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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물왕릉
 내물왕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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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을 따라 동쪽으로 걸으면 반월성 끄트머리에 닿는다. 원효가 일부러 빠져 옷을 흠뻑 적셨던 월정교 자리다. 2012년 11월에 막 복원 공사를 마친 월정교 옆에 서서, 일부러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원효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경주향교 앞을 지나면 바로 내물왕릉이 나타난다.

신라 17대 임금 내물왕은 356년부터 402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신라 천년 역사에서 개국 시조 박혁거세왕(61년 재위, 기원전 57~기원후 5)과 26대 진평왕(53년 재위, 579∼632)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랜 세월을 왕좌에 앉아 보낸 임금이 바로 내물왕이다. 물론 혁거세왕이 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고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역사학자들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물왕은 진평왕에 이어 신라 두 번째 장기 집권자였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는 어떤 임금이 오래 왕위에 있었을까? 백제는 2대 다루왕(49년 재위, 28∼77), 3대 기루왕(51년 재위, 77∼128), 5대 초고왕(48년 재위, 166∼214), 8대 고이왕(재위 52년, 234∼286)을 들 수 있다. 고구려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장수왕이 있다. 왕명이 '길 장(長)'에 '목숨 수(壽)'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에 이어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은 492년까지 79년이나 왕위에 있었고, 98세에 사망했다. 장수왕의 다음 왕 문자왕은 그의 손자이다. 장수왕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장수왕보다 더 오래 왕위에 있었던 임금도 있다. 6대 태조왕이다. 53년부터 146년까지 무려 93년이나 임금 자리에 있었다. 그는 101세에 동생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119세에 죽었다. 형이 그렇게 늦게 왕좌에서 내려왔으니 그의 동생이 임금 자리에 오른 때의 나이가 무려 76세나 되었다는 사실이야 신기할 것도 없다.

김씨 임금들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계림
 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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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왕릉 앞은 한때 신라의 국명(國名)이기도 했던 계림(鷄林)이다. 옛 역사서에 나오는 계림 이야기는 앞에서 탈해왕릉을 답사할 때 이미 읽어 보았으므로 지금은 간략히 줄여서 줄거리만 살펴본다.(관련기사 : <'하늘이 내게준 아들'은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탈해왕 9년(65) 봄 3월 밤, 왕이 금성(반월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숲에는 금빛의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난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탈해왕은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다!" 하면서 기뻐했다. 그 후 시림은 닭[鷄]이 운 숲[林]이라 하여 계림으로 바뀌었고, 아이에게는 금(金)빛 상자에서 나온 '아이'라고 해서 김(金)알지(閼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아이'의 경주 지방 방언인 '아지' 또는 '알지'를 이름으로 삼은 김알지는 13대 임금 미추왕(262년 즉위) 이후 신라의 임금 자리 대부분을 차지하는 김씨의 시조가 된다.

계림의 숲은 신성시되었다. 따라서 벌채되는 일 없이 줄기차게 자랐다. 모두 아름드리 고목이 되었고, 숲 속을 거닐면 저절로 천년 전 아득한 신라 시대를 노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적 18호인 계림 경내에는 이곳에 서려 있는 김알지 탄생 설화가 기록된 비가 비각과 담장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 1803년(조선 순조 3)에 세워진 비로, 계림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거의 남천과 첨성대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비각 옆에 서면 들판 사이로 첨성대가 사람을 부른다.

신라인이 공들여 찾던 이곳... 정몽주 선생이 머쓱하겠네

 첨성대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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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딱 한 문장, "선덕왕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밖에 없다. 세종 실록에는 633년(선덕여왕 2)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첨성대는 건립 시기만 확인될 뿐 나머지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신비'의 국보다. 탈해왕의 16세손 석오원이 첨성대를 건축했다는 <석씨계보(昔氏系譜)>의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책이 '석씨계보'인 만큼 오히려 신뢰성이 약하다 하겠다.

국보 31호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에 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다듬어 27층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쌓아올려 만든 첨성대는 맨 위층을 가운데가 뚫린 정사각형 돌로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물론 안내판의 설명이다. 안내판은 또 자신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라고 자랑한다.

