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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과 APEC 정상회담이 열릴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다리건설현장
▲ 블라디보스톡의 내륙과 APEC정상회담이 열릴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다리건설 현장. 블라디보스톡과 APEC 정상회담이 열릴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다리건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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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TV에서 까레이스키, 최씨, 김씨 등의 한국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러시아 연해주라는 곳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민족이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불리고,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이라 하는가 보다 했다. 그런 고려인들의 삶에 다가갈 기회가 생겼다. 동북아평화기금의 김현동 이사장을 만나면서 그곳에 가서 그들을 만나 보고 싶다는 의지로 바뀌었다.

비상금 탁 털어서 마련한 경비로 무작정 배를 탔다. 러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도, 고려인에 대한 정보도 없이 몸으로 부딪혀보자는 생각에서다.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는 하루 하고도 2시간이 더 걸렸다. 호수처럼 잔잔한 밤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가는 배 안에서, 농사일을 하는 모 종단 사람들로부터 밤 새워 연해주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러시아의 최남단항 블라디보스톡

블라디(vladi : 정복하다)+보스톡(vostok : 동쪽)이라는 지명 그대로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 7월 2일 러시아 극동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도시로, 1873년에는 러시아의 태평양 쪽 주요 항구가 되었고 러시아극동함대사령부가 있는 러시아 극동지방의 중심지다.

또한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잇는 최장의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착역이 있고 올해 9월 이곳 루스키섬에서는 APEC정상회담이 열린다. 내륙과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최고 긴 다리가 놓이고, 호텔신축 도로건설 등 각종 공사가 한창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묵을 현대호텔도 리모델링이 완료되었단다. 항구에는 한국에서 온 각종 중장비가 내륙으로 옮겨질 준비를 하고 있다.

관광이 목적이 아니다 보니 마중 나온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을 둘러보고 한국에서 일하러온 건설노동자들과 짧은 만남을 가졌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6인승 트럭. 짐도 옮기고 사람도 태우고 다니기 유용하다. 도심을 벗어난 차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 가운데를 달리고 또 달렸다.
새마을로라는 한글 도로표지판.
▲ 우정마을 주택가 도로 새마을로라는 한글 도로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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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반 만에 도착한 우스리스크는 분명 낮선 나라 낮선 도시다. 마트의 물건들은 육류가 대부분이고 훈제연어와 정어리절임, 벽면 한쪽을 차지한 엄청난 양의 보드카. 숙소에 도착하니 비포장 도로가에 자작나무 가로수가 서 있고 일층짜리 빨간벽돌집이 늘어선 곳. 집 옆에는 비닐하우스와 헛간, 그리고 닭장이 있는 내 어릴적 살던 시골마을과 똑같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고추와 호박 묘종이 자라고, 노란 민들레가 들판에 가득 피어 있는 곳. 한국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곳이 연해주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고려인과의 첫 만남, 그리고 현지 사업을 총괄하는 니나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고, 남편과 함께 수박 장사를 하러 연해주 곳곳을 다녔다고 한다. 수박을 차에 싣고 남편은 마이크를 잡고 "싱싱한 수박이 왔어요"를 외쳤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말로. 교사로 퇴임한 후 고려인정착지원 사업과 인연이 되어 러시아 지방 정부를 상대로 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현지 음식과 보드카로 간단한 환영식 겸 신고식(?)을 한 다음 날 하수관 보수 공사가 시작됐다. 겨울 동안 얼어 있던 땅이 녹으면서 하수도가 잘못됐는지 냄새가 난단다.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 날씨 탓에 2미터까지 땅이 얼었다 녹으면서 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장정이 남들 일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삽을 들고 땅을 파헤치고 하수관을 찾았다. 집주변의 땅을 파고, 고인 물을 퍼내고, 자재상에 가서 파이프를 사고. 봄날 건조한 바람에 집 바닥이 마르기를 기다려 일주일 만에 뒷마무리를 했다.

마을 이장일을 맡아서보고 있으며, 목수로 일한다.
▲ 고향마을 최리키타 이장님집 마을 이장일을 맡아서보고 있으며, 목수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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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콩 경작지와 대순종단의 농장 방문

동북아평화기금은 한인들의 정착지원을 위해 콩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의 콩을 가져다가 잡초가 무성한 밭을 일구고, 수확한 콩으로 메주와 청국장을 만드는 사업. 수확량은 많지만 480%의 관세 탓에 수출하지 못하는 콩을 가공하기로 한 것이다.

겨울철 일거리가 없는 고려인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식. 가마솥을 걸고, 장작을 마련하고, 메주 건조장을 만들어서 고려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고려인들은 러시아에서 대학을 나와야 받게 되는 한 달 월급, 우리 돈 80만 원 상당의 급여가 지급되었다.

현지에서 가공된 메주와 청국장, 된장은 까다로운 유기농 인증, 수출 절차, 식품위생 검열을 거쳐 동해항에 도착하고, 예약된 소비자들에게 전해진다.

