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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나 김해에서 경주로 올라올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은 천전리 서석이다. 천전리 서석의 주소는 울산광역시 두동면 천전리 산201번지다. 그러나 이곳의 '국가 보물 147호'는 신라 왕가의 자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업도시 울산보다는 역사문화도시 경주에 더 어울리는 답사지다.

게다가 천전리 서석에서 반구대까지 이르는 대곡천 계곡은 도로가 개설되지 않은 덕분에 인공의 작위가 전혀 없다. 공업의 이미지와는 이래저래 어울리지 않는 천혜의 자연유산 지대인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서석. 네모로 외곽선이 그어진 (사진의 왼쪽 부분) 두 곳이 진흥왕의 아버지 등이 다녀간 사실을 스스로 새겨놓은 곳이다. 오른쪽에 선사인들이 새긴 원형의 그림이 있고, 그 사이에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그림도 새겨져 있다. 신라 때부터가 아니라 이곳은 아득한 옛날에도 이미 사람들이 놀고, 기도를 올리기도 한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서석. 네모로 외곽선이 그어진 (사진의 왼쪽 부분) 두 곳이 진흥왕의 아버지 등이 다녀간 사실을 스스로 새겨놓은 곳이다. 오른쪽에 선사인들이 새긴 원형의 그림이 있고, 그 사이에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그림도 새겨져 있다. 신라 때부터가 아니라 이곳은 아득한 옛날에도 이미 사람들이 놀고, 기도를 올리기도 한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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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書石)은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반구대를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대곡천 기슭의 경사진 거대 바위에는 진흥왕의 아버지 사부지 갈문왕이 525년(법흥왕 12) 음력 6월 18일 이곳을 방문했으며, 그로부터 14년 후인 539년 7월 3일에 또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는 그 외에도 백수십 명의 화랑과 낭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원시인들이 판 수많은 기호와 사람 얼굴 형상 등도 남아 있다.

글자들이 새겨진 바위는 폭 약 10m, 높이 약 3m 크기로,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자색 혈암(頁巖)이다. 혈암은 돌이 단단하지 않아 글씨나 그림을 새기기에 적당하다. 반면 빗물이나 바람에 마모되기도 쉽다. 하지만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진 천혜의 조건 덕분에 천전리 서석은 아득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원시인들의 그림과 신라인들의 글자를 무사히 보존해 왔다.

선사인·신라인·현대인 모두가 여름철에 찾은 곳

바위는, 공룡발자국이 무성한 이곳 골짜기에 서석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도 말해준다. 사부지 갈문왕이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서석골(書石谷)로 이름을 삼고 글자를 새겼다'는 문장이 보인다. 글자들 중에는 당시 여섯 살이었던 '사부지왕의 아들 심맥부'도 함께 왔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심맥부(深麥夫) 또는 삼맥종(彡麥宗)은 진흥왕의 본명이다.

천전리 서석. 글를 새기기 좋은 재질에 비스듬하여 빗물, 바람 등으로부터 보호도 받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천전리 서석. 글를 새기기 좋은 재질에 비스듬하여 빗물, 바람 등으로부터 보호도 받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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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방문 기록은 따로 따로 새겨져 있고, 각각 네모난 틀 속에 고이 보존되어 있다. 아무도 문장의 영역을 침범하여 덧칠을 하지 않았다. 법흥왕의 왕후, 법흥왕의 아우인 사부지 갈문왕, 그의 아내와 아들(뒷날 진흥왕) 등이 와서 자신들의 이름과 행차 내용을 새겨놓은 글인 만큼 감히 다른 자가 침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네모 둘레에 화랑 등 이곳을 찾은 백수십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역사학의 증거로 채택되기도 한다. 한자 이름이므로 평민들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하고, 화랑과 낭도들이 방문 기념으로 스스로 이름을 새겨놓았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이름이 <화랑세기>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화랑세기>가 위작으로 추정되는 근거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 천전리 서석

가까운 곳에 공룡 발자욱, 물 건너 천전리 서석이 보이는 풍경
 가까운 곳에 공룡 발자욱, 물 건너 천전리 서석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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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아버지 일행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기기 좋을 깨끗한 자리를 골랐을 터이다. 이미 원시인들이 여러 종류의 무늬들과 사람 얼굴 형상 등의 그림을 즐비하게 파놓은 혈암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서석 바위 앞 대곡천 너머에 펼쳐진 넓은 바위들 위에 움푹움푹 파인 원형의 무늬들이 공룡발자국이라는 사실도 물론.

