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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너머로 보이는 선도산. 하얗게 눈이 쌓인 봉우리들이 서악고분군이다.
 형산강 너머로 보이는 선도산. 하얗게 눈이 쌓인 봉우리들이 서악고분군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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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의 뒷산인 선도산을 오른다. 선도산은 김유신의 누이 문희의 자취가 서려 있는 유적지다.

김유신에게 두 누이가 있었다. 언니가 보희, 동생이 문희였다. 언니 보희가 꿈을 꾸었다. 서악(西岳, 선도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이 오줌에 잠겼다. 그것도 아침에였다.

처녀가 아침부터 산꼭대기에 올라 오줌을 누었다는 것도 망칙했지만, 그 오줌이 경주 시내를 가득 채웠으니, 남들이 알까봐 극구 숨길 만한 창피한 꿈이었다. 보희는 걱정이 되어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문희가 대뜸 '언니, 그 꿈, 내가 사겠어요' 했다. 좋지 않은 꿈인 것만 같아 마음이 상해 있던 보희는 동생의 제안에 '얼씨구나' 화답을 했다. 보희의 꿈은 문희의 비단치마[錦裙]와 교환되었다.

문희는 언니의 꿈을 좋게 해몽했다. 오줌이 서울을 메웠다는 것은 나라를 지배할 신분이 된다는 암시로 보았던 것.

그로부터 열흘 정도 뒤, 오빠인 유신이 춘추공과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띠를 떨어뜨리고는 집에 들어가서 바느질을 하자고 했다. 유신이 언니 보희에게 춘추공의 옷띠를 꿰매드리라 하니 '어찌 처녀가 춘추공 같은 귀공자를 가볍게 만나 옷을 꿰맬 수 있겠습니까?' 하며 거절했다. 그리하여 공은 문희에게 넘어갔다.

선덕공주의 도움으로 성사된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문희가 임신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춘추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도 못하고 아기를 낳지도 못하는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유신은 선덕공주가 남산에 행차하는 날, 마당 가운데에 나무를 쌓아놓고는 문희를 태워 죽인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재매정'이라는 유명한 우물이 남아 있는 김유신 집터. 유신은 이곳에 장작을 쌓아 놓고 연기를 피우면서 '결혼 전에 임신을 한 여동생 문희를 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선덕공주가 이를 듣고 춘추를 보내 말렸고, 공주의 도움으로 둘은 결혼에 이르렀다. 사진에 선도산이 우뚝 솟아 보인다.
 '재매정'이라는 유명한 우물이 남아 있는 김유신 집터. 유신은 이곳에 장작을 쌓아 놓고 연기를 피우면서 '결혼 전에 임신을 한 여동생 문희를 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선덕공주가 이를 듣고 춘추를 보내 말렸고, 공주의 도움으로 둘은 결혼에 이르렀다. 사진에 선도산이 우뚝 솟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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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 공의 둘째딸이 혼인도 하지 않은 채 임신을 하여 오빠 유신공에게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문은 정말 화살처럼 퍼져나갔다. 서울 복판에서 연기와 불꽃이 치솟는 광경을 본 선덕이 문희의 상대 남자가 누구냐고 주위에 물었다. 옆에 있던 춘추공은 사색이 되었다. 공주는 춘추에게 '누가 그랬다고 하더냐?'고 재차 물었지만 춘추는 눈물만 흘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공주가 눈치를 챘다. 

"빨리 화형을 중지시키고, 내가 두 사람을 혼인시키겠다고 전해라."

춘추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중지하시오. 화형을 중지하시오! 공주마마의 명이오!'하고 외쳤다. 문희를 당장 불 속에 집어던질 듯이 연극을 하면서 상황을 살피던 유신은 못 이기는 채 화형을 중지했고, 그 후 춘추와 문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뒷날 춘추공의 본부인은 딸을 낳다 죽고, 춘추는 왕위에 오른다. 태종 무열왕이다. 그리고 문희는 문명왕후가 된다. 또 문희가 낳은 아들은 뒷날 삼한일통을 완수하는 문무왕이 된다. 보희는 겨우 비단 치마치마 한 벌을 받고서 왕후 자리는 물론, '삼한일통의 어머니' 자리까지 문희에게 넘겨준 셈이다.

