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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새 정부의 핵심과제로 떠오른 '청년실업문제' 관련 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글이 써지질 않았다. 고민하는 시간만 길어졌다. 그때 지인 하나가 이와 관련된 인물이 있다며 정보를 줬다. 작년 12월,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27세 청년이 국회의원 보좌관과 대기업 자리를 마다하고 고향 마을 충남 서천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었다. 그 순간 그 청년을 만나면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연락을 취한 뒤, 그를 보기 위해 충남 서천으로 향했다. <기자 말>

충남 서천에 가면 다마스를 타는 남자 유방씨를 만날 수 있다. 주목적은 책 배달이다.
▲ 다마스를 타는 남자 유방 충남 서천에 가면 다마스를 타는 남자 유방씨를 만날 수 있다. 주목적은 책 배달이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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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터미널.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멀리서 '다마스' 한 대가 다가왔다. 앞좌석 문이 열리고 다부진 청년 하나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초록바탕에 검은 글씨, 그곳엔 '유방'이라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유방? 이름이 정말 유방이라고?'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름 한 번 들었을 뿐인데, 미리 준비한 질문들이 초기화됐다. 그는 기자의 이런 상태를 짐작했는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국민의 젖줄, 서민의 희망, '유방'입니다."

처음이었다. 이런 독특한 이름. 말 그대로 대한민국 0.01%의 이름을 가진 사내를 마주한 것이다. 청년실업문제고 뭐고 이름 관련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꾸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리 고백하건대 괜한 생각이었다. 그를 쫓아 1박 2일을 함께 다녀보니 스스로를 왜 '국민의 젖줄'로 불렀는지 알게 됐다. 분명한 건, 특이한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의 젖줄, 서민의 희망"... 유쾌한 청년

그를 만나면 이렇게 특이한 명함을 받을 수 있다.
▲ 국민의 젖줄, 서민의 희망 '유방' 그를 만나면 이렇게 특이한 명함을 받을 수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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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마을이다. 읍내라 불리는 곳도 보통의 어른 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10분 정도에 닿을 수 있다. 스물일곱 청년 유방씨는 작년 말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서천 읍내의 유일한 서점, '교학사'가 그의 일터다.

그곳에서 유방씨가 하는 일은 책 배달원. 마침 일을 하는 도중에 마중나온 터라 서점으로 바로 향했다. 수북이 쌓인 책과 참고서들. 거두절미하고 왜 서점 배달원이냐고 물었다. 유방씨는 슬쩍 한번 웃더니, "여기가 바로 서천 정치의 1번지"라는 엉뚱한 답을 했다.

정치 1번지? 그랬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서점을 찾았다. 사람들은 "비인면 사는 종민이가 다음 달에 장가간다"는 소식부터 "그래도 박근혜를 믿어야지"라는 말까지. 자연스레 지역 여론을 만들고 있었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가 왜 서점을 직장으로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심이 드러났다. 무거운 책 꾸러미를 옮기다가도 엉덩이만 붙이면 주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잡고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은 마치 훌륭한 뷔페에 앉아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미식가와 꼭 닮아 있었다.

오후 5시 되자, 유방씨의 행동이 빨라졌다. 이날은 일주일에 두 번, 양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는 이동하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일손이 부족해서 갔던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고향에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지를. 어떤 점이 정말로 바뀌어야 하는지를."

유방씨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양계장으로 향하는 길,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을 헤아려 보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10분 정도 차량으로 이동했는데 도중에 만난 차들이 열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그만큼 한산했다. 유방씨는 이 모습이 지금 우리네 시골의 현실이라고만 했다.

명문대 스펙 뒤로하고 고향으로... 왜?

양계장은 분주했다. 만여 마리의 닭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 유방씨는 매우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손에 닭다리를 채고 빠르게 닭을 옮겼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만만치 않게 불었는데 어느새 그의 등판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정신없이 닭을 옮긴 뒤 푸짐한 채소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제야 잠시 숨을 고르나 싶었는데 유방씨는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5분 뒤, 다마스 뒤쪽에서 걸어나온 그는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 서천의 한 공부방에서 야학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 서천늘푸름배움터에서 그는 강의를 하고 있다
▲ 야학 선생님 유방 매주 금요일 서천늘푸름배움터에서 그는 강의를 하고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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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늘푸름배움터, 그곳엔 나이 지긋한 어머님들이 앉아 계셨다. 유방씨는 어느새 강단에 서서 유학 시절 마스터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기자가 수첩에 적은 한마디가 있는데, 요즘 말로 '쩐다(대단하다)'라는 속어였다.

