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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의 황남대총. 이 무덤이 얼마나 큰지 알고 싶으면 (사진에서) 그 옆을 지나가는 관광객들과 견줘보면 된다.
 대릉원의 황남대총. 이 무덤이 얼마나 큰지 알고 싶으면 (사진에서) 그 옆을 지나가는 관광객들과 견줘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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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가 외지인들에게 주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어마어마한 무덤들이 도심 곳곳에 널려 있는 모습이다. 산도 아닌 평지에 왕릉들이 산재해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여기가 경주로구나!' 하는 실감이 펑펑 솟아난다. 경주의 특징적 빛깔은 역시 평지 가득 널린 거대한 왕릉들의 위용이다.

왕릉들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곳이 바로 대릉원이다. 이름 그대로 큰[大] 왕릉(陵)들이 모여 12만 평의 공원(園)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대릉원에는 모두 23기의 무덤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세 무덤을 꼽으라면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을 들 수 있겠다.

 봉분만 있는 여느 왕릉과는 달리 미추왕릉은 최초의 김씨 임금답게 묘역이 화려하다.
 봉분만 있는 여느 왕릉과는 달리 미추왕릉은 최초의 김씨 임금답게 묘역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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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김씨 임금 미추왕릉, 큰 대우 받고 있다

미추왕릉은 여러 모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다르다. 우선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되었다. 또 무덤 둘레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묘역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세워져 있으며, 무덤 앞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숭혜전도 건립되어 있다. 미추왕이 그토록 사후에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그가 김씨 최초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큰 무덤들이 모여 공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대릉원이라 부른다고 했다. 하지만 옳은 해석은 아니다. 대릉은 신라 때에도 이미 쓰였던 명칭이다. 삼국사기에 13대 임금 미추왕이 죽자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미추왕릉의 앞과 뒤는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 왕릉의 뒤쪽은 이서국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된 미추왕이 죽엽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전설의 증거처럼 보인다.
 미추왕릉의 앞과 뒤는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 왕릉의 뒤쪽은 이서국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된 미추왕이 죽엽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전설의 증거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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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은 262년부터 283년까지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런데 죽은 미추왕이 297년에 경주에 나타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서국(경북 청도)이 금성(경주)을 공격해왔다. 신라군이 이기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무수한 병사들이 나타나 적들을 물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죽엽군(竹葉軍)들도 문득 없어졌다. 그런데 미추왕릉 앞에 수만 개의 댓잎이 쌓여 있었다. 백성들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적을 물리치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추왕릉에는 죽현릉(竹現陵), 죽장릉(竹長陵)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미추왕릉에 가서는 무덤의 앞면만 보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닫혀 있는 문에 막혀 철책 너머로 왕릉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지만, 미추왕릉 답사의 꽃은 무덤 뒤편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만 피어난다. 실제로 미추왕릉은 무덤 뒤편에 울창한 대나무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대숲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왕릉 쪽으로 다가가면 눈앞에 죽엽군들이 힘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천마총, 무덤 안을 보여주는 흥미만점 답사지

미추왕릉 뒤 대숲에서 황남대총의 서쪽 옆구리를 스쳐 천마총으로 간다. 하늘[天]을 날아오르는 말[馬] 그림이 출토된 무덤[塚]이라고 해서 천마총(天馬塚)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천마총은 들어가서 보는 무덤이다. '들어간다'는 것은 무덤 안이 공개되어 있다는 뜻이다. 높이와 길이는 12.7m와 47m로 황남대총의 절반 이하이지만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인기는 최고다.

 천마총 내부. 천마총은 이렇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 인기를 끈다.
 천마총 내부. 천마총은 이렇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 인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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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은 대릉원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남녀 한 쌍의 묘소를 낙타등처럼 연결시켜 조성한 이 무덤은 높이가 25m, 길이가 120m나 되는, 거의 산 수준의 규모이다. 대릉원에 들어섰으니 응당 황남대총을 한 바퀴 돌아야 할 것이다.

