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도의 생태철학자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세계 강대국의 핵 정책을 몸으로 항의하면서, 인도에서부터 미국까지 2년 반 동안 걸어서 순례를 했습니다. 녹색연합은 이 정신을 계승해 1998년부터 녹색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비무장지대'로 발걸음을 옮겨 한국전쟁의 참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강원도 철원을 시작으로 남북 긴장의 역사인 서해 5도의 최북단 백령도까지, 정전협정 60년의 역사를 지금 만나러 갑니다. 순례는 5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9박 10일간 진행됩니다. [편집자말]
오늘(23일)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연천으로 진입했습니다.
▲ 2013 녹색순례로 걸어온 길 오늘(23일)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연천으로 진입했습니다.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순례 이틀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양지리 노인정을 둘러싼 뽀얀 아침 안개를 보며 녹색 순례단은 기지개를 켜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순례 일정도 체크했습니다.

오늘(23일)은 남방한계선 최북단에 위치한 월정리역을 지나 노동당사와 백마고지를 거쳐 신탄리역까지 가는 코스입니다. 한국 전쟁과 그로 인한 분단의 상흔을 볼 수 있는 곳들이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입니다.

시간 여행은 양지리 통제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분증 확인 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금지되는 행동과 조심해야 할 점 등의 안보교육을 받고 월정리역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로 양옆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통제소를 통과한 농민들의 차량도 자주 눈에 띕니다. 민통선 이북지역에 농토가 있는 주민들은 매일 아침 통제소를 통해 신고를 하고 들어가 농사를 짓습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경원선을 타고 월정리역을 통과하는 날이 오겠죠?
▲ 월정리역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경원선을 타고 월정리역을 통과하는 날이 오겠죠?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철마는 달리고 싶다'... 팻말이 무색합니다

상쾌하고 시원한 오전 공기 덕이었는지, 금세 월정리역에 도착했습니다. 경원선(서울-원산)의 간이역이었던 월정리역은 현재는 폐역 상태로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운행되었던 객차 잔해 일부와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낡고 녹슨 객차 잔해를 보자니 그 앞에 큼직하게 쓰인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무색하게 느껴집니다.

한 때는 원산까지 연결되어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을 공간이, 지금은 경계초소관측소의 군인들만 보일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적막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넓은 평야와 교통의 요충지라 사람이 몰렸던 철원읍이 3년간의 한국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됐지만, 지난 흔적들은 단절된 상태로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월정리역을 지나 외촌리 도로를 걷다 보니 중간중간 제2금융조합, 농산물검사소 등 번성했던 철원의 옛 흔적이 훼손된 건물로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총알 자국, 포탄자국이 선명한 노동당사.
 총알 자국, 포탄자국이 선명한 노동당사.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관전리 통제소를 지나 도착한 노동당사. 노동당사 건물을 향해 오르는 계단 중앙에 탱크가 밀고 올라간 캐터필러 자국이 선명합니다. 눈부신 5월의 햇살과 주변의 신록 속에 기둥의 총탄 자국과 얼룩진 모습은 도드라져 보입니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지역 주민들의 성금과 노동력을 동원해 지은 러시아식 건물입니다.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북한 건축물로, 건축 당시 보안을 위해 내부 공사인부는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노동당사는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반공인사를 고문·학살하고 양민들도 처형한 공포의 권력기관이었습니다.

가드레일 하나로 사람이 걷는길과 지뢰지대가 갈립니다.
 가드레일 하나로 사람이 걷는길과 지뢰지대가 갈립니다.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노동당사 옆 그늘벤치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녹슨 열차 잔해, 폐허가 된 옛 건물들, 그곳을 관통한 사건들을 생각하며 걸어서 인지 밥을 먹으면서도 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80년쯤 전, 장날에 경성과 원산에서도 몰려들 만큼 번성했던 곳, 60년쯤 전에는 이념으로 인해 양민들이 학살됐던 곳, 그리고 결국 전쟁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진 도시. 이 공간이 지금은 오히려 평화를 상징하는 철원DMZ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아이러니 합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백마고지 현장 대신, 전적비가 사진으로 남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백마고지 현장 대신, 전적비가 사진으로 남고 있습니다.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한 숨 쉬었다가 사요리, 대마리를 지나 도착한 백마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마고지는 철의 삼각지대 중 요충지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단 10일간의 전투에서 7차례나 고지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며 12차례나 쟁탈전이 반복되었던 곳입니다. 작전 기간 중 모두 27만 발 이상의 포탄이 집중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경사로를 따라 백마고지전적비와 기념관에 오르니 단체 관광객들이 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와 관련해 군인의 설명을 듣고 질문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참전자 모임 등에서 관광 왔다는 말을 듣고,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훗날 다시 격전지를 찾았을 때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뿌리는 미확인 지뢰지대지만 나무 위는 새들이 둥지를 트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나무뿌리는 미확인 지뢰지대지만 나무 위는 새들이 둥지를 트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정전협정에도 전쟁 경험과 분단 상황은 우리 사회에 종횡을 넘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정치계·문화계 인사들에게 종종 붙는 '종북(從北)'꼬리표의 매카시 열풍, 그리고 선거, 무엇보다도 전쟁을 경험한 '개인'들에게 내재된 숱한 상처들과 그로 인해 왜곡된 시선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 함께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너와 나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건 어떠신가요?
 마음이 맞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너와 나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건 어떠신가요?
ⓒ 녹색연합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신수연 녹색연합 활동가 입니다.



태그:#녹색순례, #녹색연합, #비무장지대, #철원
댓글

녹색연합은 성장제일주의와 개발패러다임의 20세기를 마감하고, 인간과 자연이 지구별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초록 세상의 21세기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