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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지의 특징이 잘 들어나 있다.
▲ 양동마을 전경 구릉지의 특징이 잘 들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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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동마을은 우리나라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한 전통민속마을 6곳(순천 낙안읍성, 안동 하회, 제주 성읍, 경주 양동, 강원 고성 왕곡, 아산 외암) 중에 한 곳이다. 2010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은 곳으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후손들이 500여 년의 옛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유서 깊은 민속마을이다.

하늘에서 본 양동마을
▲ 위성사진 하늘에서 본 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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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이 다른 민속마을과 비교해 우월적인 특징을 들라면 다음 2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언덕배기가 있는 구릉지 지형과 그 지형과 짝을 맞춘 전통가옥들의 아름다운 어울림이다. 설창산 문장봉에서 뻗어 내린 勿(물)자 모양의 골짜기 지세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네 줄기의 골짜기는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으로 세분된다.

마을 언덕배기에 해당되는 곳으로 넓은 풀밭을 볼 수 있다.
▲ 수졸당 뒷동산 마을 언덕배기에 해당되는 곳으로 넓은 풀밭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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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평지에 위치한 다른 민속마을과 달리 양동마을은 야트막한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의 적소에 들어선 집들이 주변 지세와 자연스러운 조화가 이 마을의 강점이다. 같은 집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배경이 되는 산세가 다름에 따라 보는 이의 느낌도 달라진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 성종∼중종 때의 문신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연고가 있는 집 <보물 제442호>
▲ 관가정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 성종∼중종 때의 문신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연고가 있는 집 <보물 제4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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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남아 있는 옛 건물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고택들과 그 자녀들을 교육시킨 서당 건물들이 거의 원형의 손상 없이 온존되고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3대 건축물[무첨당(제411호), 향단(제412호), 관가정(제442호)]는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인 1540년에 건립,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6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보물 제412호>]
▲ 향단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인 1540년에 건립,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6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보물 제4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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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안강평야를 바라다볼 수 있는 고지대에는 사대부 저택이 자리 잡고 상민의 가옥들은 저지대에 모여 있도록 가옥배치가 되어있는 것도 다른 민속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외형적인 가치(고건축물과 자연환경)는 높은데, 그에 걸맞은 내면적 가치(손중돈, 이언적의 학문과 삶의 가치)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신상구(양동문화연구소 부소장)씨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양동마을의 공간과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하회마을이 별신굿, 탈놀이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 측면에 관심을 기우려 명성의 상승효과를 얻듯이, 양동마을도 양동마을만이 지닌 전통가치를 재현해 낼 수 있는 전통의례(성년례) 등과 같은 콘텐츠를 계발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조선시대 성리학자.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 건축물, 조선 중기에 세운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411호>]
▲ 무첨당 [회재 이언적(조선시대 성리학자.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 건축물, 조선 중기에 세운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4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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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지라는 자연조건이 꾸불꾸불한 길과 높고 낮은 고개를 만들어, 평지에서 만나는 단조로움을 벗어난 역동성 있는 입체적 마을로 탐방객을 맞는다. 그 위에 고택과 정자가 적소마다 세워져서 여러 폭의 동양화를 한꺼번에 보는 풍성함을 갖게 한다. 신상구씨 말처럼 양동마을은 완벽에 가까운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는데, 그기에 걸맞은 소프트웨어 즉 콘텐츠가 하루 빨리 계발되기를 빌어본다.

양동마을 탐방길은 6코스가 있다.
▲ 탐방코스 양동마을 탐방길은 6코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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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코스별로 탐방안내하고 있다.
▲ 탐방안내도 6코스별로 탐방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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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탐방코스는 여섯 갈래로 나눠지는데, 아래 안내도를 보고 답사계획을 미리 짜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4코스 탐방 길에서 3코스 쪽으로 좌회전해서 올라가다가 아담한 초가 앞에 서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이 집이 할머니 집이세요?"
"그래요. 어디서 오셨어요?"
"부산서 왔습니다."

인사말이 오고간 뒤 묻지도 않은 말을 할머니는 푸념하듯 낯선 탐방객에게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들 딸 여기서 잘 키워 시집 장가를 다 보냈는데, 소위 출세(?)해서 하나는 외국 가서 살고 있고, 둘은 서울에서 잘 산다. 사는 거 걱정 없다. 그런데 손자들이 보고 싶단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지들이 자식을 시집 장가를 보내봐야 부모 심정을 알 거야."

타지에 살고 있는 피붙이가 그립다.
▲ 양동마을 할머니 타지에 살고 있는 피붙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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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넘어 장미가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옆집, 초가 삽짝문 주위에는 봄에 꽃씨를 뿌려 7월에 찾아온 낯선 탐방객을 감동하게 한 집주인은 누구일까? 집은 비어 있으나 토담 밑에 피어나는 붉은 접시꽃은 탐방객을 온몸으로 반기고 있는 듯하다.

접시꽃 등이 토담따라 피어 있다.
▲ 초가 접시꽃 등이 토담따라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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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양동마을 고향을 지키고 있는 부모를 즐거운 마음으로 자주 찾아뵙게 하는 효심과 관련된 콘텐츠를 발굴하면 어떨까? 아니면 양동마을의 내면적인 가치를 꽃과 나무로 승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을까? 손소 선생이 세조 2년(1456)에 집을 새로 짓고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는 향나무(수령 500년)가 손씨 종가의 뜰에 우람하게 서 있다.

수령 500년된 월성 손씨 종가에 뜰에 서 있는 향나무
▲ 향나무 수령 500년된 월성 손씨 종가에 뜰에 서 있는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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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끼고 세워진 돌담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의 언덕배기에 해당하는 물봉정상에 올라선다.

널따란 안강평야가 눈앞에 펼쳐지고, 아래로 눈을 돌리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무첨당, 향단, 관가정)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문화재(근암고택, 두곡고택, 사호당고택, 상춘헌고택, 동강서원, 경산서당, 강학당, 낙선당, 무첨당, 서백당, 수졸당, 대성헌, 내곡정, 동호정, 설천정, 수운정, 심수정, 안락정, 양졸정, 영귀정, 육위정, 이향정)이 나무 숲에 싸여 고즈넉이 엎드려 있다.

곡선으로 뻗어나간 기와담의 아름다움
▲ 기와담 곡선으로 뻗어나간 기와담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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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약 150여 세대(2011년 통계)가 살고 있는 곳으로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의 후손들이 상호 통혼으로 인척관계를 맺어 사이좋게 살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거주가옥의 형태는 한식 기와집이 119채로 다수를 차지하며, 초가 79채, 양기와 73채, 스레트 121채, 기타 10채(2006년 통계)로 이루어져 있다.


태그:#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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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난 해: 1942년. 2. 최종학력: 교육대학원 교육심리 전공[교육학 석사]. 3. 최종이력: 고등학교 교감 명퇴. 4. 현재 하는 일: '온천세상' blog.naver.com/uje3 (온천사이트) 운영. 5. 저서: 1권[노을 속의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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