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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도록 표지사진. 작품명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면에 유화 44.5×37.2cm 1887년 9월-10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반 고흐 도록 표지사진. 작품명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면에 유화 44.5×37.2cm 1887년 9월-10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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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반 고흐 인 파리전'이 내년 3월 24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반 고흐(1853~1890)가 파리 시절(1886~1888)을 보내면서 그의 예술이 어떻게 획기적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37살이 되는 1890년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그는 10여 년 동안 서양미술사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며 사라져간 불운한 천재였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의 고흐 연구가들이 7년간 그가 색채, 양식, 구도를 두고 어떻게 고민했으며 그 비밀코드가 뭔지를 엑스선 촬영사진 등을 통해 연구했는데, 그 결과물을 이번 서울 전을 통해 볼 수 있다. 마침 네덜란드미술관이 개보수 중이라 이번 전시 성사가 수월했단다. 이번 전시품의 보험총액만 해도 5500억 원에 이른다.

불운한 젊은 시절, 예술가 소명 굳히다

'20살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1873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20살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1873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 반 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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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1869년 헤이그 구필화랑에서 직원으로 취직하여 1873년엔 런던에서 1875년부터 파리에서 근무했는데 그 젊은 날 뭐하나 순탄하게 풀리는 게 없었다. 하숙집 주인 딸과 연애사건이 실패하자 성격이 음울해져 고객과 자주 다투고, "미술거래는 일종의 도둑질"이라는 극언 등으로 주인에게 밉보여 1876년에 해직된다.

신앙의 열정이 강했던 고흐는 1878년 부친의 업을 이어보려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낙방해 단기과정을 마치고 벨기에 보리나즈 탄광촌에 지원해 전도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열정적인 게 흠이었고, 근로조건개선을 선동하고 광부파업에 동조하고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

1881년에는 사촌 케이와 사랑에 빠졌으나 거절당하고 다음 해 애가 둘 있는 창녀 시엥을 사랑했으나 동생 테오가 이를 말렸다. 20대에 이런 연속적인 해고, 실연, 좌절을 경험하곤 그도 이때를 "어둡고 쓸쓸한 불모의 시기"라고 회고했다. 이를 극복하려 그림에만 몰두한다. 이런 와중에 수작인 '감자먹는 사람들'도 나온다.

몽마르트르 국제 분위기 속 전위미술실험

반 고흐 I '식당 내부 풍경' 캔버스에 유화 44.5×56cm 1887년 여름 파리. 오텔로 크뢸러뮐러 미술관소장 ⓒ 2012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이 작품은 고흐의 점묘화풍의 정석이라고 불린다
 반 고흐 I '식당 내부 풍경' 캔버스에 유화 44.5×56cm 1887년 여름 파리. 오텔로 크뢸러뮐러 미술관소장 ⓒ 2012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이 작품은 고흐의 점묘화풍의 정석이라고 불린다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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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1886년, 28살이 되는 해부터 파리생활이 시작된다. 그가 서둘러 파리에 간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파리에 사는 동생 테오와 함께 살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당시 명성 높은 코르몽 화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호는 몽마르트르에서 독일의 리베르만, 미국의 휘슬러, 벨기에 롭스 등을 만나 국제적 분위기를 즐긴다. 거기서 피사로, 로트레크, 드가 등도 만났다. 또한 점묘파 쇠라, 시냐크와도 접촉한다. 파리생활 2년 동안 그의 화풍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덜란드시절 사실적 화풍과는 확 다른 밝은 색조의 신인상주의 풍으로 바뀐다.

당시 보헤미안 예술가의 아지트인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와 거리의 여인들이 뒤섞여 사는 산동네 빈민촌이다. 당국에서 손을 못 댈 정도로 환락과 퇴폐의 횡행하는 거리였다. 하긴 예술이란 때로 데카당한 분위기에서 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자유분방함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와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

파리 근교풍경에 신인상주의 적용

반 고흐 I '연인이 있는 정원, 생-피에르 광장' 캔버스에 유화 75×112.7cm 1887년 5월 중순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반 고흐 I '연인이 있는 정원, 생-피에르 광장' 캔버스에 유화 75×112.7cm 1887년 5월 중순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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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리 시절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다양한 기법을 실험한다. 예컨대 짧게 끊어지는 화필이나 순간적 빛의 효과에서 받은 인상 포착하기, 점묘법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마네도 그랬지만 물감을 두껍게 덧칠하여 화면에 리듬감과 생동감을 주는 몽티셀리의 임파스토기법도 터득하여 이를 응용한다.

