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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1일자 1면에 '나주 성폭행범' 고아무개씨의 얼굴이라며 공개한 사진이 평범한 시민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피해자 권익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등 파문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파문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진 않습니다. 사안 자체가 워낙 심각한 데다 쉽게 용서가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특히 언론보도의 제1원칙인 당사자 확인이 생략된 오보라는 점에서 <조선일보>가 져야 할 책임은 막중합니다.

<조선일보>의 오보. 2012년 9월1일자 1면
 <조선일보>의 오보. 2012년 9월1일자 1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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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번 오보를 '범죄 상업주의와 언론의 무리한 특종경쟁이 빚은 참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이 아동 성폭행범·살인범과 같은 흉악범 사진을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몇 년 전부터 공개하고 있지만, 그 근저에는 '공익적인 목적' 보다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선정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거지요.

지난 3일자 <한겨레>가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이번 오보 사태를 계기로 피의자 얼굴 공개가 과연 알권리에 해당하는지, 범죄 예방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뤄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얼굴의 비공개가 보도의 절대적인 원칙이 될 수는" 없지만 "무고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흉악범으로 둔갑하는 엄청난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면 재고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흉악범이라도 '그'가 피의자로서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언론의 흉악범 얼굴 공개는 신중을 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번 '나주 성폭행 사건' 언론보도와 관련해 저는 좀 다른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평범한 시민을 흉악범으로 규정한 것 때문에 <조선일보>가 집중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고 있지만, '과연 <조선일보> 오보만 문제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족 두 번 울리는 건 '진보 언론'도 예외 아냐

물론 <조선일보>의 '죄질'이 심각한 건 사실입니다. 단순히(?) 사과문 게재하고 피해자 권익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 표명만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조선일보>의 오보가 심각하다고 해서 '다른 언론'의 문제점이 가려지는 건 아닙니다. 특히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보도태도는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진보·보수 언론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중앙일보> 칼럼. 2012년 9월3일자 2면
 <중앙일보> 칼럼. 2012년 9월3일자 2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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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성폭행 사건'과 관련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중앙일보>가 먼저 제기하고 나선 것도 제가 보기엔 참 아이러니한 사건입니다. 사견입니다만 이런 문제제기는 '진보 언론'에서 먼저 강하게 제기했어야 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중앙일보>는 지난 3일자 2면 이해석 광주총국장의 '현장칼럼'을 통해 피해자와 가족의 인권에 무심한 경찰과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일부를 요약합니다.

"7세 어린이 납치 성폭행 사건의 현장 전남 나주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1일 현장검증 때의 몇 시간을 제외하면, 사건 발생 이후 나흘 동안 경찰관이 배치되기는커녕 그 흔한 폴리스라인조차 없었다. 2일 오후 A양 집 앞에는 취재진은 물론 길 가던 행인들까지 호기심에 유리 문과 창 너머로 안을 기웃거렸다.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사건 발생 첫 날과 둘째 날은 더했다. 어린이의 부모가 병원에 가 있고, 경황이 없어 문단속을 못한 상황에 경찰마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그 결과 집 안의 어지러운 모습 등이 언론을 타고 그대로 전국에 노출됐다. 심지어 A양의 일기장까지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범인 잡는 것만이 경찰의 임무입니까. 피해자 가족 보호는 안중에도 없느냐고요.' 이웃 주민 박아무개(47)씨는 언성을 높였다."

피해아동 집 상세한 약도-일기장까지 공개

"범인의 이동경로를 보도한답시고 항공사진까지 동원한 상세 지도를 그려 넣은" 언론사는 <동아일보>(9월1일자 3면)이고, 방송3사를 비롯해 거의 대다수 언론 또한 피해 아동 집 내부의 어지러운 모습을 여과 없이 내보냈습니다. 피해자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사생활 보호는 없었습니다.

이번 '나주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언론보도는 <조선일보>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 중에서 <경향신문>의 보도태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향신문>은 이른바 한국의 주류언론 중에서 <한겨레>와 더불어 '진보언론'의 양축을 형성하고 있는 곳인데,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 가족에 대한 인권보호는 뒷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향신문> 9월3일자 4면
 <경향신문> 9월3일자 4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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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은 9월1일 토요일자 1면에 성폭행 피해 초등생의 일기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해서 논란을 빚더니, 경찰과 언론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오른 지난 3일자에서도 전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앙일보>가 지난 3일자 지면을 통해 경찰과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경향신문>은 같은 날 4면과 5면에서 피해자 아동의 주택사진과 주변의 구체적인 지명 등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피해 어린이와 가족의 신원이 최대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중앙일보 9월3일자 보도 인용)이지만 <경향신문>은 이같은 원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가족인권은 뒷전인 '진보언론' <경향신문>

물론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언론사는 많습니다. KBS와 MBC는 '언론 자성론'이 제기된 지난 3일 저녁 메인뉴스에서 여전히 피해 아동의 집 내부를 구석구석 보여주는 영상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내고 있더군요. SBS만이 이날 저녁 <8뉴스>에서 자사보도가 지나치게 선정적이진 않았는지 우회적으로 자성하는 '클로징 멘트'를 내보냈을 뿐입니다. 요약합니다.

2012년 9월3일 SBS <8뉴스>
 2012년 9월3일 SBS <8뉴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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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방송의 목적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성폭행 사건 보도의 목적은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방송기자들이 그동안, 특히 지난주에 이런 의무를 수행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는지, 또 반대로 지나친 면은 없었는지 방송의 날을 맞아서 한 번 반성해봤습니다."

'보수언론' <중앙일보>가 성폭행 보도의 선정성을 지적하고 '상업방송' SBS가 앵커멘트를 통해 '언론 자성론'을 제기하는데 '진보언론' <경향신문>에는 자사보도에 대한 자성도 없고 개선의 기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공영방송 KBS와 MBC?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중앙일보> '현장칼럼'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나주 바닥에서 더 이상 못 살게 됐어요. (범인에게) 얘가 당하고, 우리(부모)까지 매장당하고….' A양 아버지의 하소연이다. 그는 '다른 자식도 키워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모든 것(아이 납치 및 성폭행 사건)을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고 지인에게 토로했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간 '수구언론' <조선일보>도 문제지만 피해자 가족에 대한 인권보호는 뒷전인 '진보언론' <경향신문>도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제발 진정하고 이성을 좀 회복합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곰도리의 수다닷컴'(http://pressgom.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나주성폭행, #조선일보, #경향신문, #범죄상업주의, #피해자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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