저로 <문학으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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