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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앙마이시장에서 .
ⓒ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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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장미, 1296년 란나왕조( Lanna Kingdom )때의 고대왕국, 타일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치앙마이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인구는 20여만 명이지만 한 해 밀어닥치는 관광객이 100만 명이 넘는 작은 도시, 그 올드 시티(구시가지) 안에는 수많은 탑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이미 무너지거나 금방 무너질 들 위태롭게 서 있다.

코 떨어지고, 귀 떨어져 외롭게 뒹굴고 있는 사원의 잔해들, 영양제를 맞고있는 당산나무처럼, 아니 그보다 더 열악하게 파란 천인지, 테이프인지 같은 걸로 감아 위태로이 서 있는 부서진 탑들.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어져 있는것도. 선인들은 지혜로워 천 년 만 년 자신들의 보수비까지 다 받도록 만들어 놓고 갔는데, 그 많은 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올드 시티 안에는 다섯개의 빠두(Pratu, gate, 성문)가 있다. 그중 남문에 해당하는 빠두 치앙마이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여행자들이 골목골목의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으며 작은 여행자 거리도 조성돼 있다. 그리고 일요일이며 그 일대가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선데이 마켙>이라고 큰 야시장이 조성된다.

그 빠두 치앙마이에는 다른 빠두에서는 볼 수 없는 조그만 신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방인의 눈에는 어디 좌판이라도 하나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조잡한 인상人象과 동물 인형들이 빼곡히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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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두치앙마이신전안풍경 .
ⓒ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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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 곳에서 향불을 켜고 절을 하는 모양인데, 낮선 이방인이 그 앞에서 웃을 수도 없은 노릇이었다. 그 건너편에는 우리나라의 70년대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보았음직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낡은 LP판으로 지직거리며 나올 것 같은, 이발소가 하나 있다.

호기심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안에는 놀랍게토 커다란 평면 TV에 <소녀시대>와 <2PM>인지, 나와 열창하고 있었다. 예쁜 소녀시대는 확실이 알겠는데, <2PM>인지, <TwoPM>, 그렇지 않으면 <PM 무좀약>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 용서하시라. 주인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베낭을 배고 들어오는 낯선 이방인을 맞는다

또한 그 앞에는 타일란드의 현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은 재래시장인 치앙마이 마켙이 있고, 시장 앞뒤로는 주로 노인들이 운전하는 자전거 인력거, 툭툭(오토바이 뒤에 운송수단을 매담), 쟁태우 등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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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앙마이시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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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력거는 손님 태우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고, 항상 손님이 앉아있어야 할 그 자리엔 할아버지만 앉아 졸고 있었다. 할 일이 없는 할아버지는 시장 한 귀퉁이에 앉아 약간 상한 과일을 여기저기를 칼로 떼어내며 먹고 있었다. 언제 시장 국밥집에서 만나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 따뜻한 국밥이나 한 그릇 사드리고 싶다. 분들을 보면 얼마전에 떠나가신 아버지가 그려진다.

나이까지 연로하신 데다, 연약해 보이는 그 다리로 페달을 밟으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네가 태우고 올드 시티 성벽길을 따라 한 바퀴 돌고 싶다. 그러면서 도란도란 나는 한국의 슬펐던 과거사를 이야기하고, 그분은 시암(지금의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망해버린 란나왕조의 과거사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리라. 그리고도 서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맞아 자리가 된다면 해자를 복개한 치앙마이 공원에 앉아 치킨 누들noodle(여기서는 그렇게 부름)를 앞에 놓고 약주나 한 잔 대접하고 싶다.

아마 그 자식들도 소일거리로 담배값이나 하시거나, 평생 하던  일을 갑자기 놓으면 쉬 늙으시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못본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연로한 할머니가 골방에서 홀로 해소기침을 날리고 계셔, 할아버지가 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침이면 굽은 허리를 간신히 펴시고 나오시는지. 이 시장통도 아침이면 왁자하게 붐비지만 오후가 되면 한산해지고, 다시 황혼이 물드는 술 시時가 되면 노점 식당가로 변해 더욱 시끌벅적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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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남 1녀 가족에 2개의포장마차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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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3남 1녀가 두 개의 포장마차를 운영한다. 부모님은 방콕에 살고 이들의 고향도 그곳이란다. 남자들도 요리를 잘 하는데, 무우 비슷한 덜 익은 파파야로 채를 썰고, 직은 게 딱 한 마리, 땅콩, 이 집의 노하우 젖국을 넣으면 부산 남포동 거리나, 자갈치 시장 어디메쯤 아지매가 별 양념도 넣지 않고 쓱쓱, 비벼줘도 맛이 기가막히던 그 무침과 비슷하다.

