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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기념사업회 초청으로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경미 작가가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 제작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나혜석기념사업회 초청으로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경미 작가가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 제작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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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 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여권운동가, 문필가 등으로 활동하며 불꽃처럼 살다간 비운의 선각자다. 지난 4월 28일은 나혜석 탄생 117돌. 이날을 전후해 수원에서는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 이어 30일까지 수원 행궁동 일원에서 문화예술제가 열렸다.

특히 올해 기념행사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행사는 지난 27일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기록물 '파리에서의 나혜석'이었다. 이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 번역작가 한경미(현재 <오마이뉴스> 프랑스 해외통신원)씨가 오랜 추적조사 끝에 확인한 사실들을 근거로 직접 제작한 15분짜리 다큐픽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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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유로로 만든 나혜석 다큐픽션

'파리에서의 나혜석'은 그녀가 인생의 절정기인 1927년 외교관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여행에 나서 약 8개월간 홀로 머물렀던 파리에서의 유학생활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엔 훗날 나혜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파리의 연인' 최린과의 스캔들 내용도 담겨 있다. 또한 영화 중간 중간에 나혜석의 주요 작품들도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려진 나혜석의 파리생활을 다큐픽션 기법으로 재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혜석의 파리 체류와 관련해 '그녀의 눈에 과연 프랑스는 어떤 곳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그녀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다큐픽션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지만, 즐기면서 했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나혜석기념사업회 초청으로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경미 작가는 다큐픽션 제작 경위 등을 설명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나혜석 다큐픽션을 찍으면서 나름대로 재미와 보람도 느꼈다"면서 "제작비용은 겨우 250유로밖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출연자들이 모두 자원봉사로 참여해 줬기 때문에 밥값·교통비 등의 비용만 지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씨가 나혜석의 짧은 파리생활에 주목한 이유는 뭘까. 불문학을 전공한 한씨는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해 지난 1989년부터 프랑스에서 살고 있으며, 파리에서만 10년 넘게 거주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혜석의 파리 체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그의 관심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는 지난 2006년 한국에 나왔을 때 한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나혜석 전집>(저자 이상경)을 읽고부터.

 나혜석과 최린이 파리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는 모습.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의 한 장면.
 나혜석과 최린이 파리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는 모습.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의 한 장면.
ⓒ 파리에서의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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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전집>에는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글들이 모두 수록돼 있는데, 구미여행기 중 파리 체류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는 것. 이 가운데 한씨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1936년 4월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라는 글이었다. 나혜석은 1927년 파리 체류 당시 자신이 묵었던 프랑스 가정을 소개하면서 파리 근교의 별장이 많기로 유명한 르베지네에 있는 샬레씨 집에서 몇 개월을 살았다는 얘기를 써놓았다.

이를 보고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한씨는 샬레씨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씨는 르베지네 면사무소에 문의를 하고, 인터넷을 뒤지는 등 그동안 쌓인 '내공'을 발휘해 마침내 80여 년 전 나혜석이 머물렀던 문제의 집을 찾아냈다. 그에 따르면 르베지네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19km 떨어진 외곽도시로,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가가 많은 부유층 주거지역.

하지만 그곳에는 샬레씨 가족 대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샬레씨 부부는 물론 그의 자녀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확인 결과 1870년경에 지어진 샬레씨네 집은 앞쪽으로 1750㎡ 정도의 넓은 정원이 있다. 집 뒤쪽으로는 현재 파리의 고속전철이 지나고 있으나 나혜석이 묵었을 당시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녔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씨는 집 주인의 도움으로 샬레씨 막내딸의 아들도 찾아내 파리에서 만났다. 한씨는 그에게서 1920년대 당시 한국 화가가 할아버지 댁에서 몇 개월간 하숙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어렸을 때 한국 화가가 그려주고 갔다는 작은 그림을 본 기억이 난다는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샬레씨 부부 재산의 대부분을 물려받은 막내아들이 평생 독신으로 살다 지난 2001년 사망하면서 남은 재산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라는 것.

한씨는 "샬레씨 손자의 말대로라면 지금 프랑스 어딘가에 나혜석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얘기"라며 "이 그림을 꼭 찾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서 이 같은 내용들을 한씨는 지난 2006년 12월 28일 <오마이뉴스>에 송고해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그는 이어 파리 근교에 살고 있는 동양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 박인경 화백의 증언을 통해 나혜석의 이혼 후 불행한 말년의 삶을 조명하기도 했다.

