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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노인복지관을 중심으로 7년 째 진행하고 있는 죽음준비교육 프로그램 중에는 자기의 별명, 가장 잘 하는 일,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간단하게 글로 적어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단순한 자기소개로 보이지만 사실은 맨 나중에 붙는 질문인 '가장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죽음의 기억'을 나누기 위한 서론 같은 것이다.

'가장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죽음의 기억'으로는 부모님의 임종 모습이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송함, 배우자와의 사별이 아무래도 많은 편이고, 한 반 20명 중에서 1~2명 정도는 자녀의 죽음을 말씀하신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해서, 혹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입에 올리고 싶지않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경우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좀 더 많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프고 아프다. 나이도 이유도 상관 없이 자녀의 죽음은 그저 아프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괜찮다고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 붉어지는 눈가는 숨길 수 없다. 그런 어르신들을 보며 제 아무리 죽음준비교육 전문 강사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꽃 같은 청춘에 떠난 조카 생각이 나 가슴이 아프고 먹먹하다.

개막을 기다리며 현수막 앞에서...
▲ 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개막을 기다리며 현수막 앞에서...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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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어머니라고 다르지 않다. 어느 날 아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아들의 죽음을 수굿하게 받아들일 어미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7년의 세월, 겉사람은 늙었을지라도 가슴 속 상처는 여전히 생생해 피가 멈추지 않는다.

'세상 떠난 오빠 생각만 하면서 우리가 살아있는 걸 미안하게 만든다'고 항의하는 딸, 결혼식에 가면 불편해 하는 친척과 친구들, 빈집에 들어설 때 무심코 부르게 되는 아들의 이름, 아닌 척 안 아픈 척 씩씩한 척 살아내야 했던 시간은 어머니의 가슴을 헤집고 헤집어서 이제 더는 닳아 없어질 아무 것도 없게 만든다.

아들보다 앞서간 남편이 부럽고, 사람보다 오래 살아 남아 제 자리를 지키는 물건들의 질긴 목숨이 밉다. 텅빈 삶이서일까, 요즘은 건망증도 심해서 제삿날도 잊어버리고 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남은 세월은 또 얼마일까.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손에 이끌려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간병하는 동창생을 만나게 되고, 병들고 아픈 몸에 성치 않은 정신이지만 서로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그들 모자를 보며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토해낸다. 살아있음이 부러워서.

세월도 지우지 못할 상처지만 세월의 힘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살아낼 수 없는 인간. 아들의 죽음 이후로 7년 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어머니, 그 사이에 눈물 쏟을 일이 없었을까. 기막혀 울 수 조차 없었던, 그 먹먹한 가슴을 뚫어준 것은 병들었지만 그래도 살아있기에 서로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동창생 모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세월도 힘을 보탰을 것이다.

자녀 앞세운 어르신들의 사연을 들으며 가슴 아파하는 내게 그분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결 같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지..." 

연극은 이 어머니가 손윗동서와 전화 통화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1인극이다. 자식 잃은 어머니가 되어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대, 칠십을 바라보는 배우 손숙씨는 그 작고 여윈 몸으로 객석에 앉은 모두를 빨아들인다. 비록 눈물이 흘러 넘치지는 않아도 우리들은 이미 그 슬픔과 애통의 강물에 온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극 속 인물과 하나로 살다보면 혹시라도 자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우울을 일상에서도 겪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멋진 배우를 곁에서 오래도록 보고 싶은 욕심이기도 하지만, 자식 잃은 세상 모든 부모와 함께 온몸으로 울어주려면 건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원작 : 박완서, 연출 : 유승희, 출연 : 손숙) ~ 9/23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태그:#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손숙, #박완서, #죽음,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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