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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에서 산정호수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려 시대 탑. 숲속에 가려 있어 무심히 지나서는 결코 볼 수 없다.
 칠불암에서 산정호수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려 시대 탑. 숲속에 가려 있어 무심히 지나서는 결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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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상을 본 다음 어디로 갈 것인가? 주차를 통일전 쪽에 해두었다면 그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차가 없는 사람이 훨씬 좋다. 마음도 몸도 가볍기 때문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도 있지만 산에 오를 때면 자가용 없는 답사자가 가장 상쾌하다. 발걸음 내딛는 대로 길을 고르면 되니 그야말로 '자유인'이 아닌가.

이제 용장사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이미 신선암 마애불을 찾아뵌 답사자라면 남산 일주 등산로인 봉화대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500m정도 이영재까지 내려가는 것이 좋다. 이영재는 마치 말잔등처럼 푹 꺼진 지점인데, 여기서 다시 오르막을 걸으면 금오봉 옆을 스쳐 마침내 삼릉이나 포석정까지 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서출지와 남산동 쌍탑 사이에 닿는다.

지금은 용장사터를 찾아가는 길이니 왼쪽, 즉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내 고려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탑 하나가 왼쪽 수풀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모습을 드러내면 곧장 연못이 나타난다. 아까 신선암 마애불에서 고위봉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길은 결국 이 연못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 산 속 연못에 '산정 호수'라는 대단한 이름을 선사했다. 남산 남녘 35번 도로의 용장마을까지 가려면 아직도 2.8km나 더 내려가야 하는 고지대에 이렇듯 제법 큰 규모의 연못이 턱 버티고 있으니, 어쩌면 그 정도의 예우는 해주어도 무방할 법하다. 시원한 물가에서 얼굴을 한번 씻고 다시 아래로 길을 떠난다.

용장사터 답사는 반드시 설잠교에서 출발해야

이 길을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이 용장골에 놓았다는 설잠교를 건너기 위해서다. 설잠(雪岑)은 말년에 승려 생활을 할 때 김시습이 쓴 법명으로 '눈 덮힌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설잠교가 그 당시의 것은 아니다. 매월당이 이 세상을 산 때가 1435년에서 1493년이니 그가 놓은 나무다리가 지금껏 존재할 수는 없는 법, 다만 그 자리에 새로 건설된 구름다리나마 한번 건너보고자 하는 것이 '답사자의 마음'이다.

설잠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용장사터 아래의 계곡에는 그가 직접 놓은 설잠교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보는 다리는 옛것 그 자체는 아니다.
 설잠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용장사터 아래의 계곡에는 그가 직접 놓은 설잠교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보는 다리는 옛것 그 자체는 아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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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의 전모를 한눈에 바라보기 위해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는 표현은 설잠교에서 용장사터로 오르는 약 600m 등산로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것이다, 용장골과 탑상골의 갈림길에 있는 이 안내판은 용장사터 3층석탑을 '아득한 구름 위 하늘나라 부처님 세계에 우뚝 솟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수사법이다. 실제로 탑은 4.5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설잠교에서 바라보면 산 전체가 탑의 기단처럼 여겨진다.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탑상골 산덩어리가 온통 탑의 몸체를 이루고 있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고 해발 400m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용장사터 3층석탑은 높이가 분명 444.5m에 이른다. 어찌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 아니랴.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장소 

설잠교를 건너 끙끙 오르막을 올라, 때로는 밧줄을 부여잡고 진땀을 흘려가며 용장사터에 닿으면, 과연 이 탑이 444.5m 위용을 자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탑은 진정 남산 최대의 골짜기인 용장골 전체를 터로 잡고 아찔한 꼭대기에 서 있다. 언제나 용장골은 쏟아지는 햇살 또는 산안개로 가득 채워져 있어, 걸으면 3km의 발품은 팔아야 닿는 골짜기 건너편 고위봉을 지척으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썼다.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등등 수양대군에 붙어 영의정 따위의 최고위직을 차지한 채 위세 높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노골적으로 비웃고 멸시하였던 김시습, 31세부터 37세까지 이곳 용장사에 기거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용장사에 머물며(居茸長寺經室有懷)' 시 한 편이다.

