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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47도를 확인할 수 있다.
▲ 구글 어스 부다페스트 부분 북위 47도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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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도상 위치는 북위 43도가 최북단인 함경도 지역인데 필자가 사는 곳은 북위 35도보다 조금 밑쪽이다. 그런데 현재 필자가 위치하고 있는 부다페스트는 북위 47도 지역이니 아침저녁 날씨가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르고 동시에 해지고 해 뜸도 우리나라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저녁 8시가 넘어도 거의 한낮과 차이가 없이 환하고 오후 9시가 넘어서면 약간씩 어두워진다. 오후 10시쯤이 되면 완벽한 밤이 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 나라 사람들은 늦게 먹는 버릇이 생겨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국의 밤거리는 매우 소란스럽고 분주해보였다. 반대로 아침시간이 지나치게 조용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너무 많은 문화적 충격을 받은 탓인지 시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다. 우리나라와 7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여기 시간으로 오후 11시지만 우리 시간으로는 이제 겨우 오후 4시인데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부다페스트 3일째, 어제의 일정은 다뉴브 강 서쪽 언덕(시타델러)을 중심으로 보았다면 오늘은 강 동쪽의 도심지역을 보기로 하고 아침 일찍부터 거리로 나왔다. 이제 교통편도 조금은 익숙해졌고 거리도 많이 낯설지 않다. 강 동쪽을 보기 전에 그래도 어제 보지 못한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로 결정하고 어제 그 버스(호프 온 호프 오브)를 다시 타고 어제의 장소보다 조금 더 언덕 정상 가까이에서 내렸다.

다행히 희미하게 태극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안내방송 중에 한국어가 나온다는 의미이다.
▲ 호프 온 호프 오브 안내책자 다행히 희미하게 태극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안내방송 중에 한국어가 나온다는 의미이다.
ⓒ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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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미

자유의 의미는 지역과 시대, 역사와 문화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는 저 자유의 여신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인지 또는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엔 독일이 헝가리로 침공해 왔고 이 시타델러 언덕 위 요새에 방공포대를 설치했다. 요새의 다른 쪽은 전범수용소로 이용했다. 1944년 소련군이 침공하자 나치 독일은 이 요새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다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소련은 그 기념으로 1947년 시타델러 꼭대기에 높이만 무려 40m에 달하는 소녀의 동상, 이른바 "자유의 여신상"을 세웠다. 이 소녀는 두 팔을 지켜든 채 승리를 뜻하는 종려나무를 펼쳐 들어 보인다. "소련군이 마침내 승리했다"는 징표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월계수 잎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 어떤 의미일까?
▲ 자유의 여신상 그녀가 들고 있는 월계수 잎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 어떤 의미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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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녀가 받쳐 들고 있는 월계수 잎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와 관계있는지 또는 관계없는지는 먼 이국의 여행자가 규명해야 할 몫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이 소련이 물러나고 난 뒤 이 나라에 있었다 한다.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다. 다행이 그대로 두자는 쪽이 우세하여 지금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념을 떠나 단지 조형물로서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 자체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 그대로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표상이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해버린 것이 슬며시 떠올랐다면 나의 생각이 지나친 비약일까?

성이스트반 성당

헝가리를 이루는 주요한 민족은 마자르족이다. 마자르족은 투르크 계열의 오노구르족에서 연원한다. 헝가리라는 이름도 오노구르에서 기원하는데 이 마자르족을 대통일한 사람이 바로 이스트반 왕이다.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스스로 성과 속을 동시에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그 왕을 기념하여 세운 성당이 바로 이스트반 성당이다.

부다에서 페스트를 바라보았을 때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오는 건물이 성 이스트반 대성당이다. 페스트의 랜드 마크라 할 만한 이 성당은 모두 8,5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헝가리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앞서 말한 마차슈(시) 성당의 첨탑과는 대조적인 네오 르네상스의 우아한 청동빛 돔이 있는 건물이다. 

굉장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 성 이시트반 성당 굉장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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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헝가리 밀레니엄의 산물로,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요제프 힐드(József Hildo)와 미클로시 이블(Miklós Ybl)의 공동 설계 작품이다. 본래 1848년 기공식을 가졌으나 연이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51년부터 재개되었다. 또 성당 건축이 한참이었던 1868년 전례 없는 폭풍이 불어 닥치면서 돔을 날려버렸는데 이번엔 전쟁이 아니라 자연재해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야 1905년 대역사(大役事)는 끝났다.

이스트반 성당의 전체 구조는 십자가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십자가 중심에 중앙 돔이 있다. 건물 내부에서 돔까지 높이가 86m, 돔 외부의 십자가까지 높이는 96m인데 이 높이만 따지면 헝가리 국회의사당과 같다. 어쩌면 정치와 종교의 견제심리가 작용했을지도 모를 이 웅장한 건물은 국회의사당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1km 남짓 떨어져 있다.

성당 내부에는 당대의 저명한 헝가리 예술가인 모르 탄(Mór Than), 베르탈란 세케이(Bertalan Székely), 쥴러 벤추르(Gyula Benczúr) 등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벤추르의 성화는 이스트반왕이 헝가리 왕관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이는 곧 이교도였던 마자르인들이 유럽의 일부가 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한 그림이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돔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카로이 로츠(Károly Lotz, 1833~1904)의 작품이다.


