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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당시 장도영 중장(왼쪽)과 박정희 소장.
 5.16 쿠데타 당시 장도영 중장(왼쪽)과 박정희 소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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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밀려난 이후 미국에서 거주하던 장도영씨가 3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장도영씨는 군사 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에 의해 최고의 권한을  가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옹립되었으나, 1963년 국가반란죄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후 형집행 면제로 풀려난 장씨는 이후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다.

민주당 정권 아래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씨는 당시 쿠데타가 일어나자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본인은 이를 강하게 부인해 왔다. 장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당시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 알았고, 방첩대의 거짓 보고로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지난 2001년 자전적 회고록 <망향> 출판기념회에서 "쿠데타를 사전에 알고 방조했다는 주장은 쿠데타 주체세력의 간계이며 모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것도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을 단죄한 '반혁명사건'에 대해서도 "나의 조속한 민정 복귀 방침과 그들(박정희를 포함한 주체세력)의 장기집권 획책 간의 충돌이 결국 '장도영 반혁명사건'이라는 터무니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만들었다, 반혁명 사건은 날조된 연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숙청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다 지난 일이며, 더 이상 원망도 회한도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장씨는 30여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6·25 직후 처형된 보도연맹사건과 관련해서는 "명령계통을 알지 못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장씨는 보도연맹사건을 "혼란한 해방공간과 전란의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이와 관련한 현지 언론의 인터뷰를 일체 거절해 왔다.    

장씨는 1963년 도미 후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위스콘신 대학교와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부인 백형숙씨와 함께 노후를 보내 왔다. 장씨는 수 년 전부터 파킨슨씨병 등으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5.16 쿠테타, #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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