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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사건, 금강산 관광 중단, 대북단체 '삐라' 살포와 북한의 조준타격 논란 등.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 관계는 차가웠고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 지역은 곧바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지금, <오마이뉴스>는 접경지를 찾아가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편집자말]
연평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소연평도(가운데). 연평도는 2년 전 한반도의 화약고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연평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소연평도(가운데). 연평도는 2년 전 한반도의 화약고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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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는 오랜 세월 분쟁과 분단의 바다였다. 인천과 맞닿은 서해는 여몽전쟁, 신미양요 등의 전쟁터였다. 개성, 서울과 인접한 인천(강화 포함)을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했다. 하지만 남북은 서해의 해상경계선 문제를 합의하지 못했다. 그 탓에 휴전 협정 이후에도 서해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99년, 2002년 그리고 2009년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으로 인한 분쟁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연평도는 공사 중... 뭍 인부만 700~800명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4일, 대연평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는 높은 파도 탓에 뜨지 않았다. 가뜩이나 조용한 섬에는 비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2010년 11월 23일 북방한계선 너머 북의 옹진반도에서 날아든 포탄에 의해 망가진 주택. 옹진군은 피폭된 주택 바로 옆에 안보교육장을 신축중이다.
 2010년 11월 23일 북방한계선 너머 북의 옹진반도에서 날아든 포탄에 의해 망가진 주택. 옹진군은 피폭된 주택 바로 옆에 안보교육장을 신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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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는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뱃길로 2시간 30분 쯤 가야 도착할 수 있다. 2일 연평도를 들어가기 위해 여객터미널을 찾았지만, 전날 연평도 배편이 결항되는 바람에 배편이 조기에 만석이 됐다. 수십 명이 현장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터미널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에 연평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포격 사건 이후에 연평도 찾는 사람이 오히려 늘었다니? 남북 긴장 관계가 오히려 관광객을 부른 것일까? 이어진 터미널 관계자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포격 사건 이후) 복구공사 인부와 군인 등이 많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종종 배편을 구하기가 어려워요."

예정보다 하루 늦은 3일 도착한 연평도는 과거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곳곳이 공사 현장이었다. 뭍에서 온 공사 인부와 70~80대 노인들이 주로 눈에 띄었다. 꽃게잡이 철이라 낮에는 더욱 조용했다. 종종 젊은 주부들과 아이, 군인들이 오가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 도심의 여느 도로와는 그 분위기가 달랐다.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백령면 사곳해변에서 조업 중인 중국 어선들. 연평도 역시 중국 어선에 의한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꽃게가 9월에 반짝 많이 잡혔다가 10월 들어서는 전멸 수준이라 어민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사진출처 :옹진군청 홈페이지>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백령면 사곳해변에서 조업 중인 중국 어선들. 연평도 역시 중국 어선에 의한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꽃게가 9월에 반짝 많이 잡혔다가 10월 들어서는 전멸 수준이라 어민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사진출처 :옹진군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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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살피니 두 집 건너 한 집은 수리중이거나 새로 짓고 있었다. 공사 장비와 인부를 실은 트럭, 굴착기 등이 분주히 오갔다. 군부대와 학교 개·보수공사도 진행중이었다. 포격 사건 이후에는 대피소 수 십 곳이 현대식으로 개·보수됐다. 파출소 직원과 주민 등에 따르면, 현재 연평도에는 뭍에서 온 인부가 약 700~800명 정도 된다.

숙소를 잡기 위해 민박집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인부들의 장기 투숙 탓에 방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 민박에서는 "인부들이 잠시 뭍으로 나갔다"며 인부들이 머물던 숙소를 소개하기도 했다. 숙소에는 인부들의 옷가지와 짐이 방안 곳곳에 쌓여 있었다. 이 숙소도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70대 노부부가 차지해 버렸다.

4일 오후 6시께, 민박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대성식당으로 공사 인부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인부 20여 명이 빠져나가자, 10분 만에 다시 인부 10여 명이 들어왔다.

9개월째 개성식당에서 일한다는 50대 주부는 "인천 신흥동에서 왔는데, 한달에 3박4일만 집에 간다"며 "(연평도는 현재) 빈 방도 없을 정도로 경기가 좋다"고 말했다. 민박집 몇 곳을 더 방문했지만, 방 입구에 인부들의 작업화가 가득할 정도로 빈 방 찾기가 어려웠다.

