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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와서 그런지, 학기 말이라 그런 건지 익숙한 얼굴들이 캠퍼스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몇 명의 남자 선배들은 군대에 있고, 학교에 있던 많은 선배들은 졸업 후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 소위 취준생(취업준비생)이라는 이들은 가끔 페이스북에 나타나다 흔적을 남기고는 다시 사라진다. 

몇 주 전에 과제 준비 때문에 알게 된 선배가 한 명 있다. 우리 학교에서 복수전공 인기 상위 순위에 속하는 경영·경제학과를 전공한 이었다. 친목 겸 같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그 선배가 내년 2월에 졸업을 한다고 해서 미리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졸업 안 할 수도 있어! 내년에도 계속 학교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학교에서 혼자 지나다니는 게 보이면 그 오빠인가 보다 생각해줘~!"라며 그 때에도 반갑게 인사하자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특유의 능청스런 말투와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을 눈치 챈 나는 깔깔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씁쓸함이 진하게 남았다. 그 뒤에도 계속 자신의 처지를 희화화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워 보였다. 처음에는 다들 이 개그에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점점 사람들은 그 개그 아닌 개그를 재밌게 웃어넘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개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굳이 개그로 표현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씁쓸한 개그에 웃었던 것일까.

취업을 못해서 졸업을 미루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실업자 신세로 대학 밖을 나서면 너무나 춥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미 졸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춘들이 서류상으로는 '아직' 엄연한 대학생 신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취준생의 꿈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은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취업준비에 매진한다. 자격증은 방학마다 하나씩 추가해야 할 필수품이 되었고, 노량진 고시촌은 고시생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승자와 패자가 크게 갈리는 이 경쟁 사회에 뛰어들기 위해 더 지독한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경쟁의 모습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나만 아니면 돼!', 혹은 '무한 이기주의'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나만 아니면 돼!'를 큰소리로 외치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경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와 사람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오히려 깔깔거리며 박장대소를 한다.

'나만 아니면 돼!'가 개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의 목표가 작고 사소한 게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타급 연예인들이 밥 한 끼를 가지고 물불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배꼽을 잡는다. 밥 한 끼 정도는 유명 연예인들에게, 휴일에 텔레비전을 시청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 그리 값비싼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대사가 온전히 개그로만 들렸을까.

직장인들에게 직장은 가끔씩 도피하고 싶은 노역의 장소이겠지만, 취준생에게 직장은 절박한 꿈의 장소이다. 직장인들은 밥 한 끼처럼 가벼운 야근에 낙점된 동료에게 '나만 안하면 돼!' 하며 키득거리겠지만, 그게 가벼운지 무거운지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고 싶은 취준생은 웃을 수가 없다.     

'내년에도 학교에서 반갑게 인사하자'는 그 선배의 개그는 사실 개그가 될 수 없었다. 너나없이 취업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 취업을 개그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애당초 웃기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가 취업 전쟁을 개그로 표현하고, 우리가 그 개그일 수 없는 개그에 깔깔대며 웃었던 것은 아주 잠깐이라도 '휴전'의 평화를 맛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며 현실을 잠시 외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리 웃어도 결코 개그가 될 수 없는 개그를 선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정지혜 씨는 현재 인권연대 청년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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