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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자의 면목을 보여주는 반월성 남쪽. 이 개천에 원효는 일부러 빠졌고,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에 들어갔다.
 해자의 면목을 보여주는 반월성 남쪽. 이 개천에 원효는 일부러 빠졌고,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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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정문에서 남천을 따라 서쪽으로 걷는다. 안압지 가는 길 반대편이다. 이 길을 걸어보는 나그네는 그리 많지 않은데, 중요한 것을 놓치는 잘못된 답사다.

성(城)은 본래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흔히 산이나 높은 언덕 아래를 흐르는 물줄기를 천혜의 방어선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 반월성도 바로 그런 해자(垓字)의 원리에 따라 축성되었다. 그러니 반월성은 남천 너머에서 바라보아야 제격이다.

반월성 안을 걸어서는 성을 볼 수 없다. 그렇게 걸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성내'에 지나지 않는다. 성곽을 보지 않고 성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경주박물관에서 남천 물길을 따라 걸으며 천혜의 해자를 보고, 물길 너머 반월성을 보아야 한다.

월정교 2008년 5월부터 2011년 2월까지 34개월에 걸쳐 235억원을 들여 복원 사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던 월정교가 (무슨 사정으로 늦어졌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2012년 11월 19일 현재 개통을 눈앞에 두고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광경
▲ 월정교 2008년 5월부터 2011년 2월까지 34개월에 걸쳐 235억원을 들여 복원 사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던 월정교가 (무슨 사정으로 늦어졌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2012년 11월 19일 현재 개통을 눈앞에 두고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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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궁궐은 혁거세왕이 창림사터에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의 수준에 불과했다. 5대 파사왕 22년(101) 봄 2월에 이르러 비로소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하고, 가을 7월에 왕이 그리로 옮겨 거처'했다. 월성은 성터가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조선 시대 이후 반월성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 길을 걸으면 원효의 얼굴도 보게 된다. 반월성 아래 남천은 설총의 아버지 원효대사가 일부러 몸을 던져 옷을 흠뻑 적셨던 월정교가 놓였던 곳이다. 원효의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수행 관원은 그를 요석공주의 궁으로 안내했고, 이윽고 설총이 태어났다.

파사왕은 남천을 해자로 이용하면 적군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성을 쌓았지만, 정작 남천의 해자에 빠져 역사 속에 긴 이야기를 남긴 이는 적군들이 아니라 '민중 속의 불교'를 연 원효대사였으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천관사 터가 발굴을 앞두고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관사 터가 발굴을 앞두고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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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천관의 집터에는 찬바람만 불고

월정교 건너편 도로변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서 있다. 팻말은 도당산 쪽으로 들어가면 천관사터에 닿는다고 안내한다. 관청에서 세운 게 아니라 민간에서 꽂아둔 것이다.

천관이 살았던 집을 개조하여 천관사로 창건한 사람은 김유신이다. 660년,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천관사는 고려 중엽까지도 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남산의 북쪽 끝자락인 도당산 기슭에는 김유신과 천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는 듯한 바람과 풀잎만이 스산하게 흩날릴 뿐이다. 경주시 교동 244번지 일대인 천관사터는 사적 3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유신은 천관을 사랑했다. 하지만 만명부인에게 호된 질타를 듣고,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않겠노라고 맹세한다. 얼마 뒤 몹시 술에 취한 날, 집으로 돌아오던 유신을 말은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간다. 화들짝 놀란 유신은 말의 목을 벤다. 정신을 잃은 주인을 아무데로나 데려가는 말이라면 전쟁터에서 어찌 믿고 탈 수 있겠느냐.

 김유신 집터에서 바라보는 천관사터 쪽의 풍경
 김유신 집터에서 바라보는 천관사터 쪽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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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만명부인의 엄혹한 감시 때문에 김유신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간다. 여승이 된 그녀는 유신의 성공과 안녕을 기원하다가 죽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비록 마음을 천관에게 다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원원사 등을 창건한 김유신이었으니 그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사랑을 잃고 떠난 천관에게 평생에 걸쳐 미안함을 가졌던 그는 천관의 빈 집을 사찰로 바꾼 다음, 내내 빌었을 것이다. '천관은 독실한 보살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해로운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 저 세상에서는 반드시 좋을 곳에 갔을 거야.'

기록에는 천관이 술집 여인으로 나오지만, 집의 위치로 보아서는 그렇지 않은 듯 여겨진다. 바로 남쪽에 나라 최초의 궁궐, 박혁거세 탄생지, 6촌 시조들을 모시는 양산재가 있고, 바로 북쪽에 반월성과 오릉 그리고 내물왕릉이 코앞에 있는데, 이곳에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 시끄러운 술집이 과연 있었을까. 게다가 천관(天官)의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하늘天'에 '관리官'이니, 술집 주인이 아니라 기후와 천재지변의 변화를 미리 알아내고, 사람과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종교인'이 아니었을까.     

