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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민주열사 2010년 23주기 추모제에서.
 박종철 민주열사 2010년 23주기 추모제에서.
ⓒ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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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박종철입니다. 나이는 스물셋. 사람들은 해가 바뀌면 나이를 먹지만 제 나이는 스물셋에 멈춰 있습니다. 1987년 1월 14일. 내 나이가 멈춘 날입니다. 살아 있다면 나는 올해 마흔여덟 살이 됩니다. 지금쯤 나에게도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아이들은 이 편지를 받는 당신들처럼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일 겁니다. 아이들은 2PM이나 카라,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일 거예요.

그러나 나는 그해 겨울 치안본부(현 경찰청) 수사관들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낯선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그것이 권력자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지난 연말 가슴 아픈 일이 있었어요. 김근태 선배께서 세상을 떠난 일이에요. 김근태 의장은 지난 20여 년 동안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겪은 일은 제가 겪은 일과 다르지 않기에 그날 밤 저는 한숨도 잠들지 못했습니다.

26년 만에 편지를 씁니다

고문은 피해자의 일평생을 괴롭힙니다. 고문 피해자들을 치료한 정혜신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죠.

"그동안 정신과 의사로 살면서 마음의 고통이 있는 사람을 1만 명 이상 만나왔지만, 그중 누구도 고문 피해자들처럼 처절하게 살지는 않았다."

나의 아버지 박정기는 제가 떠난 후 고문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니 글을 더 쓸 수 없어 가만히 창밖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저는 대학 합격 소식 외에는 항상 걱정스러운 소식들만 전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86년 5월 28일의 편지에서)
"죄송합니다. 어버이날 하루만을 치장하는 겉치레 효성보다는 항상 간직할 수 있는 효성이 더 좋겠지요.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86년 5월 12일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종부형, 은숙누나. 그리고 나의 친구들.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나와 김근태 의장을 떠올릴 때 기억하는 곳이 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내 삶이 멈춘 곳입니다. 그곳은 한국의 아우슈비츠 형무소였습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대공분실은 한 번쯤 거치게 되는,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그 건물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습니다. 대공분실에서 우리는 폭행을 당하고,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습니다. 숱한 양심의 목소리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건물을 설계할 때 그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았을까요? 처절한 몸부림을 떠올려 보았을까요?

지금 그곳은 어떤가요? 대공분실 건물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듯 고문이, 국가의 폭력이 더는 없는 세상인가요? 양천서 고문 사건,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4대강 현장에서 보듯 약자와 소리 없는 존재들은 국가의 폭력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로 서두를 열고 말았네요. 이제 잠시 편지를 읽는 당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의 삶을 얘기하려 합니다. 전 당신의 삶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저와 같은 스물셋의 청년입니다. 당신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학원에서, 커피숍에서, 주유소에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당 임금은 커피 한 잔 값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참여하고 온 후 소설 책을 읽었다면, 당신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피로에 지친 몸으로 토익책이나 스펙을 쌓기 위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특별히 운이 좋지 않다면 졸업 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무슨 일들이 벌어졌기에 당신과 나의 대학시절은 이토록 다른 걸까요? 실은 저는 이런 사회를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나는 저항했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내가 발 디딘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당신들에게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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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날은 1965년 4월 1일 만우절입니다. 생일날 축하주 한 잔 마시자고 하면 친구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릴 적 나의 별명은 '땡철이'였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노래 <학교종>을 저는 밤낮으로 "학교종이 땡땡땡" 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생긴 별명 '땡철이'는 스무살이 넘도록 저의 애칭이었습니다.

6월항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나를 '시대를 일깨우며 온몸으로 종을 치는 종치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볼 때 첫 번째 중요한 해는 1979년입니다.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한 시민들의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시대엔 군인들이 세상을 통치했습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를 점령하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난 중학생이었지만 대학에 다니는 형이 가져온 책을 읽으며 나름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나섰습니다. 이날 단짝인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밤 늦게까지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따라 불렀습니다. 그때 저에게 잊히지 않은 한 장면이 있습니다.

전투경찰들이 시민 한 명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무력하게 얻어맞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마치 저를 보고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어요. 전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대학생이 될때까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2008년 6월. 저는 보았습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한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별관 아래 골목에 드러누운 시민들을 전경들이 방패로 찍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부상당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지난 연말 추운 겨울밤 한미FTA 폐기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을 보았습니다. 1979년과 2008년의 풍경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84년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정확히 일치하는 해입니다. 소설 속의 세계처럼 1984년의 사회 현실은 감시기관과 군인들에 의해 통제된 사회였습니다.

나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고, 곧이어 지하서클에 가입했습니다.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곳은 학교와 성당과 교회였습니다. 사복 경찰들과 프락치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요.

당신들이 인터넷과 SNS, 팟캐스트로 소통하듯 우린 대자보와 유인물을 읽었습니다.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단지 리트윗을 한 이유로 검찰에 끌려간 박정근씨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더군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서글퍼졌습니다.

