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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들녘이 눈시울을 젖게 한다. 여문 쌀알들 사이 오가는 속삭임으로 살랑인다. 싹 터고 대공 자라 꽃 난 자리 총총히 알곡이 들어설 때까지 마디마다 일어난 생명의 신비를 어찌 다 헤아리랴. 더하여 따가운 햇살과 세찬 비바람을 뚫고 허리를 지탱해온 농꾼의 손길에 이르러 숙연해질 따름이다. 고즈넉한 들녘이 평화를 잉태한다. 이보다 더 절실한 염원이 우리 삶에 또 있을까.

"함께 살자! 우리 모두가 하늘이다!"라며 지난 10월 5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서울까지 향하는 '2012생명평화대행진'이 있다.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철폐, 제주해군기지 백지화,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강제철거 금지, 4대강 원상회복, 핵발전 폐기, 무분별한 골프장 건설 중단, 기초농산물 국가수매 실시, 중소상인 생존권 보장,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권리 보장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을 위한 제도적 조건과 생태적 기반 구축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 다양한 요소의 그늘과 갈등을 짚어내고, 그것의 치유를 온몸으로 호소한다.

특히 이 행진의 출발점이 된 제주 강정마을은 지금 해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공사의 시발과 진행에 민주성이 훼손되고 국내외 전략가들의 조언도 묵살된다. 내용에 있어서는 더 문제이다. 지난해 6월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미국은 앞으로 아시아에서 기항지를 늘려갈 것이다"라고 밝힌 데 이어, <뉴욕타임스>(2011.8.1.)가 제주해군기지 건설문제를 주미한국대사관에 물었더니 미국 국방성이나 국무성에 문의하라며 "그들이 제주해군기지를 짓도록 압박한 장본인"이라고 답했다고 보도한다. 이 기사는 "미국정부는 이 해군기지가 아태지역에서의 미국의 방위체제의 중추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도 틀림없이 그것을 새로운 위협으로 본다, 따라서 이 해군기지 건설은 미중간의 긴장을 고조시키게 될 것이다"라고 이어진다.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미국이 배후에 어른거리는 제주해군기지는 후텐마 미군기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미군기지는 기나완시의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하여 1945년 건설 이래 끊임없는 미군범죄, 소음피해 등을 유발해 주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기지이전 요구가 강도를 더해가지만 미국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해법을 찾지 못하던 차, 이명박 한국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기지의 한국 이전을 제안했다는 기사(<문예춘추>, 2010년 9월호)가 나와, 눈을 의심케 한다. 한반도의 암울한 미래를 자초하고 있다.

지난 3일과 4일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에 에둘러진 거창에서 인권평화예술제가 열렸다. 24회째이다. 설날이 엊그제인 정월 초닷샛날 1951년 2월 10일, 국군이 15세 이하 359명 등 허물없는 자국 양민 719명을 야산 골짜기로 몰아 학살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평화'와 '인권'의 화두를 던진 상징적인 사건이다. 아둔한 공권력이 유발한 참담한 사건은 한동안 쉬쉬하며 한만 쌓다가 거창의 끈질긴 인권평화 노력의 결실로 1995년 거창사건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4년 약 2만 평의 부지에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매년 늦가을 추모공원의 국화 전시는 날리는 짙은 꽃향기와 아름다움으로 우리 마음을 더 처연하게 한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된 역사의 반성과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희망으로 바꿀 것인가 이야기하는 밤으로 시작되는 이 예술제는, 화해와 평화,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로 작동한다. 한국전쟁 중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넋을 추모하고 유족들의 활동을 도우며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을 일깨우기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으로 이어져, 감동과 함께 생명과 평화라는 공동체의식을 일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고 있다.

'평화의 섬' 제주에 공격을 부르는 자석을 들여세우는 아둔함에 더해, 120만여 년 전 형성되기 시작한 평화로운 신비의 화산지형 구럼비 발파를 강행하는 5년짜리 단발정권을 통해 인간의 야만을 본다.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오로지 살아남기에 여념 없던 양민들의 흩뿌린 피 위에 50여 년 숱한 난관을 뚫고 지속되는 거창의 인권평화 움직임은 '시간만이 거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을 것'임을 말한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난 2006년 겨울 끝바람이 안겨드는 2월 평택 벌판에서 듣던, 흙냄새로 묻어나는 백발성성한 노신부의 새롭지도 않은 일갈이 새로울 뿐이다. "저 넓은 황새울에 새파란 모가 심어지는 것이 평화요, 저 들에 무기를 가져다 놓는 것이 바로 폭력."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이화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이며 거창 동호마을에 살고 있는 텃밭농사꾼이자 인문학 편집인이다. 설익은 시집 <나는 이럴 때 야성이 돋는다>가 있다. 연구공간 파랗게날은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2시 명승고택을 찾아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를 펼친다.



태그:#평화, #야만, #제주 강정, #거창, #미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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