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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평왕릉
 진평왕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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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터를 떠나 보문호 쪽으로 나아간다. 알천을 왼편에 끼고 이어지는, 화사한 봄이면 '경주 세계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벚꽃길을 따라 걷는다. 길 중간쯤에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길은 보문호를 우측에 두고 무장사터까지 굽이굽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비담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았던 명활산성 아래를 지나 불국사나 감은사터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은 진평왕릉, 설총 묘, 보문사 터부터 답사해야 하므로 지금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신라 사람들은 보문사 드나드는 길에 왼쪽으로 설총 묘, 오른쪽으로 진평왕릉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길은 두 무덤 사이를 지나간다. 하지만 집들이 들어서면서 설총은 마을 한복판을 안방처럼 차지하고 누워계신다.

설총은 이두를 집대성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문학인 <화왕계>를 지은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원효가 파계하여 요석공주와 낳은 아들이다. 설총은 아버지가 한때 기거했던 골굴암에 머물러 살기도 했고, 원효가 죽자 상(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그래서 지금도 분황사에는 원효대사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특이한 보물 세 점을 거느린 보문사 터


 보문사 터의 연꽃 무늬 당간지주
 보문사 터의 연꽃 무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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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터는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지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왼쪽에 설총 묘를 두고 논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이내 보문사 터에 닿는다. 지금은 평야가 되어버려 사찰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절터는 한때의 영화를 당당히 증언한다.

보문사터는 보물 64호 석조, 보물 123호 당간지주, 보물 910호 당간지주를 거느리고 있다. 910호 보물은 연꽃 무늬가 새겨진 특이한 당간지주로 이름이 높고, 123호 보물은 구멍이 한쪽만 나 있는 특이점을 보여준다. 64호 보물인 석조는 통일신라의 대표적 석조 작품으로 평가받는 수작이다.

이 셋은 모두 들판 가운데에 있어 도로변에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판을 휘저으며 굽이치는 좁은 농로도 나그네의 발길을 어렵게 한다. 만약 자동차를 몰고다닌다면 마주오는 경운기라도 만나면 어쩌나 불안감에 떨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버려진 듯 남아 있는 보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그 모든 것들을 덮어주고도 남는다.

무장사터, 경주 여행의 마지막 여정


 설총 묘
 설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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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 설총묘, 보문사터를 둘러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무장사 터가 남는다. 발을 내딛기 전에<삼국유사>에 전하는 무장사 관련 기록을 읽어본다. 역사유적 답사는 언제나 '공부'를 요구한다.

무장사는 경주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있다. 제38대 임금 원성왕(785∼798)의 아버지 김효양이 숙부를 추모하여 세웠다. 


절에는 늙은 스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바라보며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과 생각을 마음 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무장사 터 일대는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터를 닦으니 평탄한 땅이 생겨나 확실히 집을 세울 만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신령스러운 터라고 놀라면서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절 위쪽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옛집이 있다. 불상을 만들어서 모신 사람은 소성왕(798∼800)의 비 계화왕후이다. 왕후는 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근심에 차고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줄곧 슬퍼하다가 이윽고 왕의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그녀는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화려한 옷이며 재물을 다 꺼내어 불사를 펼쳤다. 그러나 근래 들어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문무왕 "어진 사람이 오래 사는 세상이 왔다"


 무장사 탑
 무장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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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또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의 절[寺]을) 무장사라 불렀다'는 기록도 나온다. 물론 글 속의 태종은 김춘추가 아니라 그의 아들 문무왕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백제 멸망(660년) 직후 사망하였고(661년), 고구려가 멸망한 때(668년)는 문무왕 8년이다.

문무왕은 전쟁 도구를 땅에 묻음으로써 이제 평화가 왔음을 선언하였다. 그러한 문무왕의 마음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그의 유서에도 나타난다. 문무왕은 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경지로 백성들을 이끌었다'고 자부한다. 긴 전쟁을 겪은 왕은 칼을 잘 휘두르는 장군보다도 마음이 선량한 백성이 탈 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진심으로 꿈꿔왔던 것이다. 이제 투구와 병기를 땅에 묻으면서 문무왕은 얼마나 흐뭇하였을까.

무장사터에 가면 보물 126호인 삼층석탑만 하나 남아 있다. 삼국유사는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절도 없다. 남편의 명목을 빌며 계화부인이 세운 아미타 불상 사적비도 없어졌다, 다만 사적비는 빗돌은 비록 없어졌지만 그 이수와 귀부만은 세월을 견디고 남아 보물 125호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무장사 가는 길
 무장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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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사 가는 길, 과연 좋지 못한 길인가

경주박물관에서 출발하여 보문사 터까지 '걸어서 경주 한 바퀴'를 실천하였다면, 이제 무장사터로 발길을 돌려보라. 보문호수 왼쪽을 돌아 관광단지 중간쯤까지 갔을 때, 삼거리가 나오면서 무장사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고개를 넘고, 고선사를 물에 가두어버린 덕동호도 지나, 도로변 곳곳을 벽화가 장식하고 있는 왕산마을도 통과하면, 드디어 본격적으로 계곡이 시작된다. 삼국유사가 '절로 들어가는 골짜기는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고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는 계곡이다.

