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을 뜨겁게 달군 영화가 있다. 이병헌의 놀라운 연기력과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한국 영화제 역사상 유래가 없는 15관왕을 휩쓸어버린 <왕이 된 남자, 광해>이다. 물론 이 15관왕을 두고 논란은 많지만 <광해>의 흥행성과 작품성은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처음에 주위의 반응이 '이병헌이 좋다' 파와 '이병헌밖에 안 나온다' 파로 나뉘어서 볼까 안 볼까를 망설이다가 결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영화는 굉장히 재밌었고, 재밌는 와중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폭군으로 알고 있는 광해군의 사라진 15일에 대한 기록을 다룬 영화이다. 극중 광해군(이병헌)은 항상 반대파에게 생명을 위협을 느낀다. 위협을 피하고 여상궁과 잠자리를 가지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 노릇을 할, 자기와 얼굴을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 결국 양반들 앞에서 왕을 풍자하던 광대(이병헌)가 궁에 들어와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고, 그가 점점 오히려 광해군보다 더 좋은 왕 역할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조선시대판 부자과세법, 대동법

광대 이병헌이 처음에는 계속 허균이 시키는 대로 "대신들의 뜻대로 하겠소"를 반복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폐지해버린 법이 이 영화에 하나 등장한다. 바로 대동법인데, 대동법은 공납제로 인한 많은 폐단을 없애고자 모든 세금을 쌀로서 걷는 법이다.

영화에서 대동법이 대신들에게 끊임없이 반대를 받는다. 광대 이병헌이 허균에게 "이 좋은 법을 왜 반대하고 없애려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허균은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얻기 위해 대동법을 포기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법인 것을 허균도 알고 있으나, 정치적으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해 대동법을 포기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음 날 광대 이병헌은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당장 실시하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동법과 대동법이 사라지는 과정이 우리의 현대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동법을 현대사회에 대입시키면 일종의 부자과세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이 자신들은 땅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땅이 많은 지주와 양반들만큼 세금을 많이 내 노예로 팔리고,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보고 땅을 많이 가진 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땅이 적은 자는 세금을 적게 내라는 것이 대동법이 주된 내용이다.

이것은 현대사회에 부동산과 금융 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내는 종부세나, 금융과세법과 일맥상통한 법이다. 대동법이 이러한 법들과 비슷한 것은 내용뿐만이 아니다. 종부세나 금융과세법, 대동법은 모두 서민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시행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 법을 반대하고 결국 폐지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과거나 현재나 법은 사회의 기득권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집단이 만들어내고 만약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이나 제도를 이야기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한다.

또한 이 법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든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그것에 의해 생사가 갈리는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이것을 정치적 도구로서 이용하면서, "어쩔 수 없다" 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자칭 진보정치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왜 백성을 위한 서민을 위한 법은 항상 이렇게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폐지되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가지게 한 지점이었다.

극단적 사대주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광대 이병헌이 왕위에서 내려오기 전날 대신들이 왕에게 보고를 올린다. 명나라와 금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2만 병사를 보내고 명나라 왕족에게 엄청난 양의 사치품을 보내라 했다고 이야기하자, 광대 이병헌이 "부끄러운 줄 아시오.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기에 2만의 우리의 백성을 사지로 몰아야 하는 것이오. 나는 사대의 명분 따위보다 나의 2만의 백성들이 훨씬더 소중하오"라고 이야기한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교리로서 명나라를 사대의 국가로서 조공을 바치고 예를 항상 지켜온다. 심지어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명의 전쟁임에도 우리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몬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대신관료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대라는 명분의 이야기를 하며 왕에게 소리친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명나라와 미국 서방세계의 차이일 뿐이지 국민의 의견, 파병 가는 군인들의 이야기는 없이 단순히 미국과 우방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이 사지로 내몰리지 않았던가? 베트남의 정글에, 중동의 사막에 우리의 백성들이 목적도 모르는 전쟁을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현실이 있는데도 광대 이병헌처럼 최고의 정치지도자가 백성을 위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발언에 더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권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다가가는 권력자

이 영화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을 느낀 부분은 광대 이병헌이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엄숙함과 엄격함을 던져버리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신하들을 대하는 부분이었다. 왕에게 칼을 들이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비롭게 용서하며 웃는 왕, 한낱 수랏간 시녀 아이의 사연을 물어보고 그것을 해결하겠노라 약속을 하는 왕, 권력을 위한 결혼이었음에도 중전에게 이벤트를 하고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왕.

조선시대에 왕은 지금은 대통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사람들 다 죽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광대 이병헌은 그러한 권력을 다 던져버리고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하들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대한다. 너무나도 많은 것에 억압되고 명령받으며 기계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저러한 인간미과 따뜻함은 너무나도 그리운 것이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마 우리 사회의 왕과 같은 존재는 대통령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은 자본을 많이 가진 존재, 좁게는 회장들, 넓게는 알바하는 가게의 사장님, 학교의 이사장,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왕과 같은 존재들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과연 광대 이병헌과 같은 인간다움과 따뜻함을 우리에게 준 적이 있는가?

만약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저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돈에 관한 것일 것이다. 돈은 인간적일 수 없고 따듯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돈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알바 사장님과 시급과 월급 주휴수당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아버지와 자식처럼 따뜻하게 지낼 수 없을까?

돈의 문제에서 벗어나려 하면 오히려 돈의 문제는 더 잘 해결 될 수 있지 않을까? 알바 사장님이 나를 자식처럼 생각하면 내 시급이 3800원보다는 더 나오지 않을까? 광대 이병헌을 바라보면서 돈에서, 자본에서 벗어난 인간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상도 한번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요즘 한국에 너무나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송전탑에 올라가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송전탑을 막기 위해 싸우시는 밀양 청도의 할머님들, 핵발전소를 막기 위해 싸우는 삼척의 주민들,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학습지 노동자들. 이러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싸워가는 지도자가 세상에 나타나길. <광해>는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 모두가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나아갈 희망을 제시해주는 그런 좋은 영화 인 것같다.

광해 비정규직 학습지노동자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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