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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던 생활 구석구석의 '이상한' 습관들. 그 속에도 우리 사회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 익숙한 것들을 뒤집어보고 캐물어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생활의 재발견' 시리즈입니다. [편집자말]
떠먹는 뇌가 돼버린 불어 터진 자장면.
 떠먹는 뇌가 돼버린 불어 터진 자장면.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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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토요일이었지요. 집에서 밥 해먹기는 귀찮고, '뭘 좀 시켜먹자'고 생각했죠. 사실 혼자 뭘 시켜 먹을 때는 메뉴 고르기가 참 힘들잖아요. 무난하게 자장면 한 그릇 시켰죠. 근데 자장면이 엄청 늦게 오는 거예요. 한 30~40분쯤? 글쎄, 면이 팅팅 불었더라고요. 뭐 이건 뇌가 따로 없었죠. 그러더니 면이 툭툭 끊어지는 거예요. 젓가락으로 좀 먹다가 숟가락으로 퍼 먹었지 뭐예요…." - 류호성(21)씨의 사연

평소 음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김정현(22)씨. 그는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이 있다. 그는 "배달음식의 생명은 '빠름'이죠, 그중에 자장면 배달은 가장 빨라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입맛을 다셨다.

배달음식의 생명은 '빠름'에 있단다. 자장면 배달 나가는 노동자
 배달음식의 생명은 '빠름'에 있단다. 자장면 배달 나가는 노동자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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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릿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의식 중에 하나가 '빨리 빨리'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 특히 '내 돈 주고 시켜먹는' 배달음식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다. 이런 탓에 가까운 과거에 수많은 '번개배달부'들은 전화가 끊기자마자 부리나케 오토바이에 타야 하지 않았던가.

재미삼아 해본 실험... 9분 44초 만에 터지는 절규 "배고파!"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은 건강한 '슬로 푸드'라서 시간에 대해 한없이 관대하지만 배달음식, 특히 자장면만큼은 1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급 속도로 내 앞에 떡하니 차려져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수많은 이들이 '어머, 전 그렇지 않아요'라며 고개를 가로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시민들은 자장면 배달의 적정 소요시간을 10분 내외로 잡았다. 10분이면 아이유의 신곡 <내 손을 잡아>를 대략 3번 정도 들을 수 있는 시간. 몇몇 사람들이 아이유의 매력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중국집은 면을 뽑고, 자장을 붓고, 포장을 한 뒤, 철가방에 넣고, 오토바이를 타고 쌩쌩 달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번개처럼 빠르게 와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 아닐까요?
 번개처럼 빠르게 와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 아닐까요?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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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이와 관련해 문자 그대로 '재미삼아' 실험을 해봤다.

친한 후배 5명과 함께 자장면을 먹기로 비장하게 결의한 기자는 자장면을 시키는 척했다(음식을 주문하는 연기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만했다는 후문이…). 그러곤 스톱워치 시작 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실험의 목적은 단 하나. '과연 몇 분 뒤에 사람들은 배달 지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까'. 기자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방 안에 묘하게 퍼지는 긴장, 후배들은 각자 자기 일을 하며 자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바깥에 소리만 나도 재빠르게 문을 쳐다보는 후배들의 눈빛은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험개시 9분 44초 36만에 터져나온 분노의 절규. (물론 배고파서 그랬겠지만)
 실험개시 9분 44초 36만에 터져나온 분노의 절규. (물론 배고파서 그랬겠지만)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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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순간, "아오! 배고파!"라며 울리는 한 여후배의 절규. 스톱워치의 시간은 9분 44초 36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고픔을 표시하는 것을 두고, 결과를 단정짓는 것은 크나큰 오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좀 더 기다려봤다(덕분에 기자는 화장실에서 숨죽여 자장면을 주문해야만 했다. 여후배의 절규는 생각보다 심하게 기자의 가슴을 후벼 팠기에). "자장면 왜 안 와? 어떻게 된 거야?"라는 반응은 실험 개시 19분 47초 51 만에 나왔다.

"'출발했다'는 거짓말이요? 그리 몰아붙이면 섭섭하죠"

자장면 배달이 늦는다고 생각될 경우,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바로 수화기를 들어 탄지신공으로 번호판을 때리는 행위일 것이다. 목용수(24)씨는 "항의전화를 하게 되면 중국집에서 늘 나오는 이야기는 '방금 출발했다'예요. 근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초인종 소리는 들리지 않더군요"라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이 뿐만 아니다.

류호성(21)씨는 "중국집에서 말하는 '방금 출발했다'는 '이제 만들기 시작했다'와 같은 표현 아닌가요"라며 반문했다. 즉, 중국집의 대응은 믿을 수 없다는 뜻.

서울 화양동 건국대학교 후문 앞 중화요리점 '홍콩'을 운영하는 민명숙(53)씨는 이런 불신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그런 거짓말은 하면 안 되죠. 근데 참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정말 출발했는데 전화가 딱 오는 경우예요."