선도산 정상 턱밑 성모사에서 내려다본 서악고분군. 만약 문희가 이 거대 마애불을 세웠다면, 그녀는 이곳에서 남편 김춘추와 그 일가 선조들의 묘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으리라.
 선도산 정상 턱밑 성모사에서 내려다본 서악고분군. 만약 문희가 이 거대 마애불을 세웠다면, 그녀는 이곳에서 남편 김춘추와 그 일가 선조들의 묘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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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오악(五岳)'을 신령스러운 산으로 섬겼다.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이 바로 그 오악이다. 하지만 보희가 꿈에 올라 오줌을 눈 서악은 이 오악의 하나인 계룡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꿈이라 한들 경주에 사는 그녀가 백제까지 가서 오줌을 누었다고 해서야 사실성이 없다.

그렇다면 보희의 서악(西岳)은 과연 어디인가? 오늘날 무열왕릉, 김인문 묘, 김양 묘, 서악동 고분군, 그리고 김유신을 모시는 서악서원이 그 산의 앞비탈에 있고, 김유신의 묘가 뒤편에 있다고 하면, 경주를 찾아본 이들은 대략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 이름에 '신선(仙)'과 '무릉도[桃]원'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짐작이 되지만, 이 산은 신라 사람들이 경외하던 신성한 곳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선도산을 영산(靈山)으로 섬겼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선도산에 사당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정상 턱밑에 성모사(聖母祀)라는 사당이 있다.

선도산 정상 턱밑의 성모사. 성모사 왼쪽의 거대한 암벽에 7m나 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선도산 정상 턱밑의 성모사. 성모사 왼쪽의 거대한 암벽에 7m나 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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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신라인들은 성모사 사당 바로 뒤의 거대한 암벽에 엄청난 크기의 마애불상군을 새겼다. 조상 대대로 섬겨온 영산에 신라인들이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는 일인 것이다.

이 거대 마애불은 누가 새겼을까? 무열왕릉에서 40분 가까이 오르면 닿는 선도산 390m 정상부의 마애삼존불 앞에 서면, 문득, 이 불상을 만든 이가 분명히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라는 생각이 몰려온다.

7m 크기 마애불, 문무왕의 어머니 문희가 세웠을 듯

문희, 무열왕의 아내로 한 나라의 왕후이자, 당대의 군사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서악산에서 오줌을 눈 누이 보희의 꿈에 힘입고, 누이를 김춘추와 결혼시키려고 마음먹은 오빠 김유신의 계획에 따라 그 자리에 올랐다. 남편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킨 이듬해(661년)에 죽어 선도산 아래에 묻혔다. 선도산은 그녀의 인생을 흔든 '생애의 산'이었던 것이다. 

선도산 마애불상
 선도산 마애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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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년 김춘추가 죽은 뒤 아들 법민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고, 668년 삼국이 통일된다. 그리고 김유신이 673년에 노환으로 자연사한다. 문희는 그 사이의 12년 세월을 어떻게 보내었을까? 김유신이 죽은 때가 우리 나이로 79세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시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30세 정도에 불과했다. 죽은 남편과 아주 상노인이 된 오빠, 그에 못지않게 할머니가 된 자신을 생각하면서 문희는 김춘추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선도산 높은 자리에 모두의 내세 안녕을 비는 불상을 세우고 싶었으리라.

높이가 7m나 되는 불상을 어느 개인이 무슨 힘으로, 그것도 신라인들이 서방정토로 믿는 선도산 정상부에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선왕 김춘추의 아내이자 현왕 김법민의 어머니, 그리고 신라 천년 유일의 태대각간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만이 할 수 있는 대역사(大役事)가 아닐까. 그녀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사연도 있고……. 자신을 왕후로 만들어준 꿈의 무대 선도산, 남편의 무덤을 자락에 내준 선도산, 예로부터 신라인들이 한결같이 신성시해온 성모(聖母)의 산 선도산, 그리고 극락정토 선도산이 아니던가.

성모사 바로 뒤의 선도산 정상에 누군가가 공들여 돌탑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서악고분군 등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기에는 이곳 정상보다 성모사 옆이 훨씬 좋다. 이곳은 사방으로 잡목이 자라 사방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모사 바로 뒤의 선도산 정상에 누군가가 공들여 돌탑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서악고분군 등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기에는 이곳 정상보다 성모사 옆이 훨씬 좋다. 이곳은 사방으로 잡목이 자라 사방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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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선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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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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