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학생 때 생애 첫차가 생겼다.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자동차를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 중반 당시에만 해도 교통이 무척 불편했던 분당으로 집이 이사를 가면서 통학이 어려워졌다. 이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내게 주어진 선택은 자취 아니면 자가용이었고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당시는 '오렌지족'이란 말이 나온 지 얼마 안됐던, 지금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시절이었다. 당연히 외제차는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또래의 젊은이들 사이에선 현대자동차의 '스쿠프'가 대세였다. 조금 더 고급스러우려면 '엘란트라'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야타족'이란 말도 있었는데 좋은차를 몰고 가다가 지나가는 예쁜 처자들에게 "야! 타!" 그러면 정말 차에 타는 경우가 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도 횡횡하던 시절이다(그러나 요즘은 케이블 TV에서 실제로 어떤 차 정도면 여자를 거리에서 유혹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기도 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학생인 자녀에게 차를 사준다는 결정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당시 아버지가 내게 어떤 차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주저없이 '프라이드'를 사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난 당시 국민차라고 불리던 '티코' 다음으로 경제적이던 그 차가 좋아보였다.

생애 첫차 기아 프라이드
▲ 생애 첫차 기아 프라이드
ⓒ 최희호

관련사진보기


나는 키가 크다. 아마도 키로는 대한민국 1% 안에 들것이다. 그러나 그 조그만 자동차에 쏙 들어가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했다. 건축과 학부생으로 당시 학교에서 밤샘 작업이 많았는데 과제를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일 때면 나는 꼭 그 작은 차에 와서 눕곤 했다. 좁고 작은 시트도 젊음 앞에선 불평이 못됐을 것이다. 게다가 과 동기 중에 아버지차 혹은 어머니차를 몰고 가끔 나타나는 친구들은 있었어도 온전히 자신의 자가용으로 통학을 하는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하기도 했다.

나는 날개를 단 듯했다.

몸도 마음도 여유롭고 자유롭던 학창시절 이었다. 거기에 차가 더해지니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머물어도 지하철이나 버스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혜택은 함께 했던 친구 후배들에게도 고루 닿았다. 사람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따라부르며 서울 곳곳에 있는 친구나 후배들의 집에 그들을 데려다 주는 것이 당시엔 하나도 힘들지 않았었다. 물론 개중에는 은근히 좋아하던 여자 후배도 한 명쯤 있었을 법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모델 자체가 작업용(?)으로는 거리가먼 '프라이드'여서인지 차 안에서 벌어지는 그 흔한 로맨스 장면 하나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한 여고생과의 추억이 있긴하다. 당시 가솔린 기름값은 리터당 500원이 안됐지만 매일 50km 넘게 주행을 했었으니 기름값이라도 내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에 과외는 정말 내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처음 과외하러 가는 날 언제 그랬냐는듯 아르바이트는 즐거움을 넘어, 마치 바싹 말라 있던 낱알 하나가 촉촉한 토양으로 착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건조한 환경에서 자란 나는 젊은 어머니와 여고생이 살고 있는 그 집의 냄새가 좋았다. 일주일에 두번 가는 과외가 늘 즐거웠다. 

약 반년이 흐르고 나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자연스럽게 과외도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2년이나 남은 그 아이를 계속 볼 명분이 없던 나는 몇 달 동안 마치 금단현상을 격는 듯 힘들었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랐던 어느날 나는 그애를 다시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던 그 아이의 실루엣과 너무도 반가워 하던 그 표정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DSLR 카메라 사진처럼 생생하다. 오전에 만나서 종일 같이 놀다가 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같이 보고 헤어졌는데 그날 차에 얽힌 단 한 가지 에피소드 외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차를 몰아보겠다는 여고생의 성화에 결국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운전대를 잠시 넘겼다. 옆 자리에 탄 난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 골대를 아슬아슬 피해 다녔다. 나는 아마도 아직 미성년이고 모든 것에 제약이 많던 그 아이에게 잠시나마 일탈의 기쁨을 선물 할 수 있어서, 그런 어른이어서 뿌듯했었던 것 같다.

그게 다다. 금단현상을 격을 만큼 힘들었던 나의 애뜻한 마음도 IMF의 궁핍함에 단돈 150만 원에 팔아버려야 했던 내 생애 첫차 만큼이나 허무하게 나에게서 잊혀졌다.

그 후로 나는 세번에 걸쳐 다른 차들과 만남과 이별을 했고 떠나 보낸 내 애마들은 모두 엇비슷한 추억들을 담고 있다. 차는 점점 더 비싸지고 더 커졌지만 생애 처음으로 맞이했던 그 작은 '프라이드' 만큼 내게 설렘과 기쁨을 줄 수 있던 차는 없던 거 같다. 또 앞으로도 내가 설령 그 비싼 '밴틀리'를 몰게 된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몸을 싣고 좋아하는 사람을 옆자리에 태우고 내가 원하는 어디로든 달려주던 자동차는 남자에게 있어 최고의 장난감이자 친구이자 애인과 같은 존재이다.

덧붙이는 글 | [공모] 나의 애마때문에 생긴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