나는 '자유의 벽'에 나붙은 대자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글을 읽었습니다. 부마항쟁이 떠올랐습니다.

여전한 사회적 타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5.18 거리투쟁에 참여하러 길을 나섰고,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었습니다. 그후로도 몇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았고, 3학년 땐 3개월 남짓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때 다짐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신념과 사상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86년 7월 8일의 편지에서)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부산구치소에 있습니다. 저 박종철도 송경동도 꿈을 꾼 이유로 잡혀갔습니다. 꿈꾸는 자 잡혀가는 세상. 하지만 시인의 신념과 사상은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1월 13일 대공분실에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제가 존경하는 수배중인 형의 소재를 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신체를 고문했지만 나의 꿈은 고문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고문한 수사관 조한경은 출소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나는 예수를 죽인 빌라도인가? 그래, 나는 빌라도가 맞을 것이다. 누군가가 빌라도 노릇을 해야 했다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빌라도를 필요로 했다면, 내가 그 노릇을 한 게 아닌가?"

저의 죽음은 조용히 묻혀버릴 뻔했습니다. 대부분의 의문사처럼요.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는 죽음. 이를 의문사라고 합니다. 의문사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저수지에서, 바닷가에서, 철로변에서, 동굴에서. 어디선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며 사람들은 소리 없이 죽어갔고, 버려졌습니다.

저의 죽음도 그렇게 잊힐 뻔했습니다. 경찰은 나를 고문한 날, 서둘러 화장하고 사건을 덮으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진실과 양심의 편에 서주었습니다. 의사 오연상과 부검의 황적준과 검사 최환.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노력으로 나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고문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신문사의 기자들입니다. 제가 세상을 떠난 날,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처음으로 소식을 알렸습니다. 매우 작게 실린 2단 기사였습니다. 보도지침 때문에 시국 관련 사건은 그보다 크게 실리기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런 기사를 쓰면 언제 잡혀갈지 모를 때였지요. 신문은 보도지침으로 통제했고, 정부가 원하는 기사만 실릴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동아일보>의 기자들이 후속 보도를 하며 진실을 캤습니다. <동아일보>라니까 당신은 이맛살을 찌푸리는군요. 하지만 그때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는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은 보도지침을 뚫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선결적 자유'라는 것을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기자 정동익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언론은 성직입니다. 사명감을 지닌 사람이 기자가 돼야 해요.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권력과 재벌의 편이 아닌 99%인 민중들의 시각에서 보도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사라진 땅에서 기자를 꿈꾸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나의 이름을 간직해 준 이들은 6월 항쟁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6월 항쟁의 주역은 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들입니다. 참여하는 시민들이 권력을 만들었고, 세상의 방향을 바꾸려 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헌법이 개헌되었고,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때 겨우 시작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일은 시민들의 참여와 거대한 항쟁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김의 분열로 다시 군사 정권과 보수 정권이 이어졌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에서 살고 싶었다"

국가의 고문과 살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불태워 죽였고, 쌍용자동차에선 비인간적인 정리해고로 19명의 노동자들이 사회적 타살을 당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목숨을 앗은 자들이 지금도 사회를 지배하며 기득권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순종적인 청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나는 인간적인 삶을 꿈꾸었습니다. 1986년 3월 8일 저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난 죽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소망이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어떠한 모습으로든."

박종철 열사 추모식 포스터
 박종철 열사 추모식 포스터
ⓒ 박종철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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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소망은 당신들의 땅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도처에서 세상의 방향을 바꾸려는 몸부림을 보며 희망을 간직합니다. '아랍의 봄'과 주코티 공원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그리고 한국의 희망버스와 희망텐트….

끝으로 당신들에게 고백합니다. 미안합니다. 당신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꿈꾼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제가 못다 이룬 꿈을 당신들에게 건네드립니다. 나의 편지 글 일부로 글을 맺습니다.

"한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꽤 촐랑거리고 쾌활한 소년이 있었다더라. (중략) 진실에 눈을 뜨고 불의에 분노하면서 참 진리와 참 정의를 찾아서 나아가는 생활들은 때로는 너무도 힘들고 고달팠단다. (중략) 너무도 너무도 비인간화된 사회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한 피끓는 청년이 있다."(86년 3월 26일의 편지)

덧붙이는 글 | * 이 글에 인용된 편지 글은 모두 박종철님이 직접 쓴 편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박종철 평전>(박종철출판사)을 참조했다.



태그:#박종철, #25주기, #6월 항쟁, #고문,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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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르포작가. 펴낸 책으로 <사랑 때문이다>(요셉 조성만평전), <흐르는 강물처럼>(4대강 르포르타주), <허세욱 평전> 등이 있다. 최근 e북 르포르타주 <달려라 할머니>와 <그대, 강정>(공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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