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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책겉그림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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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언제였나? 해금강을 둘러보던 때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그 바닷길을 둘러보았어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꽃밭과 돌, 멋진 조경들, 그리고 바닷바람. 인공으로 꾸민 흔적들도 많았지만 절벽에 자연스레 핀 꽃들도 더러 있었다.

바다의 금강산이었으니 그날도 사람들이 꽤나 붐볐다. 우리 일행들을 빼고도 연신 줄지어 배를 타고 왔다. 파도도 거센 터라 까만 비늘 봉지에 먹은 것을 토해낸 사람들도 많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아무리 가까운 여행길이라도 본디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 여행길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먼 여행길이라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결코 지루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더 짧고, 더 아쉬운 법이다. 외딴 섬마을에 갇혀 지내도, 더욱 오붓하고, 더 넉넉한 법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그곳에 묻혀 있고픈 여행.

아, 미스터 한은 그래서 소설가가 된 것이다. 남준씨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설펐고, 원규 형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기괴했고, 미스터 한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희극적이었다. 이 셋의 이야기에는 공통된 정서가 있었는데 '위트'와 '웃음'이었다.(167쪽)

최화성의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 그렇게 넷이서 매물도 섬마을을 찾았던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박남준과 이원규, 그리고 거문도에 살고 있는 한창훈이 남자 셋이고, 서울 홍대 인근 오피스텔에서 회색 고양이와 동거 중인 최화성이 여자 하나다.

왜 넷이서 그 섬을 찾았을까? 사라져가는 섬마을 풍광을 담기 위한 콘텐츠 작업 때문이었을까? 섬마을 이장을 비롯해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을 취재하기 위해 그랬을까? 하루에도 1000명이 넘게 찾는다는 소매물도에서 특별한 문학교실을 열고자 함이었을까? 아니다. 순전히 3박 4일 그 섬에서 쉬고,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본디 여행도 그렇지 않던가? 뭔가 목적을 갖고 가면 여행이 주는 즐거움도 사라지고 긴장만 하지 않던가. 이들의 여행이 보여준 것도 그랬다. 그저 친한 벗들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 듯, 지나온 과거를 떠올리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게 전부다. 안주가 있다면 그 섬에서 캐낸 다랭이 비빔밥과, 그곳 바다에서 잡은 쏨뱅이와 어랭놀래기 회가 전부다. 그들의 삶에서 썰어낸 입담들은 가히 <1박 2일>보다 훨씬 더 재밌고 쫀득하다. 그야말로 포복절도다.

"제목이 '어느 무면허의사의 속옷 처방전'이야. 약국에 가면 약사가 약을 처방하지만, 비너스에 오면 자기가 속옷을 처방한다는 거야. 절벽 가슴에는 뽕브라를, 어떤 날에는 무슨 팬티를. 가게에 들어오는 남자만 봐도 딱 안대. 딸 건지, 마누라 건지, 다방 여자 건지, 바람난 애인 건지. 색감까지 딱 떠오른대. 그런 내용을 시로 써온 거야. 현역 문단에서는 쓸 수 없는 시지. 프로들이 깜짝깜짝 놀래."(223쪽)

박남준이 털어 놓은 '지리산 학교' 시 창작반 이야기다. '비너스'라는 속옷 장사 하는 아주머니 학생의 시 창작 사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얼마나 배꼽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박남준이 팬티 바람으로 네덜란드 군함에 구조된 사연도 있고, 한창훈의 몽골 사연도 기가막히게 재밌다. 다들 시인에다 소설가에다 작가들이 얽혀 있는 장소이다보니, 공간이동이 그렇게도 쉬운 줄은 몰랐다.

시인은 저 멀리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원규 형 것임을 금세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남준씨 집 앞마당에 원규 형의 오토바이가 들러왔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자 말총머리를 싹둑 자른 원규 형의 머리가 나왔다. 날씨가 더워서 머리 좀 시원하게 잘라달라고 했더니 미용사가 이리도 소심하게 잘라놓았단다.(298쪽)

3박 4일의 매물도 여행기를 마친 뒤 90일이 지나 다시 만난 기쁨의 자리였다. 그녀는 그 섬에서 빠져 나온 뒤로도 그 섬의 흔적과 시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단다. 하여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을 한 점 한 점 건져올리고자 다시금 그곳 지리산 산방을 찾은 것이다. 물론 미스터 한은 거문도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어떤가? 그들이 품어낸 재미난 입담에 한번 빠져보지 않을텐가?

덧붙이는 글 |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최화성 씀, 북노마드 펴냄, 2012년 5월, 299쪽, 1만3800원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매물도, 섬놀이

최화성 지음, 북노마드(2012)


태그:#매물도, #최화성,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박남준,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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