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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찾아가고 있는 곳은 운주사. 광주까지 따분한 고속길이 이어지다 화순에 접어들면 땅도 바람도 모두 화순해진다. 풍속이 소박하고 후하여 화순이라 했던가? 운주사로 가는 길은 평온하고 부드럽다. 남도의 꽃, 붉은 배롱나무 가로수에 이끌려 운주사에 도착한건 늦은 오후다. 운주사 칠성바위의 별자리 시각과 맞추느라 게으름을 피우긴 했다.

여름철 남도 어디를 가든 붉은 배롱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 배롱나무 길 여름철 남도 어디를 가든 붉은 배롱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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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절이라하지만 배를 부린다는 운주사(雲舟寺)로 그냥 쓰기도 한다. 정식 명칭은 운주사(雲住寺)다. 자료에는 운주사(雲舟寺)는 등장하지 않는다. 발굴한 암막새 기와에도, <동국여지승람>이나 <능주목지>에도 모두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폐사지가 그렇듯 운주사의 사력(寺歷)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발굴조사와 자료에 의하면 10-11세기에 만들어져 연산군 때 중창되고 임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래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호리호리한 탑과 표정 잃고 널브러져 있는 불상들, 기학학적인 무늬, 둥근 탑 등 모두 다른 절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다.

운주사 석탑들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석탑들이 아니다. 우선 모양에서 호리호리한 것에서 둥글고 동그란 것까지 다양하다. 거기에 새긴 무늬도 마름모 모양(◇), 교차문(X), 쌍교차문(XX), 수직문(∥),브이(V)모양까지 여러 가지다. 모두 정형적인 모양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들이다.

자연석 지대석, 마름모 모양(◇)과 V자 무늬, 호리호리한 몸 등은 우리의 눈길을 잡는다
▲ 구층석탑 자연석 지대석, 마름모 모양(◇)과 V자 무늬, 호리호리한 몸 등은 우리의 눈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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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 들어서면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9층석탑이 제일 먼저 반긴다. 절을 알리는 당간지주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높게 치솟아있다. 자연 바위를 지대석으로 삼았고 몸돌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뒤로 7층석탑 두기가 잘 다듬은 기단석위에 서있는데 의도적으로 이지점을 지정하여 세운 듯하다.

 쌍교차문과 교차문이 독특하다
▲ 교차문칠층석탑 쌍교차문과 교차문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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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언덕 바위위에도 이런 홀쭉한 탑이 서 있다. 다듬지 않은 돌이 뭉쳐 탑이 된 일명 '거지탑'이 운주사 초입언덕에 있고, 그 다음 언덕에 세로줄무늬를 하여 더욱 늘씬하게 보이는 수직문칠층석탑이 바위를 기단삼아 시원하게 서 있다.

세로줄무늬를 하고 동쪽 바위위에 시원하게 서있다
▲ 수직문칠층석탑 세로줄무늬를 하고 동쪽 바위위에 시원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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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호리호리한 탑은 동쪽 언덕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쪽 거북바위위에도 두기의 석탑이 서있다. 가파른 거북바위 위에 참 어렵게도 세웠다. 여기에 꼭 세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이런 유형의 탑은 칠성바위 곁에도 있다.

가파른 거북바위 위에 서있어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할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 거북바위칠층석탑 가파른 거북바위 위에 서있어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할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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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원형석탑이 발길을 붙잡는다. 호떡 같이 보인다하여 '호떡탑'이라 불린다. 지붕돌과 몸돌 모두 원형으로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듯하다. 석조불감과 함께 운주사 중심부를 형성한다. 탑과 불상이 많은 점 때문에 운주사는 경주 남산을 떠올리게 하는데 생김새로는 원형석탑은 경주 남산에 있는 용장사터 석불좌상을, 석조불감은 경주 부처골 감실석불좌상을 생각나게 한다. 

경주남산의 용장사터 석불좌상과 부처골 감실석불좌상을 생각나게 한다
▲ 원형다층석탑과 석조불감 경주남산의 용장사터 석불좌상과 부처골 감실석불좌상을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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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천불산 정수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는 실패모양의 명당탑과 미륵전(복원중) 아래의 원형구형탑은 더더욱 파격적이다. 정형화에서 벗어나려는 고려 석공들의 자유분방함과 시루떡처럼 결 따라 잘 쪼개지는 이지역의 바위의 성질이 결합하여 나타난 산물이다.

불상들은 토속적이다 못해 더더욱 파격적이다. 바위 밑, 눈이나 비를 피할 곳이면 여지없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홀로 혹은 어깨를 기댄 채 서있거나 누워있거나 앉아있다. 어찌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부부 같기도 하고 아들 딸 같기도 하다.

눈비를 피할 곳이면 어디든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불상은 한 가족을 보는 것 같다. 그냥 마구잡이로 세운 것이 아니라 바위의 결에 맞추어 세웠다
▲ 운주사 입구의 불상들 눈비를 피할 곳이면 어디든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불상은 한 가족을 보는 것 같다. 그냥 마구잡이로 세운 것이 아니라 바위의 결에 맞추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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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몸이 성한 불상은 드물다. 작가 황석영의 표현대로 '쓰러진 민병들의 시체'처럼 몸은 없어지고 얼굴만 남아 있는 불상, 코가 깨지고 한 팔과 한 다리를 잃은 불상들은 아무런 대꾸도 절규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좋은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양 손이 성한 불상은 두 손을 모은 채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 불상을 두고 당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이라 생각한다.

