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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항구에 정박 중인 크루즈, 같은 선사의 크루즈는 몇 척이 함께 묶여 있다.
 아스완 항구에 정박 중인 크루즈, 같은 선사의 크루즈는 몇 척이 함께 묶여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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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에서 다시 아스완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아스완 하이댐의 관망대에 갔다. 한 때 세계 최대의 사력댐을 눈으로 직접 보고, 거기서 멀리 1902년에 완성된 아스완 올드댐을 바라봤다. 바로 이 두 댐의 완공으로 나일강의 범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댐의 완공으로 길이 500km가 되는 낫세르 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는 수많은 고대유적뿐만 아니라 기후에도 영향을 줬다. 예전에 없던 운무가 많아졌고 습도 또한 높아졌다. 나일문명은 이제 영원히 과거가 돼 버렸다.

이제 3일 간의 나일 크루즈가 시작된다. 아스완에 정박 중인 5성급 크루즈 '크라운 엠퍼러'에 탑승했다. 카리브해의 크루즈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길이 100m 정도에 객실이 100여 개가 되는 큼직한 크루즈다. 방은 육상의 호텔보다는 조금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같은 회사 소속 배들이 정박할 때는 3~4척이 나란히 붙어 있으면서 여객들이 선박과 선박을 관통해서 지나 다닐 수 있게 돼 있었다.

아스완의 미완의 오벨리스크

아스완 채석장의 미완의 오벨리스크, 위쪽 부분에 금이 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스완 채석장의 미완의 오벨리스크, 위쪽 부분에 금이 가 있음을 볼 수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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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서 여장을 푼 다음 바로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배에서 나와 아스완의 고대 채석장에 갔다. 채석장은 아스완의 나일강 동안에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신전의 탑문이나 피라미드·오벨리스크·신상 등에 사용된 화강석의 고향이다. 아스완의 화강석은 붉은색이다. 화강석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집트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 심지어는 로마까지 수출됐다고 한다.

지금 이 채석장에는 고대에 채석을 하다가 미완에 그친 오벨리스크 하나가 놓여 있다. 만일 이것이 완성돼 나일강으로 옮겨져 나일강변 어딘가의 신전에 장식됐다면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오벨리스크가 됐을 것이다. 길이 41m, 무게는 1267t에 이른다고 한다.

이 화강석이 이렇게 미완의 상태에서 남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너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표면에 나 있는 금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업 중에 화강석에 금이 가는 바람에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어 작업이 중단됐다는 것. 자세히 보니 화강석 끄트머리에 긴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크고 단단한 화강석을 절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과 나무 쐐기였다. 화강석에 홈을 내고 거기에 나무 쐐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해 화강석이 깨진다. 미완의 오벨리스크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도 그 쐐기 자국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초보적 기술로 이 거대한 돌을 다듬었다고 생각하니... 참 신기하다.

말이 나온 김에 오벨리스크 이야기 좀 하자. 오벨리스크는 고대 나일문명의 상징물 중 하나다. 모든 신전에는 오벨리스크가 장식돼 있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고, 지표면에서는 사각으로 시작하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맨 꼭대기는 피뢰침 같은 모양이 된다. 오벨리스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대지의 신이 하늘의 신과 교합하는 것의 상징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태양신 자체라고도 한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로마인들의 눈에도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많은 황제들이 이집트에서 발견된 오벨리스크를 배로 실어가 로마 시내 한 가운데 장식품으로 썼으니 말이다. 현존하는 이집트산 오벨리스크는 총 29개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이집트에는 9개만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국외에 있는데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역시 로마제국 시절 이집트를 속주화한 로마다. 모두 11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국이 4개, 터키·프랑스·폴란드·이스라엘·미국이 각각 1개씩을 가지고 있다.

원래 아스완에 가면 필레 신전을 보고자 했다. 그런데 여행 일정에 이것이 빠져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행사가 필레 신전의 의미를 간과한 모양이다. 사실 아스완에서 가장 볼만한 곳은 이곳인데 말이다.

필레 신전은 이시스 신전이 봉헌된 곳이다. 처음 이곳에 신전이 들어선 것은 신왕국 마지막 즈음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로마제국 시절에도 많은 건축물이 들어섰다. 지금도 그 잔영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트라야누스 정자가 그것이다. 이곳은 바로 이집트 신전 중에서 마지막까지 명맥을 유지한 신전으로 유명하다. 앞에서 본대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곳도 이곳이다.

이 신전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있다. 6세기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신전을 폐쇄한다. 그 후 성소의 문은 파괴됐고, 신관들은 고문당했으며 신상 봉안소는 세속의 손길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원기둥이 있는 홀은 교회가 됐다고 한다. 이 신전도 아스완 하이뎀의 완공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가 동요했고, 마침내 사람들은 이 신전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원래의 신전은 낱낱이 해체돼 필레섬을 떠나 인근의 작은 섬 아길키아로 옮겨졌다. 1980년 3월 10일이었다. 신전이 다시 태어난 날이다.

