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TV 드라마'다. 드라마만큼 사람들의 생활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는 유흥이 없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오락도 없다. 그래서일까. 과거 정권들은 드라마를 계몽선전 도구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드라마를 권력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본 것이다.

반공극부터 계몽극까지, 정권의 입맛에 따라 변해온 한국 드라마 50년은 말 그대로 현대사의 영욕을 그대로 담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간 방송된 반공극 <실화극장>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간 방송된 반공극 <실화극장> ⓒ KBS


[1960년대] 반공극과 계몽극의 시대

드라마가 정부 권력에 예속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군사 정부 시절부터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는 재미로 보는 드라마를 철저한 '계몽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철저한 반공 의식 고취와 신체제 도입, 새나라 건설의 계도성을 드라마에 강하게 요구했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반공극과 계몽극이 주를 이루었고 정부의 지원 하에 중앙정보부 실무자가 대본을 쓰고 김승호, 김진규, 신성일, 이순재, 태현실, 황해, 이낙훈, 김무생 등 당시의 인기 배우가 총출동한 <실화극장>이 장안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철저한 통제기에 접어든 이 시기에 한국 드라마는 정권의 권력 유지에 열성적으로 호응했다. 1961년 8월 국영 텔레비전 설립 계획을 발표한 공보부 문건에서는 계몽극 등을 방송하는 이유에 대해 "1. 여론을 만드는 서울 시민의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해, 2.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 3.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어서"로 규정했다.

6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도 박정희 정권의 드라마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TBC, MBC가 차례로 개국하며 어느 정도 다양성이 인정받는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계도적 반공극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인 영웅극을 통해 지도자 박정희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등의 시도 역시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정희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정희 ⓒ 뿌리깊은 한국사


[1970년대] 억압과 통제의 시대, 권력에 지배당한 드라마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 드라마를 통한 사회 장악은 아주 노골적인 형태로 심화된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날로 격렬해진 유신반대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국민을 억압적인 방식으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한 방송제작자는 "방송이 바라본 1970년대 초 정부는 고등학교 규율부와 같았다." 고 증언했다.

박 정권은 반공극을 통해 국민의 시선을 외부로 돌려 유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약화시키려 했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유신은 반공을 위한 효과적 체제라는 논리를 설파한 것이다. 당시 방송됐던 <KBS 무대>의 '6.25 동란' 은 6.25의 시발점부터 그와 관련된 내용을 각종 기록 필름을 통해 극화해 젊은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용공주의자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킨 전형적 반공극으로 손 꼽힌다.

이 외에도 국내에 잠입해 있는 간첩들의 야만적 습성을 폭로하거나, 적화통일을 위해 뛰어든 남파간첩이 남한의 자본주의에 감동해 자수한다는 내용의 <실화극장><홍콩 1번지><피양서 왔수다><밤과 낮>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반공극 뿐 아니라 계몽극의 천국이기도 했다.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는 정책 드라마, 발전된 한국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화합하는 이웃, 이상적인 사회모습을 묘사한 드라마가 많았다. 또한 역사적인 영웅의 삶을 그린다든지 민족 정서에 호소력을 가진 시대극을 반영하여 내적 단결과 화합을 목적의 드라마도 많았다.

1970년대 후반, 반유신 반정부 운동이 더욱 치열해 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사회 통제는 더욱 강화된다. 이 시기 박 정권은 외래어 사용 금지, 장발 단속을 시작으로 드라마 기준 제정, 코미디 프로그램 폐지, 장발 연예인의 TV 출연 금지 등 한층 강화된 억압책을 사용했다.

 김수현 작가

김수현 작가 ⓒ SBS


이때 박 정권은 드라마 시청 열기에 국책을 실으라고 요구했고 따라서 국책드라마, 국난극복 드라마가 오후 8시대에 일제히 자리하게 되었다. 역사상의 위인, 충렬지사가 한동안 다루어졌으며 새마을 드라마도 만들어져 방송됐다. 각 방송사는 문공부의 통일편성 방침에 맞게 드라마를 기획해야 했는데 <일요사극-맥><예성강><사미인곡> 등의 목적극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공보부는 76년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편성, 제작 지침' 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극' 이란 것을 제창하고, 78년에는 '프로그램 지침' 을 통해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 드라마를 새마을 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프로그램 편성과 소재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런 억압책도 '일탈'을 꿈꾸는 통속극의 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시기 전국적인 스타 작가로 인기를 모은 이가 '언어의 마술사''드라마 여제' 김수현이다. 김수현은 <안녕>(75년), <후회합니다>(77년), <청춘의 덫>(78년)에서 유부남과 미혼여성의 불륜, 혼전임신, 바람난 남자에 대한 복수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를 차용해 단번에 문제적 작가로 떠올랐다.

