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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엄마>의 한 장면.
 영화 <엄마>의 한 장면.
ⓒ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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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막내예요. 지금 보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요. 소리 없이 내리는 비에 잠깐 짬을 내서 밖으로 나와봅니다. 식당 뒤쪽에 있는 작은 화단에 서 있는 나무들도 봄비에 젖어 생기가 도는 것 같아요. 그 옆으로 걸려있는 간판으로 눈길을 줍니다.

'함흥식당' 이름부터 고리타분하고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간판이지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하답니다.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래서 아침에 식당 문을 열 때도, 밤에 식당 문을 닫을 때도 한 번씩 올려다보곤 합니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야야, 음식 장사하는 사람은 이문을 남기려고 하면 안 되는 거여. 그냥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다고 생각혀야혀. 그러다 보면 돈도 따르는 거여. 그러니께 너도 주산 두드려 가며 머리 아픈 짓 허지 말고 좋은 놈으로 골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비릿한 곱창 냄새가 났던 어머니... '저는 근사하게 살 거예요'

어머니에게서는 늘 비릿한 냄새가 났어요. 저는 그 비릿한 냄새가 역겨워 곱창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어머니 곁에도 자주 가지 않았죠. 매일 아침, 식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곱창을 손질하는 뒷모습은 마치 웅크린 짐승 같았어요. 고무장갑을 끼면 답답하다며 추운 겨울에도 맨손으로 곱창을 손질하느라 어머니의 두 손은 빨갛게 불어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어머니가 마치 저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심하게 지냈어요.

대신 두 살 터울인 동생이 제 몫을 대신했죠. 툭하면 식당에 나와 잔심부름을 하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씩 살살거려 용돈을 받으면 저에게 주기도 하고, 아니 다른 무엇보다 곱창을 잘 먹었어요. 어머니가 만든 곱창이 제일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동생을 보며 어머니는 만족한 웃음을 짓고, 그런 모습을 보며 저는 틀림없이 동생은 꿈이고 뭐고 필요 없이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대신 저는 제 뜻을 이루어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식당에서 벗어나, 아니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근사하게 살 것이라는 치기 어린 결심을 하곤 했었답니다.

언제나 후줄근한 옷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곱창을 주무르는, 손님들에게 비굴한 웃음을 보이는 어머니와는 달리 저는 말끔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열정적으로 살 것이라는.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은 세상은 저에게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동생은 기술이 있어 식당일과는 무관한 생활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어 꾸려가는 생활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다른 무엇보다 전문적인 배움이 없었던 터라 회사에 들어가서도 몇 년을 버티지 못했어요, 설사 버티면 회사가 부도를 맞고, 그렇게 여러 회사를 전전하면서 저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고 급기야 두 손을 놓게 되었어요. 결국에는 직접 회사를 차려 사장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았죠.

"워쩌겄냐. 자리 잡을 때꺼지 내 일 좀 도와라. 나도 이제는 일이 힘에 부쳐서 힘들었는디. 잘 되었어야. 낼부터는 곱창손질을 니가 혀라."

우여곡절 끝에 물려받은 곱창집

그날부터 저는 어머니 식당에서 어머니가 손질하던 곱창을, 어머니처럼 쭈그리고 앉아 손질해야 했어요. 그리고 억지로 곱창도 먹게 되었고 손님을 상대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예전에는 죽기보다 싫었던 이 모든 일들이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었어요. 마치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그래, 민아, 잘했다. 어머니 잘 모셔라. 네 어머니가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원조 아니냐. 어머니가 하던 일을 대를 물려 하는 것도 좋아. 네 어머니는 자식들헌테는 식당 일하지 않게 한다고 했지만 말이다. 식당일이라는 게 워낙 힘들어야지. 그래도 네 어머니는 좋은 일 많이 하고 있어. 저 윗동네에 있는 양로원에도 평생 다달이 돈을 주고 있잖냐. 그래서 구청에서 표창장을 준다고 했는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이웃에 사는 김씨 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저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배운 것이 없어서, 가진 것도 없어서,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식당을 시작했다던 어머니, 자식들에게는 식당을 하지 않게 하려고 공부에 관한 한 무엇이든 해주면서도 정작 당신은 그 흔한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채 평생을 곱창 주무르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던 거예요.

이제 그 모든 것을 제가 대신하고 있어요. 비록 지금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지 못하시지만 말이에요. 저는 어머니가 이 식당에서 누렸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윗동네에 있던 양로원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자주 들르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가 어머니의 손길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리고 깨닫게 된답니다. 어머니의 슬픔이, 기쁨이, 즐거움이, 힘겨움이 다른 누가 아닌 저의 몫이라는 것, 그래서 어머니의 삶이 바로 제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은 다른 누구의 삶보다 훌륭했다는 것도요.

어머니, 오늘 저녁에는 일찍 식당문을 닫고 어머니와 함께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술 한잔하기로 해요. 제가 만든 맛있는 곱창을 안주로 만들어 어머니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어머니' 응모글입니다.



태그:#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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