상처 입은 불상들은 ‘쓰러진 민병들의 시체’처럼 보인다
▲ 상처 입은 불상들 상처 입은 불상들은 ‘쓰러진 민병들의 시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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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공간을 차지하는 불상은 그런대로 얼굴과 손모양이 온전하고 정형화된 불상이다.  석조불감쌍배불좌상은 팔작지붕 돌 집안에 석불 두기가 서로 등을 맞댄 채 남과 북을 향하고 있다. 돌부처는 개성 있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운주사에서는 나름 정형성을 엿볼 수 있는 돌부처다. 다만 두기의 불상이 한 집안에서 등을 맞대고 있는 점은 지방화된 토속양식으로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운주사 뒷산 공사바위에 올라가 본다. 운주사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인 모양이 배와 같다. 계곡이 갑판이고 운주사 맨 앞의 구층석탑이 돛대고 운주사 중심부에 자리한 석조불감이 선실 같기도 하다.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불상은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것 같다. 배는 누가 부릴까? 운주사 후미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이 아닐까?

운주사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향해 항해하는 배와 같다
▲ 운주사 전경 운주사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향해 항해하는 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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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향한다. 천탑을 세워 공덕을 빌고 보다 많은 중생을 태우기 위해 천불을 조각했는지 모른다. 운주사를 배로 상상하는 건 터무니없지는 않다. 운주사의 창건설에 도선국사의 풍수비보설이 있다. 한반도가 배의 형상을 하고 있고 이 땅의 정기가 일본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도선국사가 활동한 시기와 이절의 창건 연대가 맞지 않으나 민간에 퍼진 풍수설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도선국사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풍수설은 이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제 운주사 서쪽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와불로 향할 차례다. 와불은 누워있는 부처를 말하지만 운주사 와불은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못한 불이다. 와불은 세분이었다. 한 와불은 홀연히 일어나 와불 절벽 밑에서 머슴부처가 되었다.

와불 한구석에서 머슴부처를 떼 낸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지역의 바위가 잘 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현명한 석공은 이 두 와불도 떼어 내어 일으켜 세우려고 했을 게다. 그러나 이 와불은 세우지 못했다. 아직도 와불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뀌어 천한 백성이 주인 된다는 설화만을 남긴 채 누워있다. 

누워있는 불상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불상이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참세상이 온다는 설화만 남긴 채 아직도 누워있다
▲ 와불 누워있는 불상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불상이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참세상이 온다는 설화만 남긴 채 아직도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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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여운을 남긴 채 밑에 칠성바위로 발길을 옮겨본다. 운주사의 유물로 가장 과학적이고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칠성바위와 관련한 것이다. 일곱 개의 원반바위는 한여름 초저녁 북두칠성자리를, 위에 있는 와불은 북극성을 나타낸 것이며 바위크기는 북두칠성의 밝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칠성바위는 칠성신앙을 불교에 수용한 예로 보이는데 산신각, 칠성각, 북두각의 전각을 지었어도 이처럼 북두칠성을 직접 표현한 것은 전례가 없다. 이 칠성바위와 와불이 운주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닌지 모르겠다.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은 운주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 칠성바위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은 운주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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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와 관련된 얘기는 많고도 많다. 모두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한다. 불상의 모습에서 천민의 신분해방운동의 해방구로 추정하기도 하고 탑 모양이나 불상의 손 모양, 쌍배불좌상이 있는 석조불감 등으로 밀교적 색채를 논하기도 한다. 또 탑의 위치를 별자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토속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지방 토착세력이 기존의 정형화된 양식에서 탈피하여 그 세력이 지향하는 색채를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다. 기존의 불상과 탑의 양식을 따를 필요도 없다. 토속적이기도 하고 이국적이며 이색적일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 창조적이기도 하다. 탑에 새긴 무늬나 불상의 옷 무늬, 얼굴모양 모두 파격적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

남한강변의 폐사지 중에 법상종의 세력이 강하게 미친 법천사는 고달사, 흥법사, 거돈사 등 선종의 영향을 받은 절과는 완전히 다른 지광국사현묘탑이라는 부도탑을 만들었다. 파격적이면서 이국적이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파주 용미리석불, 안동 제비원 석불의 얼굴모양도 파격적이다. 모두 지방화된 토속적인 양식이거나 강력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이나 탑이다.

운주사의 탑과 불상, 바위에는 전설과 설화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운주사와 관련한 얘기들은 무시할 것도 맹신할 것도 없다. 불상과 탑을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되지 않을까? 산을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와불을 떠올려본다.

와불을 세우는 것은 모든 이들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와불을 세우려는 의지, 믿음이 우리의 가슴에 알알이 박힐 때 와불은 일어나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일부러 어지러운 세상에 민중의 힘과 희망을 남겨놓기 위해 1000년전 이 와불을 세우지 않고 남겨놓은 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운주사, #와불, #칠성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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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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