참외와 수박밭 옆 공터에 감자를 심는다. 여행자도 일꾼으로 참여해 함께 농사일을 한다.
▲ 감자심기 참외와 수박밭 옆 공터에 감자를 심는다. 여행자도 일꾼으로 참여해 함께 농사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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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땅은 보통 100ha 단위, 올해에는 500ha를 심는다고 한다. 러시아인 농장장을 두고 거대한 트렉터로 며칠을 갈고 또 갈아서 풀이 죽은 다음에 콩을 심는 방식이다. 약을 치지 않고 풀을 갈아 엎고 그것을 양분으로 이용하고, 다음 해에는 다른 곳에 파종하는 윤작방식이기에 유기농이 가능하다.

대순종단의 아그로 상생농장은 거대한 기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짧은 일정에 전부를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활용하는 장비만 해도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다. 농장내에 소방차를 준비해 둘 정도로 규모가 크고, 각 농장에서 필요한 종자와 비료를 산더미 처럼 쌓아 놓고 농사일을 한다.

현지 법인장의 안내로 둘러본 벼농사 예정지는, 강원도 촌놈의 표현으로는 경포 앞바다만큼 컸다. 100ha가 기본관리규모다. 수로를 따라 펼쳐진 제방가에는 중국인들이 움막을 짓고 논을 관리한다. 논을 갈고 난 뒤 비닐과 천막을 씌워 볍씨의 음을 틔워서 기계로 파종한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넓고 큰 땅을 가졌지만 해외에서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금융적 지원을 하고 있다.

농사일을 하는 중국인들은 논 주변에 소규모로 모여 수확철까지 생활한다. 이들은 밤새워서도 일하고, 사람이 직접 너른 들판의 잡초를 뽑는 것이 기계를 사용하고 약을 뿌리는 것보다 효율성이 높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해전술이다. 아그로 상생 측이 중장비를 지원하면 이들은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협력한다. 볍씨종자를 덤프트럭으로 실어다 논 광경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연해주의 고려인들

경희대 해외봉사단은 5년째 연해주를 방문해 고려인들의 정착사업을 돕고 있다. 자원봉사단 각자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고, 민족의 슬픈 역사와 항일운동을 보듬는다. 또 '고도원의 아침편지' 회원들도 연해주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다.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하고, 항일운동의 역사, 내륙으로 가에 이주당한과정,그리고 새로운 희밍을 찾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 고려인이주140주년기념관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하고, 항일운동의 역사, 내륙으로 가에 이주당한과정,그리고 새로운 희밍을 찾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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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에 고려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역사 속에 기록된 기사흉년 때인 1869년이다. 음력 7월 강풍을 동반한 폭우로 흉년이 들어 함경도 지방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때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이들이 미국 상선의 표류한 배의 물건을 나누어 가진 뒤 관의 탄압을 우려한 경흥읍민 96가구는 죽음을 각오한 탈출을 결행, 음력 11월 두만강을 건너 이미 형성되어 있던 연해주 한인촌 지신허로 몰려갔다.

러시아 측 자료에 따르면 1869년 11월과 12월 사이에 4500명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한다. 이들은 쇄국의 법이 엄한 조선에 돌아가면 죽게 될 거라며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며 송환을 거부했고, 러시아도 새롭게 얻은 빈 땅을 일굴 노동력이 필요해 결국 이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고려인 정착지를 확대시켜 유민들을 연해주 곳곳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함경도 일대뿐만이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연해주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든다. 이상설, 안중근, 신채호, 홍범도 등 독립운동사의 내로라하는 거목들은 거의 모두 연해주 신한촌에 와 국권회복을 위한 필사의 결의를 다진다.

세계에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수많은 의병과 대한광복군, 독립군을 두만강 넘어 조선으로 보내고 상해 임시정부보다 앞서는 최초의 임시정부 국민의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조선과 연해주에 맞닿은 두만강 일대를 독립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들은 한글 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우고 자치기관과 민족운동단체를 조직해 한인사회의 민족의식화를 촉진함으로써 연해주 지역을 명실상부한 대륙 한인사의 중심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최까자.묵다바르가 열심히 가꾸는 하우스 농사. 여행자는 이곳에서 밭을 갈고 풀을 뽑고, 무우씨를 파종했다.하우스 농사를 담당하는 이는 최까짜와 묵다바르 아주머니. 최까짜는  최니키타 목수아저씨의 누나로 농사일이 즐겁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때 부모님이 농사일로 자신을 키웠고 부모님에게서 농사일을 배웠다고 한다. 점심시간외에는 잠시도 쉬지않고 일한다. 무다바르는 고려인에게 시집 온 러시아인이다.
▲ 하우스 농사 최까자.묵다바르가 열심히 가꾸는 하우스 농사. 여행자는 이곳에서 밭을 갈고 풀을 뽑고, 무우씨를 파종했다.하우스 농사를 담당하는 이는 최까짜와 묵다바르 아주머니. 최까짜는 최니키타 목수아저씨의 누나로 농사일이 즐겁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때 부모님이 농사일로 자신을 키웠고 부모님에게서 농사일을 배웠다고 한다. 점심시간외에는 잠시도 쉬지않고 일한다. 무다바르는 고려인에게 시집 온 러시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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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임시정부였던 국민회의 회의실도 세월의 때가 앉은 그대로이고, 안중근 의사의 배후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참변 때 일제에 의해 처형될 때까지 살았던 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해 통합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던 문창범 선생 집도 있다.