그러나 지금은 곱게 길이 나 있어 무장사터까지 거리낌없이 갈 수 있다. 차량 출입을 철저히 막아주므로 바람과 돌과 흙과 물만이 나그네의 벗이다. 너무 맑아 찬 느낌마저 주는 산공기를 얼굴에 쐬면서 무장사 터를 향해 걸어가는 여유는 현대 도시인이 좀처럼 맛볼 수 없는 호사가 아닐까 싶다. 

3층 석탑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장사터에 서면 계곡 가득 차오르는 골바람이 시원하다.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푸른 빛이 감도는 양 서늘하다. 새들도 창공을 휘감아 돈다. 마음속의 무거운 것들을 모두 묻어버리고 지금부터는 밝고 힘차게 나아가라고, 바람과 물과 새들이 합창을 하는 듯하다.

문무왕, 투구를 묻으며 평화를 염원

 경주 동남산 통일전의 문무왕 초상
 경주 동남산 통일전의 문무왕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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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이 투구를 묻으며 영원한 평화와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무장사, 경주 역사여행의 마지막 장소답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문무왕이 땅 속 깊숙이 파묻었던 병기와 투구는 1천 수백년도 더 지난 오늘에 살아나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오명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현대사는 문무왕의 유언을 한낱 휴지조각으로 되돌리고 말았다.

새로운 통일을 가꾸어야 하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본래는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도 급하게 흘러 모두들에게 좋지 못한 땅으로 치부되었던 무장사터를 신라인들이 끝내 신령스러운 집터로 만들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전쟁과 대립의 살기가 감도는 한반도를 평화와 풍요의 낙원으로 탈바꿈시켜 할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도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를 맞아 통일을 완수한 후 땅에 총을 묻어버리자."

걸어서 경주 시내 한 바퀴


연재 졸고 '경주 여행'은 지난 27회부터 지금까지 경주 시내를 한 바퀴 걸어서 돌았습니다. 여정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최근 완공된 월정교를 추가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이 순서대로 답사를 하면 여정이 효율적일 것입니다.

 무장사 터의 보물 125호 귀부 (일부)
 무장사 터의 보물 125호 귀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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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 경주박물관
- 국보 29호 에밀레종, 국보 38호 고선사터 석탑, 이차돈 순교비 등
(2) 반월성 해자 남천 - 물길 건너 반월성 바라보기
(3) 월정교 - 원효대사가 일부러 물에 빠진 곳, 설총 탄생 설화
* 연재 중에 월정교가 완공되었습니다. 박물관에서 남천을 따라 내려오면 반월성 끝 부분에 월정교가 있습니다. 월정교를 구경한 후 돌아나와 남쪽을 바라보면 도로변에 천관사터로 가는 작은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4) 천관사 터 - 김유신의 첫사랑 천관의 집터
(5) 오릉, 알영정 - 박혁거세와 알영 등의 무덤, 알영 탄생지
(6) 흥륜사 -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 이차돈 유적
(7) 김유신 집터, 재매정 - 신라 때 김유신 가문의 우물
(8) 내물왕릉 - 신라의 국가 체계를 확립한 임금
(9) 계림 -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지
(10) 첨성대 - 국보 31호
(11) 반월성 내부 - 경주의 궁궐,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자, 조선 시대 석빙고
(12) 안압지 - 왕의 연못을 걸어서 한 바퀴 도는 즐거움
(13) 대릉원 - 최초의 김씨 임금 미추왕릉, 무덤 안을 공개하는 천마총, 가장 큰 무덤 황남대총
(14) 봉황대 - 신라 멸망의 풍수지리설이 깃들어 있는 단독 최대 무덤
(15) 분황사 - 우리니라 최초의 모전석탑 국보 30호, 당나라 경계의 전설이 깃든 신라 우물 삼룡변어정
(16) 황룡사 터 - 동양 최대의 절터, 아사달의 전설을 되새기게 해주는 아사달 비, 장륙상 터
(17) 진평왕릉 - 선덕여왕의 아버지, 박혁거세 다음으로 장기간 재위
(18) 전 설총 묘 - 원효의 아들, 이두 집대성,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제문학 <화왕계> 남김
(19) 보문사 터 - 특이한 보물 당간지주 2점, 신라 석조 중 가장 뛰어난 보물 석조
(20) 무장사 터 - 문무왕의 통일과 평화 의지 유적, 보물 석탑, 귀부,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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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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