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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향집 댓돌에 놓인 고무신에도 눈은 쌓여만 가고.
▲ 고향집 댓돌 고향집 댓돌에 놓인 고무신에도 눈은 쌓여만 가고.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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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올 겨울방학 동안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봉사를 이수해야 해서 집에 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연말 새해 새 아침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며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는 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뜬금없이 돈 봉투를 내민다.

"나 지금 아르바이트 해요. 초등학교 4학년 가르치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로 하고 40만원 받았어요. 학교 인근이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돼서 할 만해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게 좋지. 네 삶이 풍요로워져서 좋기는 허다만은 공부 열심히 히서 장학금을 타오는 게 나는 더 좋다."
"아빠! 괜찮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임용고시 붙을 자신 있으니까 넘 염려하지 마세요."

아들은 돈을 꺼내 아빠, 엄마, 누나에게 각 10만 원씩 나누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용돈으로 쓴다며 10만 원을 지갑에 넣는다.

이웃 새몰마을에 전주에 사는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놀러와 비료포대를 이용 썰매를 타고 있다.
▲ 비료포대 썰매 이웃 새몰마을에 전주에 사는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놀러와 비료포대를 이용 썰매를 타고 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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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아들이 다 커서 돈을 벌어다 내 손에 쥐어주니 고맙기만 하구나. 잘 쓸게."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쥐고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잃어버린 목도리를 살까? 아님 추운데 내의를 한 벌 사 입을까? 돈을 만지작거리다 첫 봉급 타서 어머니께 옷 한 벌 사드려니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한없이 울던 생각이 났다.

아, 그래. 이 돈은 나를 키워주고 길러주신 우리 부모님과 고향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 나와 내 자식들 세끼 밥 편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을 위해 쓰는 게 맞아.

부모님께 '효도'하려 해도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주말에 집에 오면 어머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맨발로 이 집 저 집 돈 꾸러 다닐 때 선뜻 빌려주신 마을 사람들이 계시지 아니한가.

마을 사람들에게 드릴 찬거리를 아내와 함께 사가지고 갔다.
▲ 조기와 동태 마을 사람들에게 드릴 찬거리를 아내와 함께 사가지고 갔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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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엄마! 항상 애기로만 보이던 아들이 고생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을 이렇게 쥐고봉게 기분이 참 묘허고만. 의미 있게 써야 헌디 어디다 쓸까 고민허다 결정힜네. 자네는 그 돈 어따 쓸랑가?"
"어따 쓰기는 뭐설 어따 써! 봉급 타먼 일주일도 못가 맨날 마이너슨디. 돈 이리 내놔! 아들이 애쓰게 벌어온 돈을 진짜로 쓸라고 힜소? 등록금 낼 때 보태 써야지 쓰기는 어따 쓸라고 혀! 지금 카드빚이 얼마나 된지 알기나 허요?"
"음마! 아들 뒷바라지 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잉게 나도 내 맘대로 한번 써봐야제 시방 뭔 소리여!"
"도대체 어디다 쓸라고 그러요?"
"고향 사람들에게 찬거리나 좀 사다 드릴라고 허고만. 눈이 몽땅 니리서 어디 장에나 한번 갔겄는가."

'윗골'에 있는 소 막사에 쇠죽 주러가는 동환이 어르신.
▲ 진뫼마을 '윗골'에 있는 소 막사에 쇠죽 주러가는 동환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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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지금까지 그만큼 사다드렸으먼 됐어. 넘 오바허지 말고 돈 이리 내놔! 마이너스 카드 내역서 볼 때마다 한숨 나와 죽겄는디 어따 쓸라고 난리여. 하여간 그 돈 쓰기만 허먼 알아서 혀. 좋지 못헐 텅게."

그날 밤 결혼해서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두메산골 어린 시절 가난했던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또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기한 내 못 낸다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머니는 집집마다 돈 빌리려 다녔는데 당장 비료 사와 농사지을 돈까지 기꺼이 빌려주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모를 심던 사람들,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겨우내 마을 회관방에 모여 밥상 두 개면 충분한 지금 사가지 않으면 난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1월 6일 일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오일장이 열리는 광양시장으로 발길 옮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가고 오늘, 고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겨우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회관
▲ 마을 회관 겨우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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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아빠! 조기 한 상자만 사야 돼! 더 이상 뭐 사자고 힜다 허먼 나 도로 집으로 들어가불 텅게 그리 알아."
"알았어. 걱정허지 마!"

지금 시골에는 눈이 많이 내려 분명 찬거리가 부족할 게 뻔하다. 마을 사람들 하루 종일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까지 해 드시고 헤어지니 지난해 겨울처럼 김치 하나에 드시고 계신지 모를 일이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비교적 양이 많고 저렴한 콩나물 가게부터 들어섰다.

"콩나물 같은 싼 거 좀 사가세. 이왕이먼 두부도 한 판 사가고."

내 예상은 적중해 아내는 콩나물과 두부 한 판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부와 콩나물을 나눠 들고 다니면 혹시 아내가 힘들어 신경질 낼까봐 가게에다 맡겨두고 조기를 사러 돌아다녔다. 조기를 골라 놓고는 "이왕이면 저기 저 동태도 좀 사가세. 조기를 많이 사니까 싸게 줄턴디…" 하고 말을 건네자 "아예 장을 봐서 가지 그러요!" 면박을 준다.