 숭덕전. 박혁거세 재실이다.
 숭덕전. 박혁거세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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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개국 임금이 남긴 첫 왕릉

천관사터에서 골목을 따라 남서쪽으로 걸으면 꽃마을 한방병원이 나온다. 병원 건물을 등지고 서니 커다란 고건물이 도로 건너편 인도에 바짝 몸을 붙인 채 버티고 있다. 안내판은 이곳이 경주시 탑동 77번지의 숭덕전이며, 경북도 문화재자료 254호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숭덕전(崇德殿)은 박혁거세왕을 제사지내기 위해 1429년(세종 11)에 지어진 건물이다. 본래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고, 그 후 1601년(선조 34)과 1618년(광해군 10)에 새로 지었으며, 1704년(숙종 30)에 고쳤다. 현재의 모습은 1735년(영조 11)에 재차 고친 결과이다.

그러나 웅장한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아무나,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아니다. 굳게 닫혔던 문은 혁거세왕을 제향하기 위한 행사가 펼쳐질 때나 찌르릉 소리를 내며 열릴 뿐이다. 나그네는 담장을 타고 돌아 남문으로 가서 입장권을 산 다음 들어가야 한다.

 오릉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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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전 안의 오릉은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을 한 자리에 모신 곳이다. 이들은 모두 박씨 왕들이다.

하지만 이름 높은 오릉을 보고도 대단한 감흥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세계사에도 유래가 없는 천년 역사의 왕국을 연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의 묘소에 왔는데도 그저 마음이 무덤덤하다면 역사여행을 다니는 답사자로서 자격 미달이 아닌가, 스스로 자책을 한다. 이런 현상은 경주라는 곳이 워낙에 대단한 고분들을 한꺼번에 많이 거느린 고장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오릉 옆 대숲 속에는 알영정이 숨어 있고

솔숲이 끝나면 알영정(閼英井)이 숨어 있는 대숲이 이어진다. 이곳은 혁거세왕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곳이다. 이름에 정(井)이 들었으니 우물이 있어야겠지만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 비석과 그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뿐이다. 그러나 대나무를 비롯한 고목들로 동그랗게 에워싸인 탓인지 비각은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가득하다.

 오릉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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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영은 본래 왕비의 이름이 아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있던 우물의 이름이다. 그런데 박혁거세가 태어난 바로 그때에 이 알영(閼英)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 용은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물을 길러갔던 어떤 노파가 이 광경을 보았다. 노파는 알영정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여자아이에게 '알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후 곧장 월성 북쪽의 냇가로 데려갔다.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입술만은 닭의 부리를 닮았기에, 그곳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냇가를 알영의 입술에 붙은 닭부리 모양의 허물을 씻어서 없앤(撥) 개울(川)이라 하여 발천(撥川)이라 불렀다.

알영은 자라면서 점점 덕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13세 때에는 혁거세와 혼인을 하게 된다. 삼국사기는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有賢行) 내조가 훌륭하여(能內輔) 당시 사람들이 (혁거세와 알영을) 두 사람의 성인(聖人)이라고 불렀다(時人謂之二聖)'고 기록하고 있다.

 흥륜사,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이다.
 흥륜사,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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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륜사, 불교 공인 후 최초의 공인 사찰

오릉에서 나와 남천을 건너면 곧장 오른쪽 길가에 서 있는 흥륜사 안내판을 보게 된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흥륜사가 나온다. 절 건물은 마을 안에 숨은 듯 들어앉아 있어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정표가 커다란 것도 아니다. 그래도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의 흥륜사는 국가사적 15호를 자랑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5년 봄 2월에 흥륜사가 이루어졌다(成). 3월에 사람(人)들에게 출가(出家)하여 중(僧)이나 여승(尼)이 되어(爲) 부처(佛)를 받드는(奉) 것을 허(許)락했다(許人出家爲僧尼奉佛)'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때가 528년(법흥왕 15)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불교 공인 시점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44년에 창건된 흥륜사는 정말 고찰(古刹)인 것이다.

 경주박물관 뒤뜰의 다보탑 모형과 고선사터 석탑 사이에 놓여 있는 흥륜사 석조
 경주박물관 뒤뜰의 다보탑 모형과 고선사터 석탑 사이에 놓여 있는 흥륜사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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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뜰에는 신라 때에 조성된 석조(石槽, 돌로 만든 물그릇)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흥륜사에 있던 것이다. 이 석조는 흥륜사가 신라 당대에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증언한다.

또 삼국유사의 이차돈 순교 기사 중 '진흥대왕이 즉위 원년에 대(大)흥륜사를 만들었다(造)'는 내용과 '진흥대왕이 이 절에 대왕(大王)흥륜사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내용도 참고가 된다. 절 이름에 '大'와 '大王'이 붙어 있는 점도 그렇지만, 왕이 직접 절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大를 넣었으니 그 또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충분한 자료가 될 만하다.