들라크루아의 색채에서 영감을 받은 고흐는 무엇보다 색채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붉은 양귀비, 푸른 물망초, 분홍 장미, 노란 국화에서 파란, 빨강, 초록, 노랑의 보색관계를 탐구하고, 색의 농담과 조화를 찾는다. 반 고흐는 이런 색의 미묘한 뉘앙스를 정물화나 파리주변 풍경화에도 적용하여 색채의 혁신을 꾀한다.

새로운 회화의 돌파구, 일본판화

반 고흐 I '탕귀 영감' 캔버스에 유화 92×75cm 1887년 9월-10월 파리. 로댕 미술관소장 ⓒ 2012 Musee Rodin Paris '탕귀 영감'은 로댕이 직접 컬렉션 한 작품으로 로댕박물관 소장품이다. 한 번도 해외반출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왔다
 반 고흐 I '탕귀 영감' 캔버스에 유화 92×75cm 1887년 9월-10월 파리. 로댕 미술관소장 ⓒ 2012 Musee Rodin Paris '탕귀 영감'은 로댕이 직접 컬렉션 한 작품으로 로댕박물관 소장품이다. 한 번도 해외반출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왔다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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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최고인기작인 '탕귀 영감', 이 그림의 주인공인 탕귀 영감은 화구상이었는데 품질은 낮아도 그 당시 가격이 아주 저렴해 인기가 높았다. 종종 돈 대신 그림을 받고 화구나 물감을 내주며 빈털터리 화가들을 이모저모 도와준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을 보면 벚꽃, 후지산, 기모노차림의 여자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등 온통 일본판화(우키요에) 풍이다. 뭔가 새롭고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걸 찾고 있었던 고흐에게 1887년 6월에 벵(Beng)화랑에서 본 일본화, 그 명암대비와 평면분할, 단순한 구도 속 밝은 색채가 주는 충격은 너무나 컸다.

이런 자포니즘(Japonism, 日流)은 1867년에 열린 파리세계박람회에 일본공산품 포장지로 우키요에가 유입되면서 시작된다. 고흐는 습작의 차원에서 일본작가 히로시게 작품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이를 수집하기도 한다. 당시 고흐뿐만 아니라 마네는 말할 것도 없고 모네는 아파트 벽을 아예 일본판화로 덮을 정도였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 그린 자화상

반 고흐 I '자화상' 마분지에 유화 41.0×33.0cm 1887년 3월-6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가운데 옛 사진보다 왼쪽 작품이 더 색이 날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싼 물감을 썼기 때문이다
 반 고흐 I '자화상' 마분지에 유화 41.0×33.0cm 1887년 3월-6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가운데 옛 사진보다 왼쪽 작품이 더 색이 날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싼 물감을 썼기 때문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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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고흐가 평생 태오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 외에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독립화가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정말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만을 그렸기에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 아닌가싶다.

게다가 그는 미술전공자도 아니기에 그 어떤 틀과 고정관념에 벗어날 수 있었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화상 등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대로, 생각한 대로, 상상한 대로 그렸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독창적인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위 자화상을 보면 제대로 된 물감을 살 수 없어 당시에 너무 싼 안료를 사용해 그림의 색이 날아가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고흐관련 연구자들은 그가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이 그림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엑스레이를 통해 밝혀냈다. 그가 얼마나 궁핍한 생활과 싸워야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흐 자화상 중 하나는 테오 초상화

반 고흐 I '테오 반 고흐의 초상' 마분지에 유화 19×14cm 1887년 여름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이 작품은 주인공이 고흐가 아니라 테오다. 고흐가 초록색 눈에 붉은 수염인데 반면 테오는 푸른 눈과 동그란 귀를 가지고 있단다
 반 고흐 I '테오 반 고흐의 초상' 마분지에 유화 19×14cm 1887년 여름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이 작품은 주인공이 고흐가 아니라 테오다. 고흐가 초록색 눈에 붉은 수염인데 반면 테오는 푸른 눈과 동그란 귀를 가지고 있단다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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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36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번에 그중 9점을 선보인다. 그의 자화상은 물론 모델을 살 돈이 없어서도 많이 그렸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근대의 특징인 자의식과 사람마다 다른 차별성, 개별성을 반영했다는 차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고뇌에 찬 그의 자화상은 모자와 수염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달라 보인다.