마을 앞 꽃밭등과 섬진강
▲ 꽃밭등 마을 앞 꽃밭등과 섬진강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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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흘기면서도 아내는 "저기 저 동태는 얼매요? 좀 싸게 줏쇼. 우리 묵을라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을 어르신들 갖다 줄라고 헝게 젊은 아저씨도 봉사헌다 생각허고 좀 싸게 줏쇼" 하며 동태도 산다. 시장을 나오려 하니 맨 끝에 과일 좌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나는 침을 꼴딱 생키며 말했다.
"가애 엄마! 이왕이먼 귤도 좀 사가세. 오랫동안 눈 속에 갇혀 있응게 얼매나 과일이 묵고잡겄는가. 귤 한 박스만 사가세!" "환장허겄네. 조기만 사간다고 허더니 이것저것 다 사네." "나도 아들이 준 돈 일부 헐어서 썼응게 그리 알아!" "잘 힜어. 장바구니 들먼 돈 뭐 쓸 것 있가디. 남에게 복을 주는 사람은 복도 대물림으로 도로 받는 법이여! 남에게 베풀먼 다 자식들한테 돌아가." "글먼 술은 안 사갈라요?" "당신 모르게 젠작 트렁크 속에 사다 넣어 놨제. 내가 누구여!"
저리소산 아래 섬진강이 산에 막혀 휘돌아 나가고 있다.
▲ 섬진강 저리소산 아래 섬진강이 산에 막혀 휘돌아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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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니 회관 지붕은 아직 리모델링 공사가 안 끝났고, 내부 시설은 다 끝났는지 현관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허허! 뭔 놈의 것을 요로케도 많이 사왔데아, 응. 제삿장 봐온 것맹키로 몽땅도 사와부렀네. 반찬 다 떨어져서 그라니도 내일 순창 나가서 찬꺼리 좀 사올라고 힜는디 자네가 장베기(장보기) 다 봐와불었네."
"저 학교 댕길 때 돈도 빌려 주고, 우리 부모님 농사지을 때 동네 사람들이 도움 많이 줬는디 내가 그 고마운 마음 잊고 살먼 되겄어라우. 그냥 뭐 이것저것 쬐끔 사왔고만이라우."
"공짜로 돈 빌려주고, 공짜로 일 힜가디 그런가. 사와도 너무 많이 사와부렀고만. 자네도 자식들 둘 다 대학 댕긴 게 힘들 턴디 앞으로 요로케 많이 사오지마! 술이나 한두 병 사오먼 모를까."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이불을 가지고 나와 별을 벗삼아 잤던 벼락바위에도 눈이 소복이 내렸다.
▲ 벼락바위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이불을 가지고 나와 별을 벗삼아 잤던 벼락바위에도 눈이 소복이 내렸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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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만 해도 회관 방은 단열이 잘 안 되어 곰팡이가 피고 찬바람 솔솔 파고 들어와 썰렁하기만 했는데 정부에서 리모델링을 해주니 방에 훈기가 돌며 따스했다. 화장실도 내부에 하나 새로 설치되어 겨우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마을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 잘 되았는디 저그 씽크대허고 들어오는 문짝이 영 엉성혀. 문짝은 잘 안 맞아 손 좀 봐야 헐랑가비어. 글고 제섭이네 집 창고에 넣어둔 텔레비만 가져다 놓으먼 참 좋겄는디 제섭이네 어메가 열쇠를 가꼬 서울 자식들 집으로 가부러서 오늘이나 내일 쯤 니론당게 지달려봐야제."

집에 가니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화장실 좌변기 저장물통에 담긴 물도, 보일러실에 얼지 말라고 부동액을 넣어둔 물통도, 땅 속에 묻어둔 싱건지도, 지붕에서 눈 녹아 흐르는 홈통도, 하수구 내려가는 파이프 관도 모두 꽁꽁 얼어붙어 그야말로 얼음집이 되어버렸다.

연통에서는 연기가 퐁퐁 솟고, 먹감은 홍시가 되어 꽁꽁 얼고.
▲ 연통과 먹감 연통에서는 연기가 퐁퐁 솟고, 먹감은 홍시가 되어 꽁꽁 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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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음이 녹으려면 아마 따스한 봄이 와야 가능할 것 같다. 지난해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전기코드를 뽑지 않고 '외출'로 해 놓아 영하로 내려가면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방과 보일러실을 지켜줬다.

그런데 주말마다 가던 나도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발걸음 멈추니 맥없이 보일러만 펑펑 돌아가는 게 기름 값 아까워 아예 전기코드를 뽑고 보일러실 호스와 밸브를 이중 보온재로 감싸고 헌 이불로 겹겹이 쌓아 덮어놓았다. 그런데 올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계속되어 각 방으로 들어가는 보일러 호스나 보일러실 밸브 관이 터져버릴까 걱정이다.

콩나물 무치고, 멸치 넣어 두부 지지고, 무 썰어 넣고 자박자박 지진 조기찌개와 시원한 동태 국에 먹는 점심. 거기에 곁들여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어찌나 밥맛이 좋더니 고봉밥 한 그릇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해치우고 나자 '더 묵어라'고 밥그릇 달라 하시는 어머니들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도수! 밥 더 묵소. 여럿이 묵는 밥이라 참 마싯제. 그나저나 오늘 낮에 도수 덕분에 마싯게 잘 묵네. 월국떡이나 월국양반 살았으먼 얼매나 좋아라고 힜겄어."

사는 게 뭐 특별한 거 있겠는가. 행복한 삶, 어디 멀리 가 있겠는가. 나와 부모님 도와주시던 마을사람들 잊지 않고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밥상 마주하며 막걸리 한 사발 따라드리며 함께 웃고 기쁨 만끽하며 누리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마을 앞에 놓인 징검다리에도 얼음이 잡히고.
▲ 징검다리 마을 앞에 놓인 징검다리에도 얼음이 잡히고.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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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태그:#김도수, #섬진강, #진뫼마을, #덕치, #장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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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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