박 화백은 이화여대 미대생 시절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던 안양 경성보육원내 양로원에서 나혜석을 직접 만났던 장본인이다. 박 화백의 증언 기사는 2007년 2월 1일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 불행은 필연이었나>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탄생 117돌을 맞아 나혜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탄생 117돌을 맞아 나혜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모습.
ⓒ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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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씨의 나혜석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다큐픽션 영화를 제작한 것도 그의 관심과 열정의 산물이다.

"나혜석의 파리여행기를 통해 알게 된 그녀의 파리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의 TV방송 쪽에 제안을 했는데, 프랑스 현지 촬영에 따른 비용문제 때문인지 아무도 연락이 없더군요. 그래서 나혜석이 드나들었던 모든 장소들을 속속 알고 있는 내가 직접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한씨는 지난해 파리시에서 주관하는 '비디오 아틀리에'에 들어가 비디오 촬영기법을 익히는 등 다큐 제작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1920년대의 사진 등 관련 자료들이 크게 부족해 다큐픽션으로 제작방향을 틀었다. 출연자들은 공모와 주변사람들의 추천 등을 통해 캐스팅한 뒤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중편 다큐픽션 영화 제작 계획하고 있다"

한씨는 "아마추어 출연자들이다보니 연기력이 부족하고 의상이나 도구 등에서도 1920년대를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면서 "증기기관차 대신 촬영 당시 역으로 드나들던 현대식 기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제작과정의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현대와 20년대를 접합시킨 일종의 실험적 작품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지난해 10월 '비디오 아틀리에' 지하극장에서 300여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수강생들의 졸업 작품 상영회에서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영화를 본 프랑스 관객들 가운데 한국의 여성화가 나혜석과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일부만 맛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한씨는 현재 후속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후속작품에서는 나혜석이 화려한 파리여행에서 돌아와 최린과의 관계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이야기, 이혼고백장 발표, 최린을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소송 사건, 말년의 불행 등을 다룰 계획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운동가로서 나혜석의 당시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과 도전에 대해서도 조명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전문 프로듀서와 직업 배우들을 기용한 50~60분짜리 중편 다큐픽션 영화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제작비용. 이에 따라 한씨는 최근 프랑스와 한국에서 스폰서 구하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한씨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일부 참석자들이 다큐픽션 영화를 보고 나혜석과 최린의 밀애 장면이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다큐픽션 영화이기 때문에 그녀의 남자관계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며 "나혜석은 미화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이 태어난 수원시 신풍동 화령전 옆에 세워진 나혜석 기념 표석.
 나혜석이 태어난 수원시 신풍동 화령전 옆에 세워진 나혜석 기념 표석.
ⓒ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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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1896년 경기 수원시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나기정은 대한제국 때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수를 지냈으며 일제 때는 용인군수를 지냈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 화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했다. 1914년 일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여권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했다. 이 회보 2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그녀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으로 체포돼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20년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7년 남편과 세계일주를 하다가 혼자 파리에 남아 8개월간 그곳의 야수파 미술을 공부했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한 뒤에는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1931년 봄, 나혜석은 파리에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연애 사실이 드러나 결혼 11년 만에 이혼을 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그해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을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다. 또 잡지 <삼천리>에 여행기 '구미유기'를 연재하며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했다.

 수원 인계동 효원공원 서쪽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 중앙에는 그림도구를 든 나혜석 동상이 세워져 있다.
 수원 인계동 효원공원 서쪽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 중앙에는 그림도구를 든 나혜석 동상이 세워져 있다.
ⓒ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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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나혜석은 1934년 8월 잡지 <삼천리>에 장문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는 이혼고백서를 통해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남녀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이중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또한 자신이 이혼을 당할 겨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뒤 이를 지키지 않고 매정하게 돌아서 버린 '파리의 연인' 최린에게도 공식적으로 1만2000원의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는 등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응징'에 나선다. 이 내용 역시 1934년 9월 20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예상하지 못한 나혜석의 공세로 궁지에 몰린 최린은 압력을 행사해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삭제하고, 나혜석에게 소송 취하를 종용한다. 이에 나혜석은 최린으로부터 2천원을 받는 조건으로 결국 소송을 취소하게 된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받은 돈으로 다시 파리 유학길에 오르려다 이를 포기하고, 서울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사립미술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후 빈손으로 여기저기 갈 곳 없이 떠돌다 결국 안양 경성보육원내 양로원으로 흘러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아꼈던 작은오빠를 따라 경성보육원을 나온 나혜석은 이혼당해서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오빠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 또다시 홀로 된 그는 친구와 친지, 사회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길거리를 헤매다가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52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죽음 이후 권위주의 시대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그러나 지난 1997년 제1회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을 계기로 재조명을 받으면서 그의 업적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원 인계동 효원공원 서쪽에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고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난 2000년 2월에는 정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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