용장사터 석탑은 아득한 들판까지 다 보여주는 현장 감상도 대단하지만, 계곡에서 위로 쳐다보는 독특한 느낌은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세워진 듯한 이 탑은 신라인들의 출중한 감각과 불교의식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용장사터 석탑은 아득한 들판까지 다 보여주는 현장 감상도 대단하지만, 계곡에서 위로 쳐다보는 독특한 느낌은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세워진 듯한 이 탑은 신라인들의 출중한 감각과 불교의식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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茸長山洞窈 不見有人來
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小窓眠共鹿 枯椅坐同灰
不覺茅簷畔 庭花落又開

용장골 깊으니 오가는 이 볼 수 없네
보슬비는 냇가 대나무를 찾아가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흔드네
작은 창가에서 사슴과 함께 잠자고
마른 의자에 앉으니 내 몸이 재 같구나
깨어날 줄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뜨락에 꽃들은 지고 또 피는데
 
아직 젊은 나이에 김시습은 세상에 큰 한을 품었던 듯하다. 사육신으로 살면서 현실 참여의 뜻은 버린 지 오래였지만, 벗들이 수양의 철퇴에 맞아 목숨을 잃은 이후 줄곧 권력을 부정하며 산과 들을 떠돌았으니, 아무려면 마음속은 쓸쓸함과 분노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소설속 주인공들이 언제나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연히 사라지는 것도 다 그런 까닭 때문이리라.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창작한 용장사터에 서서 그가 수양대군의  최대 공신 한명회를 비웃은 시를 떠올려본다. 한명회가 늙어 은퇴를 하면서 읊은 시

靑春扶社稷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를 김시습을 이렇게 바꿔 세상 사람들을 웃겼다.

靑春亡社稷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보물 186호인 용장사터 3층석탑은 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김시습이 용장사를 떠나고, 그리고 언젠가는 이 탑도 무너졌는데, 1922년에 흩어진 탑돌들을 모아 재건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1층, 2층, 3층… 이라 부르는 탑신부는 남아 있지만 그 위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 버렸다.

목이 달아나고 없는 용장사터의 삼륜대좌불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보는 순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는 용장사터의 삼륜대좌불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보는 순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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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골은 남산에서 가장 넓고 깊은 골짜기다. 그리고 용장사는 이 골짜기 최대의 사찰이었다. 그런 용장사가, 비록 무너져 자취를 잃었다고는 해도 탑 하나만 달랑 남겼을 리는 없다. 탑에서 10m 가량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 석불좌상이 바로 그들이다.

보물 913호인 마애여래좌상은 3층석탑의 하층 기단을 이루고 있는 거대 자연암석에 새겨져 있다. 멀리 고위봉을 응시하며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불상은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입술을 얼마나 꼭 다물었는지 양쪽 볼이 쏙 들어갔다. 그만큼 사실적인 작풍의 불상으로, 부처님의 무릎 아래를 장식하고 있는 연꽃 무늬까지도 너무나 세밀하여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삼륜대좌불

그런데 이 마애여래좌상 앞에는 그보다도 더 놀라운 불상이 있다. 웬만한 문화재 애호가나 역사여행 취미가라면, 실물은 비록 눈에 담지 못했더라도, 그 사진만은 어디선가 반드시 보았을 삼륜대좌불이다. 보물 187호로, 높이는 4.56m.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은 이름 그대로 바퀴[輪] 모양의 돌 셋[三]을 3층탑처럼 포개어 받침자리[臺座]로 삼고 있다. 2m가 조금 넘는 대좌  위에는 1.4m 높이의 불상이 앉아 있다.

이 불상은 사진으로 한 번 보고 나면 결코 잊히지 않는다. 사람의 뇌리와 감성을 지배하는 특이한 모습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까지 달아나고 없다. 이처럼 독특한 불상을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에 더욱 강렬한 충격을 떠안긴다.

하대석부터 시작하여 모두 4.56m 높이를 올려다보아도 목 위로 머리가 없으니, 어찌 불교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슴 깊이 울려오는 애잔한 느낌을 막을 수 있겠는가. 연꽃 무늬도 분명하고, 옷자락도 깔끔하여 보존 상태가 좋은 불상의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인데, 누군가가 목을 날려버리다니!