첨성대의 13단과 14단 사이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곳은 사다리를 걸쳐서 내부로 드나드는 출입구였다. 높이 9.4m, 밑면의 지름 5.17m인 첨성대, 사람들 중 반 이상이 입장료 500원이 아까워서인지, 아니면 전에 보았다는 것인지 철책 밖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스쳐지나간다.

만약 이 광경을 본다면 포은 정몽주 선생은 문득 머쓱할 것이다.

월성에 첨성대 우뚝 서 있고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네
문물은 신라와 함께 사라졌지만
슬프다 산과 물은 예전 그대로로다

포은은 이렇게 노래했다. 하지만 별[星]을 바라보기[瞻] 위해 첨성대를 만들어 놓고 여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신라인들이 공들여 찾았던 이곳을 현대인들은 어찌 이토록 홀대한단 말인가.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산과 물은 신라인들이 함께 부둥켜 안고 살았던 그 산천이 아니니, 과연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반월성 안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 답사 재미가 '짭짤'

 반월성 내부의 가을 풍경
 반월성 내부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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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질러 반월성 안으로 들어선다. 101년(파사왕 2)에 쌓았던 왕궁이다. 그동안 신라 임금들은 혁거세왕이 창림사 터에 쌓은 엉성한 궁궐에서 살았다. 이제 나라 형편이 많이 좋아졌던 것이다.

본래 이름은 월성이었다. 성(城)의 땅이 달[月]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月城)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처럼 반월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그렇게 이름이 바뀐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이 성이 크게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짐작된다. 관심도 없고 쓰임새도 없다면 굳이 이름을 바꿀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과연 반월성 안에는 조선시대가 남긴 유적이 있다. 성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석빙고다. 철창 안으로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도록 해두었기 때문에 답사의 즐거움이 짭짤하다. 특히 밤에 반월성을 찾아 숲길을 따라 호젓한 산책을 즐기다가 문득 황금빛을 뿜어내는 석빙고를 발견, 달려가 내부를 들여다보라. 역사의 시간을 완벽하게 오가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다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 때에도 석빙고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지금 신라의 것이 아닌 조선의 것을 보는 데 그치는 아쉬움 또한 간단하지 않을 따름이다.

 밤에 본 반월성 석빙고의 내부
 밤에 본 반월성 석빙고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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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답사는 연못 한 바퀴 일주가 핵심

반월성을 걸어나오면 도로 바로 건너편에 안압지가 기다리고 있다. 첨성대가 바라보이는 북쪽의 언덕 같은 길과, 남천 해자를 내려다보며 걷는 남쪽 오솔길을 한 바퀴 휙 도는 것이 반월성 답사의 핵심이듯이, 안압지 또한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곱게 닦여져 있는 산책로를 따라 일주해야 한다.

안압지는 674년(문무왕 14)에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왕 14년 2월에 대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676년 이후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 기록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에는 문무왕도 심신의 평화를 몹시 갈구하고 있었던 듯하다.

 안압지 야경
 안압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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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雁鴨池)는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노니는 연못[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본래 이름은 월지(月池)였다고 한다. 1990년 발굴 때 연못 속에서 '月池'가 새겨진 기와가 발굴되었다. 월지라면 '달빛이 곱게 비치는 연못' 정도의 뜻이겠는데, 바로 옆에 있는 궁도 월성(月城)이었으므로 문무왕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으리라 여겨진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출토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우리나라는 나무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안압지 발굴 때 재미있는 목조 제품이 발굴되었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이것의 모조품을 판매하고 있다. 주사위다. 높이 4.8cm에 14면으로 된 이 주사위에는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술 석 잔 한꺼번에 마시기' 등이 새겨져 있다. 놀이기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이 주사위에 좀더 좋은 내용을 새겨넣어 국민 놀이기구로 확산시키면 좋지 않을까. 만나기만 하면 '고스톱'을 하는 어른들 앞에서 우리나라 아이들이 메말라가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 유물들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 유물들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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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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