주문량이 폭주하는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대의 주방은 말 그대로 '전쟁터'란다.
 주문량이 폭주하는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대의 주방은 말 그대로 '전쟁터'란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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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사장의 말에 따르면 하루 중 미칠 듯이 바쁜 시간대가 낮 12시부터 1시반 까지, 그리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라고 한다.

"점심 저녁 시간 때면 주방이나, 홀이나, 배달 노동자들은 오장육부 다 빼놓고 일하거든요. 근데 거짓말한다고 그러시면 정말 섭섭하죠. 근데 정말 저희를 더 섭섭하게 하는 게 뭔지 아세요? 항의전화 한 사람들의 전화 태도예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사례가 다양했다. 분명 젊은 목소리인데 반말 찍찍 쓰는 사람, '그거 하나 만드는 데 뭐 이리도 오래 걸리냐'며 따지는 사람, 늦는다고 쌍시옷을 붙여가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 등….

"배달 음식업 자체가 사회에서 대우를 잘 못 받으니까 그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바빠 죽겠는데 손님하고 싸우면 안 되잖아요. 참고 참으면서 '죄송하다'를 반복하는 거죠. 때로는 본의 아니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응하는 경우도 있는 걸요."

민 사장은 이제 항의전화를 받으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단다. 이것도 하나의 직업병이라고.

'빨리빨리'에 맞추다 길 위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중국집 홀에서 손님들의 항의전화를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자장면은 배달해야 할 것 아닌가. 결국 배달 노동자들이 도로에서, 계단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올해로 15년차 경력을 자랑하는 배달 노동자, 조재천(47)씨를 만나봤다. 배달 주문이 그나마 뜸한 낮 4시경,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루에 몇 군데나 도냐고요? 대개 50~60군데 정도 가요. 한 100군데쯤 돌면 온 몸이 피곤하죠. 그런데 정말 힘들 때는 따로 있어요. 철가방에 음식은 많은데, 승강기가 없는 곳으로 낑낑거리며 올라갈 때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늦었다고 손님들이 짜증낼 때는 저도 정말 화가 나지만 어쩌겠어요. 서비스업의 다른 이름은 '인내'잖아요."

배달 노동자들은 거리 위를 달리고, 계단 위도 달려야 하는 직업이다. 항상 달려야 하니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도 참 많다고. 운전면허증도 없는 기자에게 그들의 코너링인 가히 환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자가 15년차 베테랑 앞에서 경이로움을 표하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재천(위) 씨의 무릎. 인터뷰가 끝나고 실례를 무릅쓰고 보여달라 청했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추다가 그들은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조재천(위) 씨의 무릎. 인터뷰가 끝나고 실례를 무릅쓰고 보여달라 청했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추다가 그들은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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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요, 그게 참 위험한 거예요. 빨리 가야 하니까 잽싸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잖아요. 덕분에 배달하는 분들은 무릎이 성할 날이 없어요. 자주 넘어지니까요. 같이 일하는 친구는 최근에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저녁에 배달 나가는데 갑자기 길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든 거예요. 결국 그 친구는 피하다가 크게 넘어졌죠.

그래도 다행인 건, 다는 아니지만 중국집 오토바이가 보험에 들어있어서 산재처리는 된다 는 거죠. 매일 길거리에서 외줄타기 하고 있는데 늦었다고 다짜고짜 화내는 손님들 보면 참 야속할 뿐이죠. 놀다가 늦게 가는 것도 아닌데…."

최근에 도미노피자에서 30분 배달제를 폐지하긴 했지만, 아직도 소비자들의 요구는 그대로다. 덕분에 수많은 배달 노동자들은 위험한 순간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 수많은 배달 노동자들이 이따금씩 '스턴트에 가까운 오토바이 운전'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이 중앙선을 넘거나, 신호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죠. 저는 그런 친구들 보면 꼭 한마디씩 해줘요. 3~4분 더 빨리 가려다가 인생 종칠 수도 있다고요.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거든요."

배달음식에 대한 까칠한 태도, 여유를 찾아주세요

한국 사회 전 분야, 특히 배달 음식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빨리빨리' 의식. 이 의식은 순기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놓치는 것도 상당수다. 밀리는 주문에 빗발치는 항의전화, 울컥하지만 어쩔 수 없이 튀어 나오는 애교, 길거리에서 외줄타기 하는 배달 노동자들의 삶의 문제까지….

자장면에 특히나 '까칠한' 우리의 의식에 대해 배달음식업계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미안한데, 조금만 더 여유를 가져달라'고 하소연한다. '홍콩'의 민명숙(53)씨는 "빨리 먹으려 들면 되레 체해요. 중국집 사정도 좀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 릴렉스(relax)요, 릴렉스. 그 단어 이럴 때 써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저 쥐 정도만 아니면 참아 주세요. 자장면 한 그릇에 목숨걸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저 쥐 정도만 아니면 참아 주세요. 자장면 한 그릇에 목숨걸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 김지현 /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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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자도 배고픔을 잘 못 참는다. 하지만 식사시간이 좀 늦어진다고 해서 중국집에 선전포고를 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중국집이 당신에게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따위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웹진 <本>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자장면, #배달, #빨리빨리, #생활의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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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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