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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세계에 사는 천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한 천사가 다른 천사를 처참하게 죽인다. 패배한 천사의 몸은 조각 나 지상으로 버려진다. 조각 중 하나가 지상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사악한 왕으로 환생한다. 그러자 하늘신은 아들 '게세르'를 내려보내 왕을 응징하도록 한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영웅이 된 아들은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지상에 내려가 싸우길 원했던 걸까.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강량원 연출·고연옥 작)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영웅신화'에 의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낯선 '게세르 신화'의 얘기를 차용하면서도 이 질문을 통해 현실과 접점을 만들어낸다.

연극 <칼질 속에 아버지> 포스터
 연극 <칼질 속에 아버지> 포스터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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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사(武士)였던 아버지 '찬솔아비'는 변소간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아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어머니 '아란부인'(박윤정)은 아들 '갈매'(김영민)에게 "원수를 찾아 복수할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갈매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자꾸 죽여야 하는 무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7년간 방황하던 갈매는 끝내 한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은 마을처녀를 재물로 받는 잔인한 왕, '검은등'(김정호)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곧 검은등과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마을처녀 '초희'(박윤정)는 싸움을 피하려는 갈매에게 '마지막 영웅'이 되어 달라고 애원한다. 이 의미 없는 방황을 끝내기 위해 갈매는 검은등과 대결을 결심한다. 결국, 그는 초희를 살려낸다. 아버지의 원수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그렇다면 복수를 끝낸 갈매는 이제 행복해졌을까. 끝난 줄 알았던 싸움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초희의 뱃속에 검은등의 아이가 있을지 모른다며 그녀를 죽이려 든다. 갈매는 낙담한다.

설화의 형식을 빌렸지만, '갈매'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얽히고설킨다. 복수를 강요한 어머니가 쥐어준 '칼'을 든 갈매처럼, 우리 역시 타인이 주는 '사회적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긴 마찬가지다. '목표'만 이루면 우리는 거기서 해방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목표에 다가서면 또 다른 목표가 세워지고, 그러다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인생의 끝'일 뿐이다. 겉으로 는 이 목표가 삶의 의미처럼 보이지만, 그것만 쫓다 인생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목표를 세울 것을 강요하는 '힐링'이 어떤 의미에서 거대한 사기극인 이유도 여기 있다.

작가가 '무사'라는 설정을 끌고 들어온 것은 이 때문이다. 무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싸울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죽어서도 싸워야 하는 무사들의 세계는 동경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었고, 그들은 싸우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 싸움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영웅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극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갈매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깨어나려는 듯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이는 갈매가 처한 현실이면서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에 대해 작가는 "꿈속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한 단계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꿈에서 깬 갈매의 마지막 대사는 울림은 크다. 그리고 그 대사는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쫓아다니는 동안 행복은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다"는 철학자 마크 롤랜즈의 말과도 묘하게 오버랩 된다.

"나 이제야 돌아왔어요."

덧붙이는 글 | *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 = 오는 5월 12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평일 20시 / 토,일 15시 / 월요일 공연없음. 일반 3만원 / 청소년(24세까지) 2만원 / 소년소녀(19세까지) 1만원.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 블로그(blog.naver.com/danbinews)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칼집 속에 아버지, #국립극단,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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