말초신경까지 자극하는 그 비릿한 갯내와 액센트 강한 아지매의 성깔스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겠다. 나는 배가 출출하던 차에 그걸 두 접시나 연거푸 먹었다. 맥주 한 병에.

황혼이 젖어 더욱 쓸쓸한, 굴풋한 저녁 시간.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에서 먹은 그 맛이란. 한 접시에 30b 참쌀밥 한 그릇에 10b, 함해서 우리 돈으로 1600원이다. 맨쌀 밥은 먹기가 힘들다. <안남미>라고 밥알이 하나도 서로 붙지 않고 마치 모래처럼 따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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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앙마이시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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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쁘죠. 15세 전후나 됐을까요. 다소곳한 자세로 마치 그 자리에 없는듯이 정물처럼 서서 구워내는데, 몇 개 먹다가 너무 조용하여 고개를 들어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굽고 있었다.

동남아 국가에서는 많은 청소년들이 이렇게 장사에 좋사한다. 학교가 끝나고 저녁 장사를 돕기도 하고. 많은 식당들에서는 남자 청소년들이 직접 요리를 해서 내는 곳도 많다.

그리고 특히 태국 처녀들은 S-라인Line, 각선미(脚線美)가 참 아름답다. 베트남의 아오자이 입는 그 몸매가 이쁘다고하는데,그에 뒤지지 않는다. 하노이의 <호암끼엔호수>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거닐던 여인이나, 자전거 위에서 아오자이 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라지던 그 뒷 모습도 잊을 수 없지만.

그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우고 "싸와디 캅(남자에게)이나 싸와디 카(여자에게)라는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끝이 내려가면서 부드러워 정스럽기까지 한다. 나는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문득 전라도 말의 마지막에 붙이는 "~잉"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잘가 ~잉", "또 와 ~잉"

머리에 다라이(?)를 이고 고갯길을 돌아가다 한 번 더돌아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명절날 내려온 자식들에게 이것 저것 주섬주섬 다 싸주시고는 그래도 부족하신지 대문간에 자식들을 세워놓고 다시 헛간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정이 뚝 뚝, 묻어난다. 남도의 독특한 색감으로 우리 시의 절창을 이루었던 김영랑 님의 "워매 단풍들건데, ~잉"처럼.

나도 그 인사를 배워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하면 대번에 분위기가 좋아져 마치 지기(知己)를 만난 것처럼 화기애애해 진다. 가끔씩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여 그런 인사라도 한 마디쯤 먼저하고 두 손을 모두는 서양인을 만나면, 내 두 손에 들려있던 바나나라도 다 건네주고 싶다. 정말 아름다운 전통이다. 이런 전통이 세계시장으로 쭉쭉 뻗어 나가 이 초록별의 공기를 환기 시키면 좋겠다.

나는 또한 "니마스떼"라는 네팔의 인사말을 오랫동안 동경해 왔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았던 산악국가 답게 아름다운 풍광과 맑은 공기만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나 네팔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포카라에 있는 안나푸르나를 찾아가는 고갯길에서 앞차가 내뿜던 시커먼 매연과, 계곡으로 반쯤 머리를 쳐박고 있던 버스다. 그리고 그 매연 때문에 앞이 안보여 속도를 잠깐씩 늦추고 가던 차들도 생각이 나고.

안나푸르나 ABC를 등반하고 내려와 다시 밤중에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 불빛 하나 없는 공터에 버스는 서고 우루루 달려들어 바가지를 씌우려던 택시 기사들과, 그 택시를 타고 캄캄한 골목을 가는 내내 이 차가 제대로 가고 있나 하고 걱정들도 생각난다. 그곳은 마치 세계 폐차의 집산지 같았다.

물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내내 고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들의 맑은 눈동자에 도는 고요함이 좋았고, 폐와 호수에 잠긴 산의 전경도 빼어났지만.

또한 한국인에게 6개월 김치찌개 만든는 법을 배웠다고, 고기를 듬뿍 넣고 한국인 보다 더 김치찌개를 맛있께 만들어 네던 네팔 아저씨나 스치듯 만났던 몇 사람의 한국인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네팔의 청소념들은 모아놓고 무료로 가르치고 있던 착하디 착한 <네팔 짱>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아저씨, 자기 수입의 일부를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그 맑은 정신도 그립다.

네팔 오지에서 그 지역을 위해 봉사하던 원불교 교무님, 그 사원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공부를 같이했던 기억이나, <파핑>이라고 사원이 많은 작은 마을에서 커다란 컴퓨터 화면을 앞에두고 집필에 열중하고 계시던 스님을 만났던 일이나, 이제는 벌써 다 잊지 못한 생의 추억의 한 페이지들이 돼 버렸지만, 여전히 그립다.


태그:#여행, #아시아, #세계여행, #태국,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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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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