두 번째 기록에 나오는 '(사부지 갈문)왕은 과거의 왕비 지몰시혜 비를 스스로 생각했다'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첫 번째 방문 때 함께 왔던 지몰시혜가 두 번째에는 함께 오지 못했으며,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여기까지 와서 왕이 죽은 부인을 '스스로 생각'했고, 그 사실을 바위에 글자로 새겨 남긴 것을 보면 그의 죽은 아내 사랑은 더없이 지순했던 듯하다.

하지만 진흥왕은 그저 신나게 물놀이만 하며 철없이 놀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서 '어리다'와 '철이 없다'는 거의 뜻이 같으므로, 아이는 '철'의 구분을 모르는 사람, 즉 시간 개념이 없는 존재이다. 병으로 혹은 자신을 낳다가 죽어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에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을 여섯 살 철부지 심맥부가 어찌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아이는 그저 왕과 왕후, 화랑과 낭도 들이 여름철마다 찾아와서 논, 신라 '상류층의 피서지' 대곡천에서 퐁당퐁당 물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리라.

그 어린 심맥부, 바로 이듬해인 540년에 임금이 된다. 뒷날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는 칭송을 듣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 바로 그 진흥왕이 되는 것이다.

겅주에서 보는 진흥왕 유적- 왕릉(사진 위 왼쪽, 무열왕릉 뒤 선도산 기슭), 흥륜사(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 진흥왕 완공, 김유신 집터 인근), 황룡사 터(진흥왕 창건 시작, 분황사 앞), 명활산성(진흥왕 개축, 선덕여왕 때 비담 반란 근거지, 보문호 오른쪽 도로변)
 겅주에서 보는 진흥왕 유적- 왕릉(사진 위 왼쪽, 무열왕릉 뒤 선도산 기슭), 흥륜사(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 진흥왕 완공, 김유신 집터 인근), 황룡사 터(진흥왕 창건 시작, 분황사 앞), 명활산성(진흥왕 개축, 선덕여왕 때 비담 반란 근거지, 보문호 오른쪽 도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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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공룡들도 놀았던 이곳... 시간은 영원을 향해 흘러가는데

천전리 서석 앞을 흐르는 대곡천 맑고 힘찬 물살을 바라본다. 공룡들이 살았던 아득한 빙하기 시대, 원시인들이 그림과 기호를 새겨 넣었던 선사시대, 진흥왕의 아버지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넋을 놓고 앉아 있었던 신라 시대,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의 '시간'이 주는 의미도 모르는 채 시원한 물놀이에 정신이 팔렸을 여섯 살 진흥왕의 어린 시절…. 그 모든 시간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아찔하게 사로잡는다.

역사와 인간의 무상이 물길을 따라 출렁출렁 반구대로 흘러간다. 반구대 암석에 그려진 고래잡이 원시인들과 이곳에 암각화를 그린 원시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먼 훗날 저 세상에서 그들과 만나 아는 사이가 될는지도 모른다. 발길 아래는 쉼 없이 물길이 흐른다.

천전리 서석을 둥글게 감싸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아름답다. 물이 맑고 풍부하며 그늘이 많아 신라 때에도 이미 왕족과 화랑들이 다투어 널러온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서석에 새겨져 있기 때문. (사진에서 물길은 왼쪽으로 흘러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간다.)
 천전리 서석을 둥글게 감싸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아름답다. 물이 맑고 풍부하며 그늘이 많아 신라 때에도 이미 왕족과 화랑들이 다투어 널러온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서석에 새겨져 있기 때문. (사진에서 물길은 왼쪽으로 흘러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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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김해)에서 경주로 가는 답사자를 위한 여정 안내

치산서원
 치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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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나 김해에서 경주로 올라가면서 볼 만한 답사지는 '천전리 서석'과 '박제상 유적지' 두 곳이다. 이 두 곳은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에 속한다. 경직되게 말하면 경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신라 때에는 모두 경주였으니, 역사여행자라면 응당 이 두 곳을 지나칠 수는 없으리라.

천전리 서석이 남쪽에 있고, 박제상 유적은 그보다 조금 북쪽에 있다. 천저리 서석에서 산속으로 난 고개를 넘으면 금세 박제상 유적에 닿는다. 실전된 <치술령곡>으로 유명한 망부석, 망부천, 은을암, 치산서원,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기리는 사당, 그리고 근래에 건립된 박제상기념관 등이 특히 볼 만하다. 아무려면 이곳의 대표 답사는 망부석에 올라 동해를 응시하는 일이므로, 가능하면 치술령에 등산을 해야겠다.

박제상 유적은 이미 오마이뉴스 지면에 여러 번 소개했으므로 지금은 생략할까 한다. 오마이뉴스 검색창에 '박제상 정만진'을 입력하면 여러 편의 글과 많은 사진이 나오므로 참고하시기를.



태그:#천전리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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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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