이 당시 김수현 드라마는 정부시책에 반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조기종영 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때문에 김수현은 갑작스레 종영이 결정된 <청춘의 덫>의 마지막 회를 마무리짓지 않고 어정쩡한 미완성본으로 방송하게 하는 등 검열에 대한 노골적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1999년 심은하 주연의 <청춘의 덫>으로 리메이크 돼 방송된 지 20년 만에 결말을 맺었다.

 최초의 정치드라마 MBC <제 1공화국>의 故 김무생과 최불암(왼쪽부터)

최초의 정치드라마 MBC <제 1공화국>의 故 김무생과 최불암(왼쪽부터) ⓒ MBC


[1980년대] 드라마, 일탈을 꿈꾸다

사회통제와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던 1979년, 궁정동에 울려퍼진 총성과 함께 한국 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희망은 잠시 뿐이었다. 1980년 12.12로 신군부 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또 다른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방송사는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추동궁 마마><개국> 등 명백하게 정변의 정당성을 암시하거나, 도농 간의 화합을 모색하는 농어촌 드라마 <전원일기> 등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또한 <한국인의 재발견 시리즈><매천야록> 등 민족정신을 담은 드라마를 방영하여 민족 정체성 함양이라는 정부의 방향에 철저히 순응했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이 시기에 시도된 정치 드라마는 정경유착이나 권력형 비리를 다루면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야기했다. 고석만이 연출을 하고 나연숙이 집필을 맡은 MBC <제 1공화국>이 대표적 사례의 작품인데 최불암, 이영후 등이 명연기를 펼쳐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정치 드라마의 등장은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8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MBC <사랑과 야망>

8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MBC <사랑과 야망> ⓒ MBC


1987년 한국사회는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6월 항쟁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를 견디지 못한 전두환 정권이 정국 전환을 위해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직선제 개헌, 정치인 대사면을 시작으로 언론기본법이 1987년 폐지되고, 월북작가의 해방 전 작품이 해금되며(1988), 언노련, 전대협이 발족하고(1988), 전교조(1989)가 탄생됐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 맞춰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현실 사회 폭로와 정권 비판적 성향 등 비교적 자유로운 제작이 시도된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허구성을 폭로한 <우리들의 조부님><어머니의 노래> 등이 방송됐고, 현대 산업사회의 파괴적 모습을 재현한 <지포리에서 생긴 일><침묵의 도시>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인 인신매매, 미혼모, 철거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다룬 단막극들이 등장하고 <모래성><사랑과 진실><사랑과 야망>처럼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통속극이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른바 '청춘물'인 <사랑이 꽃피는 나무><고교생 일기> 등이 첫 선을 보여 젊은 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보통사람들><달동네><한지붕 세가족> 류의 홈드라마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 MBC <여명의 눈동자>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 MBC <여명의 눈동자> ⓒ MBC


[1990~2000년대] 양적-질적 발전을 이룬 드라마의 전성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드라마는 권력에서 자유로워지고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블록버스터 대작이었던 <여명의 눈동자>(91년)는 적나라한 폭력씬, 키스씬 등을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줬다. 본격적으로 재미를 위한, 쾌락을 위한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대발이 신드롬'으로 화제를 모은 <사랑이 뭐길래>(91년)를 비롯해, 한국 최초로 시도된 트렌디 드라마 <질투>(93년)가 90년대 초반을 수 놓았고 90년대 중후반에는 김희선 드라마로 통칭되는 <미스터큐><토마토><안녕 내사랑> 등이 등장해 보다 가볍고 쉽게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90년대는 사극, 홈드라마, 트렌디 드라마, 청춘물, 치정극, 단막극 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 발전한 시대였다. 양적, 질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고 시청률 65.8%라는 대기록을 세운 <첫사랑>을 비롯해 <모래시계><그대 그리고 나><목욕탕집 남자들><젊은이의 양지><파랑새는 있다><청춘의 덫> 등 희대의 명작들이 탄생했다.

2000년대에는 90년대의 성장을 바탕으로 <겨울연가><대장금> 같은 한류 열풍의 주역들이 탄생하고 <추노><뿌리 깊은 나무>로 대변되는 실험적 사극이 대거 제작됐다. 더 이상 권력은 드라마를 지배하지 못하게 됐고, 드라마는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 드라마 50년, 현대사의 영욕을 담아내다

이처럼 한국 드라마 50년사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그 궤도를 같이 했다. 때론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때론 일탈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곁에 머물렀던 한국 드라마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지금의 한국 드라마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모든 이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무궁한 발전을 이뤄내기를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고 또 바라본다.

박정희 한국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반공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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