파리 시절 자화상은 후기 것에 비해 자화상이 어떤 변모의 과정을 겪었는지 비교할 수 있어 좋다. 고흐가 그의 자화상 속에서 겉늙어 보이는 건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 밝혀진 건 위 작품이 바로 그건데 고흐의 자화상 중 한 점은 동생 테오의 초상화라는 것이다.

주변의 일상과 보통사람 그리기

반 고흐 I '카페에서, 르 탕부랭(Le Tambourin)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_혼자 술 마시는 여자' 캔버스에 유화 55.5×47cm 1887년 1월-3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반 고흐 I '카페에서, 르 탕부랭(Le Tambourin)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_혼자 술 마시는 여자' 캔버스에 유화 55.5×47cm 1887년 1월-3월 파리.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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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특징 중 하나는 귀족이나 귀부인은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에서 보듯 그냥 보통 여자를 그렸다. 고흐는 네덜란드시절부터 농부, 광부, 노동자, 직조공 등 주변사람을 주로 그려왔다. 그의 스승 밀레가 농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아선가. 하긴 현대미술에서 옆집 여자를 그리는 건 당연하다.

물론 반 고흐는 그 어떤 이념에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1980년대 한국에서 유발된 민중화풍의 인물화를 백여 년 전에 이미 실험한 셈이다. 거기엔 인간에 대한 강한 휴머니티가 배여 있다. 고흐자신이 고생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 그런지 소외된 이웃과 감정이입도 잘 되고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도 깊어 보인다.

남프랑스 2년,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반 고흐 I '쟁기로 간 들판_밭고랑' 캔버스에 유화 72.5×92.5cm 1888년 9월 아를.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반 고흐 I '쟁기로 간 들판_밭고랑' 캔버스에 유화 72.5×92.5cm 1888년 9월 아를.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빈센트 반 고흐재단)소장 ⓒ 2012 Van Gogh Museum The Netherlands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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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고흐는 1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서양미술사에 빛나는 회화 875점과 수채화, 드로잉 등 1300점을 남겼다. 마지막 2년 남프랑스에서 최전성기를 맞는다. 주관적 감정을 유감없이 표출하는 그의 화풍은 후에 표현주의와 야수주의를 낳는다.

위 작품은 반 고흐가 아를지방에서 그린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도 소개되고 있는데 고흐의 최후걸작인 '까마귀 나는 밀밭'을 연상시킨다. 그 작품의 다른 버전 같다. 탁 트인 구도에 넘실거리는 하늘과 일렁대는 대지의 기운이 실감난다.

고흐는 1890년 권총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테오도 6개월 후 죽어 둘은 오베르 성당묘지에 나란히 묻힌다. 고흐는 "화가는 그림 그리는 게 최우선이다. 언젠가 내 그림도 물감 값 이상의 돈에 팔릴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죽은 지 100년인 지난 1990년엔 '의사 가셰의 초상'이 경매에서 무려 8250만 달러(약 1000억 원)에 팔렸다.

덧붙이는 글 | [도슨트 해설시간] 평일(월~금)엔 오전 10시 30분(어린이), 11시, 오후 1시, 3시, 5시 등 5회, 토요일엔 오전 10시 30분(어린이), 11시, 오후 7시 등 3회, 일요일 및 공휴일은 오전 10시 30분(어린이), 11시 등 2회이다.
[입장료]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원. 1588-2618 홈페이지 www.vangogh2.com
[전시장 위치안내] http://www.vangogh2.com/etc/location.php



태그:#반 고흐, #테오, #몽마르트르, #일본판화(우키요에), #고흐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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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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