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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한국계 배우 전나영.
 <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한국계 배우 전나영.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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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은 1989년 9월 20일 런던의 초연을 시작으로 25개 나라, 246개 도시, 그리고 12개의 다른 언어로 공연된 세계 4대 뮤지컬 중의 하나이다. 1996년 네덜란드에서도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초연되었던 이 뮤지컬은 총 908회 공연을 통해 네덜란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5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았다.

2011년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배우들과 스태프로 이뤄진 <미스 사이공>이 선보였다. 주연으로 발탁된 남자 연기자와 여자 연기자 모두 신인이다. 네덜란드 언론은 <미스 사이공>이 추구하는 자유와 순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배우들이라고 보도했다.

남자 주인공인 크리스 역을 맡은 톤 시번(Ton Sieben)은 10년 동안 직업 군인을 하다가 뒤늦게 뮤지컬에 뛰어들었다. 여자 주인공 킴 역을 맡은 한국계 배우 전나영은 열정 가득한 스물두 살의 신예이다. 전나영은 부모에게서 아시아와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 그 속에서 이미 킴을 연기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스물두 살의 나이에 주연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안은 신예라고 보도되었다.

<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전나영.
 <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전나영.
ⓒ 전나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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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을 찾았다. 꽉 찬 객석. 기자에게 공연은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완벽했다. 조연들이 네덜란드에서는 더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이었다. 킴 역의 전나영이 등장했다. 완벽한 네덜란드어 발음, 애절한 목소리. 얼굴을 보지 않으면 영락없는 네덜란드인이다. 점점 궁금해졌다. '한국말은 할까?'

전나영을 인터뷰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배우 담당 매니저를 만나고 이메일을 보내고 두 차례나 공연장을 찾은 기자는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어떻게든 취재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끈을 찾던 중, 전나영의 이웃으로 살았다는 분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계획한 지 한 달 만에 배우 전나영을 만날 수 있었다.

로테르담의 한적한 곳에서 전나영과 그녀의 아버지 전정효씨를 만났다. 전나영은 한국인 2세로 네덜란드의 덴하그(헤이그)에서 출생했고 한국에서 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말은 청산유수다. 말 잘하고, 잘 웃고, 잘 떠들고 틈나면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까지 영락없는 20대 초반의 발랄하고 끼 많은 청춘이다.

어떻게 뮤지컬 배우가 되었는지, 스물두 살에 어떻게 큰 뮤지컬의 주인공 역을 따낼 수 있었는지를 묻기 전에 한국 배우나 가수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전나영은 "나훈아, 김광석"이라고 대답하며 크게 웃었다. 독특한 매력의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2세, 그리고 한국식 아버지

인터뷰하는 동안 전나영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교육관과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서투른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늘 내가 1등을 하고 최고가 되기를 바랐어요. 난 그것이 늘 불만이었어요. 친구들의 아버지 중에 1등을 하라고, 최고가 되라고 하는 분은 만난 적이 없거든요."

일반적으로 네덜란드에서는 아이에게 어릴 적부터 '1등을 해라, 그리고 최고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너는 너라서 예쁜 것이다, 너라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가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대부분의 네덜란드 부모들이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한국 부모들은 다르다. '무엇을 하든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 1등을 해야 하고 적어도 상위 5%에는 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 더 노력해라, 한 시도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마라'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한국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전나영은 아버지의 교육관에 때로 숨이 막히고, 문화 차이로 인해 아버지와 불편했던 시간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의 교육열은 전나영의 오늘을 만든 힘이기도 하다. 부모는 전나영에게 만 네 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아주 어릴 적에 개인 레슨을 받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다. 많은 네덜란드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개인 레슨을 시작한다. 전나영은 이와 달리 부모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 덕분에 일찍 피아노를 접했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는 지금의 전나영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릴 적부터 곡을 만들고 가사를 넣어 노래 부르기가 취미였던 전나영은 자연스럽게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전나영은 네덜란드 아이들과는 다른 교육을 받았다. 부녀 관계에서 부딪힘도 많았고 아버지에게 반항도 했지만, 전나영은 일찌감치 많은 것들을 접하면서 다행히 자신의 재능을 아주 빨리,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얼마간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한국 문화를 체험한 후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교육관과 인생관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해가 되더라고요. 네덜란드와는 문화가 전혀 다른 한국에서 성장한 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주해 색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감수하며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까 생각하면 존경심이 생겨요. 사실 전 아버지와 많이 닮았어요. 긍정적으로 말하면 저와 아버지는 열정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전나영은 이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배우 전나영과 아버지 전정효씨.
 배우 전나영과 아버지 전정효씨.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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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과 인연을 맺다

전나영은 네덜란드 고급고등학교(VWO)를 졸업하고, 마스트리히트 예술학교에서 작품을 쓰고 창작하는 과정을 1년 거쳤다. 그 후 실질적인 노래와 춤을 배우고 직접 극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로테르담 예술학교로 학교를 옮긴다. 더 실용적인 예술 활동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전나영은 2008년 4월 하이스쿨 뮤지컬(Highschool Musical) 오디션에 우연히 참여했다가 조연급인 켈시 역으로 발탁되었다. 그 역 덕분에 2009년에는 뮤지컬 갈라 어워드(Musical Gala Award)의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이때 벌써 2011년 <미스 사이공>을 기획하던 기획사에서는 전나영을 주인공 킴 역으로 점찍어 두었다고 한다.