그런 흥륜사이니,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차돈 순교비를 만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진품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흥륜사 뜰에서는 현대에 새로 만든 모형의 앞면을 만나게 되지만, 이곳의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애잔하게 마음을 적신다. 틀림없이 진흥왕은 최초의 공인 사찰인 흥륜사에 이차돈을 기리는 무엇인가를 남겼을 터, 백률사에서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이차돈 순교비의 원형을 이곳에 세웠을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을 지금 볼 수는 없지만 흥륜사 뜰에서 홀로 황홀한 상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김유신 집터. 멀리 선도산이 보인다.
 김유신 집터. 멀리 선도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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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건너 천관의 집 바라보고 있는 김유신 집터

흥륜사에서 반월성 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남천가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집터'에 닿는다. 신라 사람들은 김유신의 집을 재매정댁(財買井宅)이라 불렀다.

집 이름에 '井'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물맛 좋기로 이름을 날렸던 우물이 김유신의 집에 있었던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일화가 전한다.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김유신, 백제의 침략 소식을 들은 왕의 명령으로 다시 싸우러 나가게 된다. 그는 가족들도  만나지 않고 물만 한 바가지 떠오라고 하여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한 뒤 전쟁터로 떠났다. 재매정의 이름난 물맛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김유신 집터에는 그 재매정이 지금도 남아 있어 찾아온 답사자에게 뭉클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충북 진천 태령산 아래 김유신 생가 뒤편에서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유신이 마셨던 샘 연화정 물맛을 이미 맛본 답자사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깊이 5.7m, 최대 지름 1.8m, 바닥 지름 1.2m인 재매정은 크고 넓적한 돌들로 대충 덮혀 있다. 연화정처럼 물맛을 볼 수는 없다. 어른 김유신이 마셨던 물맛을 그대로 한번 느껴보려던 답사 욕심은 접어야 한다. 물론 우물 안에 물이 가득 들어 있어 두레박까지 가져간다면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눈으로 보기에도 마실 수 있는 상태는 못 되는 듯 여겨진다.

경주시 교동 91번지의 김유신 집터는 국가사적 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매정 담장 안에는 1872년(고종 9)에 세워진 유허비도 있다. 유허비는 비각 아래에 들어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그러나 우물은 지금도 떠마실 수 있어야 제대로 대접을 받는 유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득한 세월 너머에서 그 물맛을 자랑했을 김유신 가족에게 일견 미안한 느낌도 든다.  

 아래로 내려다 본 재매정의 물 속에 사진기를 들고 있는 필자가 비쳐 있다. 물은 마실 수 없는 상태로 탁하다. 이 우물의 물을 관광객들이 떠서 마실 수 있도록 정화하면 답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될 텐테...
 아래로 내려다 본 재매정의 물 속에 사진기를 들고 있는 필자가 비쳐 있다. 물은 마실 수 없는 상태로 탁하다. 이 우물의 물을 관광객들이 떠서 마실 수 있도록 정화하면 답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될 텐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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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정 샘물은 맛보았지만 재매정 물맛은 볼 수가 없네

삼국유사 진한조에 보면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중략) 三十五 金入宅'이라는 대목이 있다. 신라 전성기에 서울(경주)에 17만8936호의 집이 있었고 그 중 35호가 금입택이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가구당 인구를 대여섯 명으로 칠 때 당시 경주 인구가 약 100만 명이었고, 그 중 서른다섯 집이 '금(金)을 입(入)힌' 초호화 부잣집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므로, 이 문장의 호(戶)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 구(口)를 의미하지 않나 여겨진다. 즉, 당시 경주 인구가 17만8936명이 아니었나 추정된다는 뜻이다.

경주 인구 수는 차치하고 이곳은, 당시 35호 초호화 주택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김유신의 주거지인 만큼 잘 복원하여 현대사회에 내놓아야 한다. 재매정도 마실 수 있는 물로 되살려낸, 서라벌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통일신라의 '집' 한 채를 김유신 집터에서 보고 싶다는 말이다.

재매정 유허비각 뒤로는 형산강을 따라 길게 펼쳐진 푸른 하늘 너머 선도산이 보인다. 무열왕릉, 김유신 묘소인 흥무대왕릉, 법흥왕릉 등을 자락 안에 품고 있고,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에게 '오줌 꿈'을 샀던 바로 그 산이다.

 김유신 묘
 김유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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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보면, 남천 건너로 천관사터가 지척이다. 재매정에서 도당산까지는 정말 넘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김유신의 말이 어째서 천관의 집으로 저절로 다가갔는지 알 듯도 하다. 이렇듯 두 집이 가까우니 말이다. 김유신의 집이나 천관의 집이나 말에게는 매한가지였을 터, 억울하게 죽은 말의 영혼은 위로를 받아야 마땅하다.

재매정에서 나와 남천 둑에 서서 천관사터를 바라본다. 반월성의 해자 남천은 신라군과 적군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김유신과 천관을 갈라놓고 있는 것만 같다. 햇살이 도당산 아래 천관사터에 가득하다.

 천관사 터의 좁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김유신 장군 출전도'. 아마도 발굴 후 절터가 재정비되었을 때에는 두번 다시 이 그림을 볼 수 없으리라.
 천관사 터의 좁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김유신 장군 출전도'. 아마도 발굴 후 절터가 재정비되었을 때에는 두번 다시 이 그림을 볼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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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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