연평도 종합운동장 인근에 위치한 4호 연평대피소. 신축된 대피소 철재 문의 두께가 20cm를 넘는다.
 연평도 종합운동장 인근에 위치한 4호 연평대피소. 신축된 대피소 철재 문의 두께가 20cm를 넘는다.
ⓒ 한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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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정부는 서해5도 지원 사업비로 총1217억 원을 투입했다. 2010년과 2011년에만 주민대피시설 구축에 540억 원, 생활안정자금 107억 원, 주택복구에 116억 원, 안보 교육장 건립에 6억 원 등을 각각 지원했다.

올해에도 주민생활안정 사업 190억 원, 대피체계 강화 37억 원, 일자리와 소득창출 기반 구축 75억 원, 주거환경개선 44억 원, 관광개발과 국제평화거점 육성 사업 21억 원 등 모두 426억 원이 지원될 예정이다.

"지금도 포격사건 때를 생각하면..."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2년이 돼가고 있지만, 주민들에게 포격 사건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고생하는 이도 적지 않다.

고향 경기도 광주에서 시집와 30년 넘게 연평도에서 살고 있는 한 여성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며 "6.25를 겪은 노인들은 포격 당시 몸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북한을 더 못 믿지만, 남한 정치인 말도 못 믿겠다"며 "내 힘으로 잘 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후 자원봉사자들은 연평도 곳곳에 벽화를 그려 마을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연평도 면사무소 인근 한 골목길.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후 자원봉사자들은 연평도 곳곳에 벽화를 그려 마을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연평도 면사무소 인근 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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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포격 사건 당시 한달은 사우나에서 지냈고, 한달은 김포 양곡아파트에서 3~4가구가 한 집에서 지냈다"며 "당시 육지 사람들은, 연평도 사람들이 아파트 한 채씩 받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고 서운한 마음을 나타냈다.

그는 "그래도 연평도가 내 고향이 됐고, 내가 살아갈 곳이라 다시 찾았다"며 연평도에 대한 애증을 털어놓았다.

포격 사건 후 부모님이 사는 연평도로 다시 들어온 김아무개(31)씨는 "(한국 군인이 훈련으로) 포 쏜다고 방송하면 어른들은 불안해 한다"며 "군인도 훈련을 해야 하지만, 주민들 불안감을 줄이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김아무개씨도 "어제(2일)도 사격훈련을 했는데, 나는 훈련을 알리는 방송을 못 들은 상태였다"며 "순간 긴장했다. 나도 병이 드는 것 같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어 "포격 사건 당시 막내는 유치원 다니고, 큰 아이는 초등학교 다녔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불안감이 더 크다"며 "당시 사건 이후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진단해보지 못해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여러 형태로 지원을 해도 연평도 주민들은 "지원이 턱 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주민 일부는 "포격 사건 후 정부에서 각종 공사를 하지만, 주민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정주비로 월 5만 원 주는 게 전부다"며 "지금은 각종 공사 때문에 숙박과 음식 장사가 잘 되지만, 이들이 빠져나가면 생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내항 선착장에서 바라본, 연평도 시내.
 연평도 내항 선착장에서 바라본, 연평도 시내.
ⓒ 한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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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연평도 선착장에서 만난 60대의 한 선주는 "이 선착장 지은 지 몇십 년 됐는데, 개·보수가 안 됐다"며 "연평도를 위해서는 선착장을 개·보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섬 출신이지만, 연평도는..."

이달 24일 개관 예정인 연평도 안보교육장 건립 신축공사를 위해 한 달 전에 들어왔다는 공사 관계자는 "한 달째 살고 있는데, 주민들이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큰 것 같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포격 사건 이후 연평도민들의 경계심은 커진 듯하다. 특히 물밀 듯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기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라는 한 식당 주인은 "뜨내기 기자들이 지겹다. 묻지도 말라. 기자 수십 명이 와서 매번 비슷한 것만 물어보고 갔다"며 "물어봐도 난 말하기 싫다. 다른 기자들은 포격 맞은 집에서 사진 찍고 갔으니, 거기나 가서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40대로 보이는 한 주부도 "좋은 것만 쓰지 말고, 연평도 주민의 어려움도 제대로 보도하라"고 말했다.

연평도 선착장에서 어묵 장사를 하는 50대 여성도 "연평도 사고 난 뒤 기자, 군인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더니 언제부턴가 잊혔다"며 "조만간 2주년이라고 또 기자들이 많이 들오겠지, 기자들 들어와서 연평도에 좋은 것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군부대 공사를 위해 두 달째 머물고 있는 한 일용직 노동자는 "나도 섬 출신이지만, (포격 사건 탓인지) 이곳 주민들의 경계심은 꽤 큰 것 같다"며 "다시 기자들이 조금씩 들어오는데, 취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한만송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이 기사는 부평신문(http://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연평도, #NLL, #트라우마, #연평도 포격, #접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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