전나영은 작품 창작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꾸준한 공연을 통해 연기력을 더 탄탄하게 한 후 작품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 전나영의 꿈이다.

네덜란드 문화계는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화예술이 없는 네덜란드를 꿈꿀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문화예술인들이 네덜란드 정부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정부는 2010년 긴축 재정 정책에 따라 전체 예산의 0.6%에 해당하는 문화예술계 지원 예산 중 20%를 삭감한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근 1년 동안 문화예술계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타격을 준 것은 문화예술 공연 관람 가격에 부가되는 부가가치세가 6%에서 19%로 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더 비싸게 공연을 보고, 제작자들은 관객이 줄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에 대항하여 문화예술계는 '네덜란드 문화를 위한 외침'이라는 운동을 전개했다. 2010년 11월 20일 전국 대도시에서 10만 명이 넘는 문화예술인들이 같은 시간에 소리를 지르며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하이스쿨 뮤지컬>(2009)에서 켈시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나영.
 <하이스쿨 뮤지컬>(2009)에서 켈시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나영.
ⓒ 전나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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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장에서 주목받는 신예,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

문화예술계의 고충은 전나영과 한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미스 사이공> 공연장은 연일 만석이지만, 전나영은 네덜란드 문화예술계에서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했다. 한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다른 극에서도 대개 주인공을 맡는다. 시장이 어려워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 뚜렷해진다. 유명한 배우들에겐 고정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현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고 한다.

<미스 사이공> 공연 중인 전나영.
 <미스 사이공> 공연 중인 전나영.
ⓒ 전나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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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을 계기로 네덜란드 뮤지컬 시장은 전나영을 주목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스 사이공>이 전나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 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나영은 아시아인이고 <미스 사이공>의 주인공 역시 아시아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이후 전나영이 다른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전나영은 괜찮은 역을 맡아 계속 버티기 위해 기획사에 잘 보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네덜란드 문화예술계에서 배역을 맡는 배우는 한정되어 있다. 매년 수많은 예술학교에서 배출되는 뮤지컬 전공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시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재능 있는 학생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예술을 택한다. 다행히 네덜란드에는 3~4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이웃나라인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은 물론 멀리 미국으로 재능을 펼치기 위해 떠난다.

재능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언어라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전나영 역시 3개 국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게다가 부모님 덕에 한국어도 잘할 수 있으니 전나영에게는 한국도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행복하게 공부하는 꿈을 꾸는 청춘

전나영은 어린 나이에 큰 작품의 주연을 맡고 보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전나영은 20대에 열심히 무대를 배우고 이를 밑천 삼아 좋은 작품을 쓰고 싶어 한다. 전나영에게 네덜란드는 너무나 좁은 시장임에 틀림없다. 세계를 향해 도약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전나영에게는 관객에게 동서양을 골고루 느끼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좀 더 공부할 생각입니다. 한국으로 공부하러 갈 수도 있겠군요. 저는 국악을 너무나도 배우고 싶습니다. 다섯 살 때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면서 창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창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다가 2년 전 학교 무대에서 '심청가'를 부르겠다고 했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맨 마지막 순서로 배정해주셨습니다. 대단한 공연이었다고 많은 분이 칭찬해주셨습니다.

인터넷으로 혼자 영상을 보며 따라 부르고 음악 CD를 들으면서 공부했습니다. 내용도 애절했고 소리는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래를 한국어로 불렀기 때문에 공연 사이사이 네덜란드어로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내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한국은 참 귀중한 것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깊은 뭔가를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것이 한이라고 하셨어요. 더 많이 느끼고 배우고 싶어 <미스 사이공>이 끝나면 한국에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대에 서지 않고 공부하는 길을 택하면 누구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느냐고 물었다. 전나영은 국가가 지원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이 줄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은 국가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풍족하진 않겠지만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 정도라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 공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전나영은 1등을 하고 싶어 노력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단지 참 즐겁고 행복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특별한 점을 발견하려 하던 중 <미스 사이공> 주연 자리가 찾아왔다고 했다. 전나영은 음악을 배우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작품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전나영.
 <미스 사이공> 주연을 맡은 전나영.
ⓒ 전나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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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는 제 또래들, 참 고달프게 산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래의 한국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최고인 것이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이루어낼 때 참 행복하고 신나는데 말이죠. 한국에 있는 제 또래들은 참 고달프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촌 형부가 스페인 사람인데 지금 한국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에요. 형부와 자주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10년 안에 젊은이들이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정말 그러기를 바랍니다. 모든 젊은이가 1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을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전나영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나영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한국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전나영은 한국으로부터 지구 반 바퀴 밖에서 살고 있으면서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한다. 한국에 살지 않는 한국계 배우, 그렇지만 이렇게 뜨겁게 배우며 살아가고 있는 전나영은 한국의 또 다른 미래가 아닐까?

전나영이 출연하고 있는 <미스 사이공>은 위트레흐트에 있는 베아트릭스 극장에서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상연되고 있다. 2012년 1월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관객이 점점 늘어나는 터라 내년 6월까지 연장 공연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한국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고 있는 이 젊은 배우의 앞날이 궁금해진다.


태그:#미스 사이공, #네덜란드, #전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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