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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을 이룬 적이 있었다. 우체국이나 은행을 가면 여직원들에게서 그런 인사를 접하곤 했다. 한 번은 "부자 되세요"라는 억양에 맞추어 똑같은 음조로 "싫어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처음 접한 그런 반응에 은행 여직원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왜요?"라고 물었다.

"부자가 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들 많아요. 부자가 되고서도 못 사는 사람들도 많고요. 난 욕심 부리지 않고 살래요. 부자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아요."

별 영양가 없는 얘기였지만 은행원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나도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복은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

해마다 연말연시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접하곤 한다.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이런 말을 한다.

"고맙습니다. 헌데요, 복은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겁니다.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말이 올바르고 뜻이 깊은 말이지요."

이렇게 교정을 해준 경우가 많은데, 앞으로도 연말연시에는 그런 교정을 많이 해주며 살 것 같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는 솔선수범을 한다. 연말연시에 연하장을 보내거나 메일로 새해 인사를 할 때는 으레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말을 달곤 하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나 연말연시에 접하게 되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모두 경제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또 땀과 노고보다는 '행운' 같은 것을 알게 모르게 의중에 담고 그런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말은 사람의 가치관과 인격, 행동양식과 삶 전체를 반영하기도 한다. 말 한 마디만으로도 그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또 다중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한 시절의 유행어는 그 시대나 사회의 품격을 가늠하게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많은 사람이 연말연시에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복 많이 받으세요' 같은 말도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말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품위를 지니게 될 것으로 믿는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언어에 대한 성찰과 사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또 결과보다는 과정의 가치, 현상보다는 이면의 의미, 주체성 등을 살피는 혜안을 다중이 가지게 하는 효과도 생길 수 있다고 본다.      

한 시절의 주술적 언어

한때 우리 사회에는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시절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주술처럼 말려들었다. 분명 주술 같은 효과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말은 그 말의 생산자를 선택하면 금세 경제가 살아날 것으로 믿는 착각이나 환시 효과를 가져왔다.

그 말을 주술처럼 뇌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언어가 거의 필요 없었다. 오로지 그것 한 가지였다. 대중의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은 언제나 강고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주술과 정면으로 맞섰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말이 얼마나 부당하고 비이성인 것인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논리에는 일정한 설명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들은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도 이해력도 없었고, 그 주술 외로는 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채택했던 방법은 '도깨비방망이론'이었다.

"그 사람에게 도깨비방망이라도 있답디까? 그 사람이 집권을 하면 도깨비방망이라도 휘둘러서 뚝딱뚝딱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또 경제라는 게 그렇게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요술을 부려서 살릴 수 있는 거랍디까?"

오히려 역효과였다. 사람들은 그가 진짜 도깨비방망이라도 가진 것으로 굳게 믿을 뿐이었다.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천주교 신자들 중에도 '다수'가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천박한 가치관에 매몰되고, 그가 도깨비방망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착각하는 현상이었다. 나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만이라도 그런 시각 쪽으로 경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정하다시피 했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생각이 그리스도 신앙과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도 주술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너무도 미숙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말의 카드는 "예수님이라면 그에게 표를 주실까요?"였다.

"한번 예수님의 눈을 가져보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자는 생각을 가져봅시다. 예수님이라면 그 사람에게 표를 주실까요? 우리가 적어도 천주교 신자라면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장로'를 하느님처럼 믿으면서 '장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개신교 사람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여덟 글자에만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내 말은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다수'의 교우들이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주술을 따랐고, 그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도깨비방망이'를 믿었다.

도깨비방망이의 폐해

그때로부터 4년이 지나고 있는 요즘 나는 주변의 교우들에게 가끔 물어보기도 한다. "지금도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말을 믿나요? 어떻게 경제가 좀 좋아지셨나요?" 반응은 가지가지다. 멋쩍게 웃는 사람도 있고,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고, 화를 내며 마구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행히 내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10년 넘게 나와 레지오 모임을 함께 하는 한 형제님은 얼마 전까지도 "좀 더 지켜봅시다"라는 말을 했는데, 요즘은 아예 입을 열지 않는다. 4대강 문제에 대해서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요즘은 불안한 기색이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주술이 지금 어떤 현상과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국가경제가 총체적으로 어떤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사회 전반이 어떤 양상으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는 길게 설명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자신이 뭔가를 체감하거나 깊은 인식의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그저 모든 게 '강 건너 불'일 뿐일 것이다.

히틀러가 가톨릭 신자였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에다가 장로님이다. 우리국민은 압도적인 지지로 이명박 장로님에게 '권력'이라는 이름의 도깨비방망이를 안겨 드렸다. 그는 그게 진짜 요술 방망이인 줄 알고 열심히 휘둘렀다. 특히 4대강을 깨부수는 쪽으로 도깨비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그가 지난 4년 동안 한 일이라곤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회 전반이 30년 전으로 후퇴했다.

남은 1년여도 장로님은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려고 애를 쓰실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방망이는 이미 약발이 거의 소진되었다. 그는 도깨비방망이를 과신한 나머지 너무 많은 업보들을 만들었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저 역사발전이 다 그렇듯이 국민들은 먼저 깨어날 것이고, 국민들이 먼저 깨어나는 길만이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바로잡아 나가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4대강 사업, #이명박 장로, #경제대통령, #도깨비방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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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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