날씨가 맑은 날 이곳에 오르면, 삼륜대좌불의 없어진 머리 위로는 하늘이 푸르게 흘러간다. 예로부터 푸른색은 어쩐지 슬픔을 나타내는 빛으로 여겨졌고, '푸른 슬픔' 같은 사비유(死比喩)도 흔히 쓰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어째서 고대 이래로 줄곧 사람들이 푸른빛과 슬픔을 그렇게 기어이 연결시키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오늘 이곳 용장사터에 올라 목이 없어진 불상 너머로 푸른 하늘이 가득찬 정경을 보는 순간, 몸서리치게 다가오는 깨달음을 맛본다.

'아, 이래서 슬픔은 푸른 빛이로다.'

용장사터의 석탑
 용장사터의 석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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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터 삼층석탑이 남산 전체를 기반으로 세워져 있는 장관을 아득히 쳐다본 다음 비로소 설잠교를 건너 삼륜대좌불과 마애불, 그리고 드디어 석탑을 살피는 이 여정은 35번 도로의 용장마을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삼릉계곡으로 들어서서는 이 길이 주는 참맛을 깨우칠 수 없다. 원경부터 보고 근경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이 답사의 참된 여정이기 때문이다.

삼릉골이나 포석정에서 온 사람은 금오봉을 거쳐 용장사터 3층석탑에 닿는다. 그러므로 그는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용장사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만약 신라인들의 그 위대한 설계를 생생하게 보려면 설잠교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이미 근경을 보고 나서 원경을 살피러 떠나는 여정이 되고 말았으니 순서가 틀렸다.

'경주 남산' 모두 둘러보기

배리 들판을 절경으로 굽어내려보는 절벽에 새겨진 삼릉골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남산의 불상 중 가장 크다.
 배리 들판을 절경으로 굽어내려보는 절벽에 새겨진 삼릉골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남산의 불상 중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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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졸고 '경주 여행 9'부터 지금까지 '경주 남산'을 시계 도는 방향으로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 남산의 서쪽
(1) 55대 경애왕릉
(2) 삼릉 : 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3) 배리 삼존불 : 보물 63호
(4) 6대 지마왕릉 (5) 포석정 : 사적 1호
(6) 창림사터 : 신라 최초의 궁궐터
(7) 남간사터 당간지주 : 보물 909호
(8) 7대 일성왕릉 (9) 양산재 : 6촌장 재실
(10) 나정 : 혁거세 출생지

* 남산의 북쪽
(11) 상서장 : 최치원 유적
(12) 불곡 마애여래좌상 : 보물 198호
(13)  탑골 부처바위 : 보물 201호
(14) 보리사 석불좌상 : 보물 136호
(15) 미륵골 마애불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3호

* 남산의 동쪽
(16) 장사 벌지지 : 박제상 유적 (17) 망덕사터 (18) 49대 헌강왕릉 (19) 50대 정강왕릉
(20) 통일전 (21) 서출지 (22) 남산동 쌍탑 : 보물 124호 (23) 염불사터
(24) 칠불암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25) 신선암 마애보살상 : 보물 199호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좌상, 옷매듭이 아름다운 불상이다.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좌상, 옷매듭이 아름다운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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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의 남쪽
(26) 고려 시대 전탑 (27) 설잠교 - 김시습 유적지
(28) 용장사터 마애여래좌상 : 보물 913호
(29) 용장자서 삼륜대좌불 : 보물 187호
(30) 용장사터 삼층석탑 : 보물 186호         

만약 삼릉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다면 이제 삼릉골로 하산하면 됩니다. 용장사터 삼층석탑에서 산 위로 잠깐 오르면 군사정권이 닦은 '무식한' 남산 일주도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삼릉골로 하산하는 길이 곧장 나타납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중요 문화재와 유적은 - 옛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아기를 낳게 된다'고 믿었던 상사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58호인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 보물 666호인 석불좌상, 유형문화재 21호인 마애선각육존불상, 유형문화재 19호인 마애관음보살상 등 입니다. 마지막으로 '목 없는 석불좌상'과 만나면 삼릉이 지척입니다.




태그:#용장사,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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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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