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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구의사사적비. 한말 고흥유씨 집안이 의병항쟁으로 배출한 9명의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비다.
 일문구의사사적비. 한말 고흥유씨 집안이 의병항쟁으로 배출한 9명의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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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고흥유씨(高興柳氏)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라고 부른다. 그만한 숫자가 독립운동에 나섰을 때는 집안의 멸문지화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 중 세 가문은 실제로 손이 끊기는 아픔을 겪었다. 민족의 자존을 지켜내야 한다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애국애족 정신이 면면히 전해져오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유탁을 선계로 하는 고흥유씨(高興柳氏). 임진왜란 후 양성현감을 지낸 유지호가 이거한 이래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방곡마을은 고흥유씨 집안의 집성촌이 됐다.

고흥유씨 20대조인 유습 장군은 세종대왕 연간에 이종무 장군을 보좌해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대마도주는 항복했고, 조선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할 것을 맹세한 바 있다. 또한 고흥유씨는 조선조 임진왜란에 호성공신인 유광의 후예이기도 하다. 집안에서만 전해지는 내력으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도 집안사람인 유인석 의병장이 내줬다고 한다. 고흥유씨중앙종친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유희빈(64)씨는 "당시 안중근 의사가 큰 일을 도모함에 있어 사용하던 총이 마땅치 않자 유인석 어르신이 쓰던 총을 내줬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고흥유씨중앙종친회 유희빈 부회장이 유중화(유치복) 의병장의 묘역에서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고흥유씨중앙종친회 유희빈 부회장이 유중화(유치복) 의병장의 묘역에서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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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사 연구자들은 구한 말 전북지역 의병활동의 시작을 1906년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과 주도로 거의한 병오창의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흥유씨종친회는 집안이 의병활동에 뛰어든 시점을 1895년으로 계산한다. 그해에 단행된 단발령과 국모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구한 말 최초의 항일의병운동을 을미의병이라 부르는데, 기록으로만 본다면 이때의 전북지역 의병활동은 극히 미비했다.

고흥유씨종친회의 주장은 을미의병 당시 충주와 제천 일원에서 활동한 유인석 의병대장이 같은 집안사람이었다는 데 근거한다.

"유인석 장군의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 비봉에 있어. 거리가 멀긴해도, 일년에 한두 번씩은 꼬박 여기를 다녀갔을 거란 말이여. 교류를 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유인석 전투기록에 보면, 유치복이라는 이름이 나와. 그분이 누구냐하면 여기 구의사의 중심적 역할을 한 분이여.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여기 비봉에 사는 우리 집안은 이미 그때부터 의병활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지."(유희빈씨)

구의사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서 출생한 유중화(자는 치복)를 중심으로 한 유연청, 유영석, 유연풍, 유태석, 유연봉,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등을 말한다.

병오창의로 도내에서도 의병활동이 본격화되자, 고흥유씨 사람들도 분주해졌다. 이때 유중화는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들과 같이 구국의 일선에서 신명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동지 유지명과 송태식(조카사위) 등과 모의한 뒤, 앞에서 언급한 친족 8인과 생질 이유종, 이태종 등 수명을 대동해 1907년 가을부터 의병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으고, 무장항쟁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나선다. 이에 호응한 호민이 280여 명 규모였다고 전해지며, 호남과 충남지방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는 익산의 이규홍 의병단과 합세를 하기도 하고, 각지의 의병단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다. 주체는 유중화 등 구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의 의군단이었다. 이들은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병기제작소를 두고 창검 및 탄환, 화승총을 사냥총으로 총포를 개조 보급하며 체계를 갖췄다. 이런 노력으로 고산, 익산, 여산, 용담, 진안과 멀리 진산, 금산, 연산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넓혀 상당한 적의 군마를 격살하는 전적을 올렸다.

고흥유씨 11대조 묘역 인근에는 지금도 집안사람이 살며 묘를 지키고 있다. 그 묘역 바로 앞에 당시 무기제작소가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땅을 파면 쇠덩이들이 나오곤 했다고 전해진다
 고흥유씨 11대조 묘역 인근에는 지금도 집안사람이 살며 묘를 지키고 있다. 그 묘역 바로 앞에 당시 무기제작소가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땅을 파면 쇠덩이들이 나오곤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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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의병대는 1907년 2월 금마산성에 매복했다가 헌병대를 습격 전멸시켰다. 1907년 11월 15일 현재의 화산면 화월리에서 격전해 왜병 29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1908년 4월 10일 연산자촌에서 왜병 2명을 사살, 1908년 9월 3일 고산에서 왜병 십여명을 사살, 1908년 10월 은진 왕성골에서도 왜병과 크게 접전해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자체 내의 비행을 숙청하고 친일파 일진회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군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이었다. 유중화는 1908년 12월 24일 윤병오라는 자가 의병을 사칭하면서 풍기를 문란케 하므로 그자를 총살한 바 있다. 구의사는 1906년 10월과 190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이봉승의 집을 방문해 군자금을 받았다. 또 그해 10월에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노상에서 모금하고, 또 그달에 한홍수에게서 군자금조로 돈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군자금 모금 기록은 일본 경찰에 의해 탐지된 것만 모은 것으로, 그들의 활동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구한 말 의병사 연구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훨씬 더 광범위하고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의사의 항일활동은 1910년 경술국치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났으며, 국치이후에는 행적을 숨기고 지하운동을 하며 기회를 노렸다. 이에 일본은 잠재세력 제거를 위해 이들의 체포에 나섰으며, 1910년 10월 총책을 맡은 유중화를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말을 듣는 대신 자신의 혀를 깨물어 침략국의 비행을 질책했고, 금마 주둔 일본군 헌병대는 현장에서 그를 총살됐다고 전해진다.

일문구의사 중 한명인 유영석 생가. 남에게 팔린 후 원형이 변형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흥유씨 가문에서는 이 집에 대한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
 일문구의사 중 한명인 유영석 생가. 남에게 팔린 후 원형이 변형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흥유씨 가문에서는 이 집에 대한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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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화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의사는 1917년 밀고에 의해 일시에 체포된다. 당시 그들은 강도범으로 체포됐다. 당시 일본은 경술국치를 단행하면서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선심 쓰듯 대사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전 행위에 대해 처벌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일본 경찰은 경술국치 이후 이들이 솔티재라는 곳에서 행인의 돈을 강탈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최저 10년에서 15년까지의 중형을 내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일본은 가짜 증인까지 내세워 사건을 날조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중에는 복역 중 옥사하거나 출옥 후 형독으로 수년을 넘기지 못하고 별세한 이가 많았다.

유연청(12년형 선고)은 1928년 7월 8일, 유영석(10년형 선고)은 1952년 6월 7일, 유연풍(12년형 선고)은 1936년 3월 10일, 유태석(15년형 선고)은 1922년 11월 5일, 유연봉(12년형 선고)은 1926년 6월 30일, 유명석(15년형 선고)은 1930년 12월 3일에 각각 옥중에서 혹은 출옥 후 사망했다.

유준석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1971년 11월 3일까지 향년 87세의 삶을 살았다. 또한 유현석은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탈옥 후 이름을 바꿔 숨어 살다가, 1960년 6월 26일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당시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한 유중화의 생질 이유종은 옥사하고, 이태종은 출옥 귀가 후 일본 주재소를 찾아가 할복자살했다고 전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일문구의사, #고흥유씨, #비봉면, #유중화, #유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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