콤옴보 신전, 호루스와 세베크의 화해

콤옴보 신전의 전면 모습이다. 탑문이 두 개임을 알 수 있다. 신전이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두 탑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두 개의 지성소에 이른다. 기둥의 양식이 그리스 양식을 닮았다.
 콤옴보 신전의 전면 모습이다. 탑문이 두 개임을 알 수 있다. 신전이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두 탑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두 개의 지성소에 이른다. 기둥의 양식이 그리스 양식을 닮았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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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온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크루즈에서 풍성한 식사를 하고 갑판에 올라가 아스완의 아름다운 밤을 감상했다. 낮에는 꽤나 지저분한 도시가 나일강과 밤의 조명 덕분인지 휴양 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밤이 깊어지자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쪽(카이로 방향)으로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 동이 터오자 배는 콤옴보항에 정박해 있었다. 오전 일정으로 이곳에 있는 신전 하나를 본단다.

이곳에 있는 신전은 신왕국 제18왕조의 투트모시스 3세 때 세워진 건축물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계승한 신전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신전의 전체적 외관은 그리스 신전의 모습을 닮았다.

특히 신전 정문 격인 탑문 주변의 기둥은 그리스 양식은 코린트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신전의 전체적 구조는 이집트 신전의 기본을 잘 따르고 있다. 탑문을 통과하면 큰 안 뜰이 나타나고 그것을 지나면 원기둥이 있는 첫 번째 홀이, 그 다음에는 두 번째 홀이 나타난다. 그런 다음 몇 개의 방을 더 지나 지성소에 다다른다.

신전은 크게 둘로 분할돼 있는데(따라서 지성소도 둘임) 하나는 호루스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베크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호루스는 선을 의미하고, 세베크는 악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신전이 의미하는 것은 선과 악의 화해이다. 호루스는 매로, 세베크는 악어로 형상화돼 있다.

콤옴보 신전의 벽면의 부조 중 당시 외과수술을 짐작할 수 있는 도구들
 콤옴보 신전의 벽면의 부조 중 당시 외과수술을 짐작할 수 있는 도구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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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안쪽 끝의 벽면을 보면 독특한 부조가 있다. 외과 수술 도구가 세 칸으로 나뉘어 표현되어 있다. 집게와 갈고리·가위·저울 등을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의사의 신이기도 한데 그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전의 이런 부조는 당시의 의술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2500년 전 이미 외과 수술이 보편화됐다니 놀랍지 않은가.

에드푸, 호루스 신전

오전에 콤옴보 신전을 둘러보고 잠시 크루즈로 돌아왔다. 배는 다시 떠난다. 나일강을 따라 북쪽으로. 점심 무렵 닿은 곳이 에드푸. 이곳은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이다. 점심을 먹은 일행은 배에서 내려 밖에 대기한 마차를 타고 호루스 신전으로 향했다. 이 신전은 고왕국 시기에 호루스신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기원전 3세기 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다시 건축된 것이다. 이 신전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집트 고대유적 보호에 큰 역할을 한 마리에트의 발굴에 의해서다.

이 신전이 처음 발견된 것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다. 원정대는 에드푸에서 농부들이 신전 주위는 물론 심지어 신전 지붕 위까지 집을 짓고 있음을 확인했다.

에드푸 신전의 전면이다. 탑문 주변의 벽면 부조는 파라오가 호루스 신 앞에서 적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을 묘사하였다.
 에드푸 신전의 전면이다. 탑문 주변의 벽면 부조는 파라오가 호루스 신 앞에서 적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을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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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은 1860년 마리에트가 신전 주변의 모래를 걷어내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신전이 유명한 것은 그 규모와 보존의 정도다.

이 신전의 크기는 이집트에 현존하는 신전 중 최대규모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이어 두 번째이고, 보존의 상태는 신전 전면 위 부분이 약간 손상을 입었을 뿐 원래의 모습 거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신전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전이 모래 속에서 지난 2천 년 이상을 버텨온 덕분이라 생각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망가지지 않는 한 모래는 석조건축물을 자연스럽게 보존한 일등 공신이었을 것이다.

신전의 두 번째 탑문 앞에 서 있는 호루스의 화신인 매상, 이중관을 쓴 매가 참으로 늠름하다.
 신전의 두 번째 탑문 앞에 서 있는 호루스의 화신인 매상, 이중관을 쓴 매가 참으로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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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구성과 축조양식의 상당 부분은 앞에서 본 콤옴보 신전과 거의 유사하다. 건축 시기가 거의 같기 때문일 것이다. 탑문을 들어서기에 앞서 탑문 양쪽으로 큰 부조가 있다. 파라오가 적을 제압한 뒤 호루스 앞에서 계시의 몽둥이로 적을 내리치는 장면이다. 그리고 탑문 입구에는 양쪽에 매의 형상으로 화신한 호루스가 당당하게 서 있다. 매상은 탑문을 통과한 뒤 안뜰에서 첫 번째 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또 보게 되는데, 그것이 훨씬 잘 보존돼 있다. 이것은 왕관을 두 개나 눌러 쓴 것으로 대단히 위압적인 모습이다. 이 시대 장인들의 예술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홀과 두 번째 홀은 소위 다주실로 우람한 돌기둥들이 그득하다. 모든 기둥의 벽면에는 상형문자나 그림이 빼곡히 차 있다. 신전에 들어왔으니 지성소는 반드시 봐야 한다. 이곳 지성소는 다른 신전에 비해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안쪽 벽면에 신상안치소가 있고 그 앞에는 태양 나룻배가 있다. 이 나룻배는 신상이 나들이 할 때 쓴 모양이다. 이 배가 진짜인지 아니면 복제품인지 알 수 없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아쉽게도 복제품이라고 한다.


태그:#세계문명기행, #나일문명기행, #이집트, #오벨리스크, #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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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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