그는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2012년 3월부터 반년 동안 농촌진흥청 주관으로 현장에서 직접 농사를 배우고 왔다. 유방씨는 그때를 생각하며 "매일 40도가 넘었던 기온, 하우스로 기어들어온 독사, 보리를 습격하던 개미 떼까지 많은 것이 잊히지 않지만, 그래도 알제리 사람들과 함께 일궜던 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농업의 소중함, 식량주권의 유지 및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부대끼고 느끼고 온 것이 지금의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현지에서 알제리 사람들과 함께 있다보니 자연스레 익히게 됐다고 했다.

유방씨는 이때 농업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유방씨는 이때 농업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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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게 놀란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끊임없이 샘솟는 체력이 압권이었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20대라지만 아침부터 쉼 없이 나르고 옮기고 이동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유방씨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해냈다. 그러면서 "어머니들도 이 시간까지 수업받는데 저도 힘내서 강의 해야죠"라고 했다. 이미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많이 힘드셨죠? 여유 찾으려고 내려온 건데. 이렇게 바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더라고요. 고향에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부터 뛰어야 했어요."

향토학자 아버지와 함께 일구는 마을 공동체

언덕 중턱에 위치한 그의 집은 푸른 대나무 숲을 뒤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집 안은 썰렁하고 어두웠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후로 고향집엔 아버지 혼자서 계셨고요. 여동생이랑 저는 계속 서천을 떠나 있었던 지라."

유방씨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아버지 유승광 박사는 천상 학자세요. 25년 동안 지역 연구만 하셨거든요.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히 서천을 뒤지고 다니셨어요. 그렇게 가능했던 이유요? 어머니가 항상 응원해주셨죠.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서천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 가득하신데. 점점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보였죠. 집안에 먼지가 쌓여갔고, 아버지의 와이셔츠는 구겨져 있었죠. 지난 연말 집에 왔을 때 결심했어요.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어야겠다.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이 지점에서 한마디 더 보탰다.

"실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제가 채식주의자예요."

유방씨의 귀향, 지천에 널려있는 싱싱한 채소도 한몫했던 거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채식만 했던 것은 아니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유 없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그 후로 치료 차원에서 채식으로 식단을 바꿨고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고 한다. 

<서천역사바로알기> 모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마을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도우미가 되었다.
▲ 아버지 유승광 박사 <서천역사바로알기> 모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마을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도우미가 되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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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주말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가 시작됐다. 격주마다 특별한 일이 계획돼 있었다. 충남 조선고 국사 선생님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 유승광(53)씨와 함께 지역 주민들이 모여 역사현장을 돌며 '서천역사바로보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부분을 정말로 많이 고민했어요. 고향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지역 주민들이 마을을 더 아끼고 좋아할까.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지역 주민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보면 차츰 '살기 좋은 마을'이란 소문도 날테고. 언젠가 저처럼 고향을 떠났던 청년들도 돌아오지 않겠냐는 생각도 하게 됐죠."

그는 '서천역사바로보기' 모임에 대해 한마디 더 보탰다.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것, 참 의미 깊어요.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이 모임을 통해 지역과 주민이 하나 된다는 거죠. 모임의 주체가 서천 주민이고, 아버지와 저는 그저 도우미 역할이예요. 아버지는 강사로. 저는 보조로."

"서천이 저를 키웠으니 지금부터 제가 인재를 모아야죠"

알제리에서 공부하며 농사 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 농부로 알제리에서 공부하며 농사 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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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방씨도 고향에 내려오니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찾아도 주변에 또래 친구가 부족했다.

"무슨 일을 하려해도 함께 일할 청년들이 필요한데, 보다시피 없어요."

그럴 것이 서천엔 그 흔한 대학 하나 없었다. 청년들이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유방씨가 고향에 내려온 근본적인 이유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밝혔다.

"지역에서 필요한 인재는 이제 지역에서 만들어야죠. 서천이 저를 키워냈으니 지금부터 제가 서천에 필요한 인재들을 모으고 만들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스물일곱 청년 유방씨, 고향에 내려온 지 이제 딱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해냈고 서천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마을공동체'에 초점을 맞춰 청년농민모임, 서천배움터, 서천독서모임, 서천역사바로알기 등 지역 주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 했다. 이를 통해 서천에서 필요한 지역 일꾼은 서천에서 직접 키운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보탰다.

"이렇게 걷다보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어요. 서천에도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도 생길 테고, 거기에 따른 일자리도 만들어질 거고, 그러다 보면 청년들이 모이겠죠. 굳이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향하는 길, 다시 한번 그가 건넨 명함을 꺼내 보았다. 그곳엔 '서민의 희망, 국민의 젖줄'. 그의 엉뚱함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 다시 서천을 찾게 됐을 때 그로 인해 이곳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될까 하는 희망 섞인 미소였다. '국민의 젖줄' 유방씨의 행보가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태그:#유방, #유승광, #서천, #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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