화려한 황금의 색채가 성당 안에 가득하고 그 황금빛 색채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조화되어 가히 천국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필자는 알고 있다. 저 돔을 쌓아 올리기까지 흘려야했던 말 없는 백성의 피땀을, 저 천국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날들을 그곳에서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성과 속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분명 성스러움의 추락임에도 교회는 당시 야만족인 마자르족의 포교를 목적으로 그 추락을 인정했고 반면 이스트반 황제는 교회의 신적인 권위를 통해 제국을 지배하고자 하는 서로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것이 바로 그에게 시성을 하고 성(聖)이스트반 이라고 불리게 한 이유가 아닐까?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는 수많은 정치적 야합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것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부다페스트에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최초로 건설한 지하철이 있다. 1896년에 완공된 지하철은 현재 4번째 라인이 거의 완공되어 운행되고 있는데 마침 우리가 잔 숙소 옆의 캘빈역의 역사가 새롭게 지어지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가 보았더니 에스컬레이터가 매우 급하고 길게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매우 놀랐고 오래 된 기관차에 한 번 더 놀랐다.

급경사에 굉장한 스피드, 그리고 길이에 놀라다.
▲ 까마득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급경사에 굉장한 스피드, 그리고 길이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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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마지막 밤은 이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공간에도 그 종교와 관계있는 문화행사가 열리지만 여기 유럽처럼 정기적으로 그리고 특정 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것에 은근히 부러움을 느꼈다.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이 성당에 있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으로 듣는 연주는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웠지만 장소가 성당인지라 자리의 불편함과 여행의 피곤함으로 너무 졸린 탓에 연주회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나왔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천국의 소리인듯했다.
▲ 성당 음악회 티켓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천국의 소리인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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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로 향하는 날

유럽이 통합을 시작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1993년 EEC, 즉 유럽경제공동체를 끝으로 행정적 통합에 들어가기 시작한 유럽은, 그해 유럽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 통합에 들어가 2002년 경제적 통합의 징표인 유로화가 통용됨으로서 하나의 경제적 체제로 탈바꿈 하게 되었다.

2004년 유럽헌법이 통과되었고 현재도 여러 가지 통합작업이 진행중이다. 왜 그들이 하나의 국가가 되고자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유럽대륙을 가보니 거의 대부분이 준평원지역이라 국경을 구획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민족구성조차도 각지에 다양한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경계선, 이를테면 국경으로 묶어야 할 어떤 공통분모가 없어 보였다.

아내의 표정이 싱그럽다.
▲ 부다페스트 켈레티를 떠나며 아내의 표정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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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켈레티역은 오래된 건물 느낌이 물신 풍기는 곳이었다. 유럽통합의 또 하나의 징표인 유레일(전 유럽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철도노선)로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가는 노선을 이용하였는데 체코의 프라하까지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이름 하여 트라이앵글패스 노선을 이용했다.

유레일 트라이앵글 패스
▲ 유레일 패스 유레일 트라이앵글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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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까지 약 3시간, 국경을 넘는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지만 열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조금씩 달라 보였다. 예를 들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가까워지는 헝가리의 변방 풍경이 우리나라 70년대 농촌의 모습처럼 약간은 무기력한 혹은 정돈되지 않는 풍경이었다면 오스트리아 변방 농촌 풍경은 잘 구획된 경지와 곳곳에 세워진 풍력발전기가 있어 조금 더 발전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국경을 지나면서도 그 어떤 검사나 확인절차도 없는 그야말로 통합된 한 나라처럼 서로에게 열려 있는 이 상황을 생각해보니 철통같이 단속하고 서로에게 한 없이 높은 벽을 쌓고 있는 우리의 남북분단이 멀리 이국땅에서도 뼈저린 통증으로 다가온다. 열차는 마침내 오스트리아의 웨스트반호프 역에 도착했다.

저 멀리 풍력 발전기가 보이고 잘 정돈된 느낌이 드는 오스트리아 들판
▲ 열차 창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들판 저 멀리 풍력 발전기가 보이고 잘 정돈된 느낌이 드는 오스트리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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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첫인상

웨스트 반호프역은 비엔나의 서역인데 비엔나로 들어오는 국제선 열차들과 비엔나 시민들의 통근열차가 자주 서는 번잡한 역이었다. 현대식 역사와 시설들을 보며 잠시 전 지나온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켈레티역과 많은 대조를 느낄 수 있었다.

비엔나에는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런 비는 자주 내렸다가 그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사람들은 아주 작은 우산을 늘 가지고 다녀 언제든 비가 오면 우산을 꺼내 들었다. 점심 때를 넘기고 도착해서인지 역 구내 중국음식점에서 간단하게 먹기로 했는데 점심 값은 헝가리보다 많이 비쌌다.

헝가리의 푸근함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좀 더 규격화되고 자본주의화된 느낌이 강렬했다. 하지만 예술의 도시 비엔나가 아닌가? 3일 동안 이 예술의 도시를 꼼꼼히 둘러보겠다는 희망과 또 새로운 곳에 있다는 설렘으로 오스트리아의 첫날을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7월 31일~8월 11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부다에서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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