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게더>는 왕가위의 영화다. <해피투게더>는 왕 감독의 대표작 <중경삼림> <화양연화> <2046>이 어떻게 탄생 할 수밖에 없었는지 요연하게 설명되는 영화다. 쓰러질 듯 위태롭고 지나간 색채와 낯선 이미지들이 남기고 간 잔상이 주는 여훈의 기법들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중경삼림>이 그런 의도적인 색채와의 복합성을 목적으로 이야기를 꾸려간 영화라면, <해피투게더>는 그런 방법들이 어떻게 설명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감독의 출발 신호탄이 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렇기에 <해피투게더>는 영화라는 시간예술에서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스토리의 방향성을 관객들에게 일일이 안내하지 않아도 관객들을 시각과 청각의 차원에서 오감을 붙들고 엔딩 크레디트까지 관객들을 충실하게 끌고 갈 수 있게 만든다.

영화가 이야기의 전개라는 스토리의 측면에서만 이뤄진 장르적인 한계가 명확한 예술이라는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나서 생각한다면, <해피투게더>는 스토리에 덧붙여진 이미지와 사운드가 스토리의 의도된 공백에 어떻게 들어설 수 있는지 영리하게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감 없는 사랑의 표현 담은 <해피투게더>

 <해피투게더> 포스터

<해피투게더> 포스터 ⓒ 서무영화사

영화는 여행을 위해 브라질로 온 보영(장국영 분)과 아휘(양조위 분)가 부득이한 일로 길을 잃고 그곳에서 상당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다투고, 다시 화해하는 연애의 감정기복을 드러낸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해 술집 안내원으로 일하는 아휘와 달리 보영은 처해진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아휘를 떠나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면서 '외부의 세계'에서 술에 절어 사는 인생을 지내게 된다.

하지만 아휘가 일하는 술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둘은 다른 직업적인 상황에 의해 어긋나고 뒤틀린 불만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싸우고, 다시 화해한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보영은 간호를 빌미로 아휘와 함께 지내게 되지만 보영에게 다가오는 권태와 자유로의 갈망들이 결국은 서로를 결코 완전하지 못한 채 떠나게 만든다. 아휘는 옮긴 일자리에서 만난 장(장첸 분)과 각별한 사이를 지내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싫어하는 장 또한 그를 떠난다.

<해피투게더>에서 둘은 일반적인 연애에서 포착되는 내밀한 감성의 기척들을 곧바로 표면으로 나타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배신감을 전화기를 집어던지거나, 거울을 깨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때문에 그들의 감정이 사랑에 있어서 솔직하고, 표현에 있어서 가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극중 인물의 기척들이 결코 솔직하거나 무식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인정하기 싫은 상대방의 위선과 그로써 그것을 단정 짓고 뜻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에 대한 나약함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당장 간호를 서슴지 않는 행동.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어떤 하나의 분명한 명사로 설명 할 수 없는 답답한 불편함은, 서로에 대한 분노 이전에 내 자신에 대한 나약함을 울부짖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자기 감정애의 분노 때문에 대부분의 연애라는 것은 완전하게 개인의 것으로 환전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보게 되는 상대방의 외부세계는 보다 진한 색채로, 자극적으로 불편하게 다가온다. 내가 절대 탐지할 수 없는 그의 세계에서 그에게 주먹질을 한 그 남자는 가장 사악한 이미지로 각인될 뿐이다. 그럼에도 아휘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이 올 것이며, 그 연락이 오기 전에 어서 떠나버리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

지지고 볶는 두 남자... '행복했던 때는 그때였구나'

 영화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영화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 서무영화사


동성 간의 애정을 다룬 영화를 요소로써 공통된 영화로 다루자면 <브로크백 마운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애정을 다루는 방식에서 <해피투게더>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세상의 통념에서 거부감을 바탕으로 힘들어 하는 두 남자의 갈등을 그들 개개의 외부세계를 끊임없이 관객에게 보이면서 촉발되는 안쓰러움과 연민이 있다면, <해피투게더>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는 영화다.

아무리 나열하고 설명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아휘와 보영은 끊임없이 서로를 지지고 볶는다. 알면서도 매번 부딪치고 미끄러지는 게 연애인 것이다. 그렇기에 왕가위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 한계점을 인정하고 그 외에 불필요한 외적(완전히 용납될 수 없는)인 전제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모두는 각자의 틀 안에서 밖에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통상적으로 부르기 쉬운 함축된 단어 속에는 개개인이 설명할 수 없는 빈 공간들만 존재하는 듯하다. 그 안에 각자는 필요한 요소들을 수합해 집어넣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관계를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 결코 깔끔하게 분류될 수 없는 세월의 찌꺼기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한을 내포하고 있다. 좋은 기억이든 쓰레기 같은 추억이든 그 둘의 세계를 오로지 그 둘만의 것으로 확립돼야만 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거기서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어떤 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나중에 충분히 깎기고 다듬어진 시간의 변주 과정이 지나고 나서야 순식간에 느낄 수 있는 사실 하나. 가장 행복했던 때는 그때였다는 것. 그게 전부일 것이다.

누군가가 왕가위 감독의 초기작 <해피투게더>가 어떤 영화냐고 내게 묻는다면 내 대답은 영화 속 마지막 장면을 빌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가 왜 행복한 표정으로 여행을 다니는지 알았다. 그에겐 아무때나 돌아와도 환영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다. 15년이 훨씬 지난 영화가 있다. 어딘가 떠나 있어도 나를 보며 환영하고 있을 것만 같은 영화가 있다. 그게 바로 이 영화다.

해피투게더 왕가위 양조위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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