 노서리 서봉총에서 발굴된 금관. 현지 안내판의 게시물을 찍은 사진이라 왕관의 빛깔이 흐리다.
 노서리 서봉총에서 발굴된 금관. 현지 안내판의 게시물을 찍은 사진이라 왕관의 빛깔이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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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은 입장권 매표소가 한 곳이 아니다. 미추왕릉 쪽과 황남대총 쪽 두 곳에 있다. 첨성대에서 접근하여 미추왕릉 쪽으로 들어가서 황남대총 쪽의 북문으로 나오는 여정이 바람직하다.

문 밖 도로 건너편에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광개토태왕 호우' 등의 글자가 새겨진 호우(병 모양의 물잔)를 발굴한 호우총, 스웨덴[瑞田] 황태자가 '鳳'자가 새겨진 금관을 출토한 서봉총(瑞鳳塚), 그리고 봉황대가 있는 고분군이다.

왕건의 풍수지리 신봉을 전해주는 봉황대

높이 22m인 봉황대는, 황남대총처럼 표주박 모양으로 생긴 쌍분을 제외한, 단독 고분 중에서는 경주 최대의 무덤이다. 봉황대는 덩치도 무지무지하게 큰데다 고분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자라 있어 더 더욱 무덤처럼 여겨지지 않고 마냥 동산같이만 보이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봉황대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봉황대는 그 이야기 때문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려 태조 왕건. 자식들에게 '전라도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망이 많으니 등용하지 마라' 등의 '훈요십조'를 남긴 데서 짐작되듯이 왕건은 풍수지리설에 심취해 있었다. 

 봉황대
 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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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에게 신라가 빨리 망하도록 할 비법을 들었다. 도선을 경주 땅이 배 모양이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다. 왕건의 조종을 받은 풍수지리가들은 신라 조정에 '경주는 봉황 모양의 땅이다. 그런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 한다. 봉황이 날아가면 신라는 망한다. 봉황의 알을 만들어놓아 날아갈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신라 조정은 커다란 알을 만들어 경주 가운데에 놓았다. 무거운 흙덩어리를 실었으니 이제 배는 빨리 가라앉을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신라가 멸망한 뒤 봉황의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 봉황대는 점점 유명해졌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보이는 천마총 정면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보이는 천마총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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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정씨 가문의 성쇠 전설'
경주 봉황대의 전설은 왕건의 고려가 신라 멸망에 풍수지리설을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전설이 오랫동안 회자되어 온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풍수지리설을 신앙처럼 믿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봉황대처럼 한 국가를 쇠망하게 한 내용은 아니지만, 한 가문의 성쇠가 풍수지리설에 따른 결과라는 이야기가 경북 의성군 홈페이지에 전한다. 내용을 현대문으로 바꾸면서 요약해 소개해보면 아래와 같다.
 
옛날 의성에는 장정구박(藏丁具朴)이라 하여 네 성씨를 손꼽았다. 그런데 정씨는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그렇게 정씨의 세가 약해진 것은 천문지리에 밝은 어떤 현령 때문이라고 한다.

 경북 의성읍 군립도서관 바로옆에 있는 정(丁)씨 가문의 재실 영모재. 하얀 철책이 군립도서관의 담장이다.
 경북 의성읍 군립도서관 바로옆에 있는 정(丁)씨 가문의 재실 영모재. 하얀 철책이 군립도서관의 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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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현령은 정씨 가문에 자신만큼 천문지리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령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힘이 약해진다고 생각, '정씨 문중을 내려앉혀야겠다'고 작심한다. 의성읍의 땅이 구봉산 아래 남대천과, 상리리 쪽 아사천이 90도로 만나면서 정자(丁字) 모양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한 현령은 정씨 문중의 그 덕분이라고 판단한다.

현령은 아사천 서편에 커다란 못을 파고 물을 채웠다. 의성읍의 땅을 정(丁)자 모양에서 하(下)자 모양으로 바꾼 것이다. 그 이후, 의성 읍내의 정씨들은 차차 약해졌다.

그 후 못은 식민지 때 메워졌고, 이윽고 해방이 되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사람 수가 적은 정씨 가문에서 당선자가 나왔다. 1, 2, 3대 민선군수도 정씨가 뽑혔다. 사람들 중에는, 현령이 판 못을 메우고 난 뒤부터 정씨 문중에 운이 돌아왔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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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