나라 잃은 섫움, 고려인의 슬픈 이야기

폭정과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이들을 시작으로 나라를 빼앗긴 슬픈 민족은 일제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민족적 차별정책을 견디며 연해주에 뿌리를 내렸다.

농토를 일구고, 민족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많은 이들이 스탈린 통치시절 일제의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강제 이주되거나 감옥에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다음은 당시의 처참하고도 슬픈 기록으로 자주 인용되는 글이다.

수일내에 짐을 싸라는 명령으로 우리는 정착지도 모르고 화물을 싣는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수송열차 행렬은 다시 옮겨져 가족들은 흩어지고 이주도중 수백명이 체포 또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거대한 비극의 수송열차는 아시아대륙의 한쪽 끝으로부터 다른 끝까지 한달여를 갔습니다. 행선지도 없고 탑승원도 누구인지 모르고 수송열차의 번호도 없는 유령 열차와 같았지요.

열차가 석탄을 싣기 위해 멈추어 있는 동안 사람들은 물을 끓여 밥을 해먹었거나 볼일을 보고, 갑작스럽게 기차가 떠나는 바람에 또 몇몇 사람들은 기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수송도중 번진 홍역은 60%가 넘는 어린 아이들이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1938년 봄까지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한인 중 60%는 다시 재이주 당했습니다. 작게는 도보 20km 길게는 철도로 4,000km 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영구 정착지로 이동한 것이지요.

식량은 떨어지고 겨울의 거센 바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을 끝없이 땅을 갈고 해가 뜨면 벌판으로 나와 일을 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식구들이 한사람씩 죽어나갔습니다. 온 동네가 사람들의 통곡으로 가득했지만 한인들은 일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의료방조가 전혀 없다보니 갑자기 바뀌운 기후와 풍토, 물로 하여 로인들과 어린애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하루밤 사이에 한 부락에서 6-7명이 사망하였읍니다. 그 때에 한 3년이 지나니 마을에 어린애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저도 그때 아이를 잃었습니다. - <레닌기치신문> 1990. 6. 13.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구 소련의 붕괴로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살던 고려인들은 피땀 흘려 일구어 놓은 농토와 집, 가축을 두고 또 다시 유랑길에 올라야 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심은 삶의 터젼을 버리고 떠나라고 강력한 요구였다. 1993년 러시아가 고려인 강제이주를 사죄하고 숙청한 고려인 지식인들의 명예회복을 결의하면서 고려인들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올해 콩을 심을 농지를 둘러보고 있다. 윤작으로 농약과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재배다.
▲ 콩을 심을 농지 올해 콩을 심을 농지를 둘러보고 있다. 윤작으로 농약과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재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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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대는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던 중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연해주로 '귀향'한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고난은 경제적 궁핍이었다. 같은 핏줄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평화연대가 생각해낸 게 바로 그들의 노동력과 콩을 모국과 연결하는 사업이었고 그 결과물이 '바리의 꿈'이다.

'바리의 꿈'은 연해주의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나는 콩으로 고려인들이 직접 담근 청국장과 이를 활용해 만든 제품들을 파는 사회적 기업이다. 연해주의 맑은 공기, 농약과 비료를 친 지 10년이 넘은 밭에서 잡초와 함께 건강하게 자란 콩을 주 재료로 한다. 여기에다가 북위 45도 이상 한대지방의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항암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차가버섯 가루를 넣어 건강기능성이 강화되었다.

그래서 '바리의 꿈'은 차가버섯 청국장 제품을 팔아서 나는 수익을 생산자인 연해주 고려인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현지에서 회사가 빌린 밭에서 콩을 기르면 임금을 주고, 다시 고려인들이 그 콩으로 청국장을 만들면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우수리스크 지역 고려인 50여 농가가 이렇게 '바리의 꿈'과 함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커다란 가마소에 장작불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든다.
▲ 메주공장 내부 커다란 가마소에 장작불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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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화 중엔 '바리데기' 이야기가 있다. 이씨주상금 대왕은 아들을 낳고자 치성을 드렸지만 7번째에도 딸을 낳았다. 대왕 부부는 아이를 옥함에 담아 강물에 버렸지만 바리공덕 할아비와 할미에게 구출되어 자란 바리데기는 열다섯 살 무렵, 친아버지인 대왕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천 서역국으로 불사약을 구하러 떠났다. 저승과 신선세계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바리데기는 약을 구해 대왕을 살렸다는 내용이다.

사회적기업 '바리의 꿈'은 신화처럼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이 바리데기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과 2세들에게 농업 기반을 조성하고 집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고, 농업자본을 대출과 기술지도를 해 주고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공동체 형성에 노력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입니다



태그:#연해주, #블라디보스톡, #바리의꿈, #유기농콩, #도북아펴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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