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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막국수
 봉평막국수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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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막국수에 물리겠다. 봉평에서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었다. 어제(4월 1일)도 장평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근래 들어 막국수를 자주 먹었다. 춘천에서도, 양양에서도, 횡성에서도. 강원도는 어딜 가도 막국수 집이 있었다. 장평에서 막국수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메밀꽃의 고장인 봉평에 온 김에 아예 막국수로 뽕을 빼는 거여. 저녁도 막국수를 먹고, 아침도 점심도 계속해서 막국수만 먹어대는 거여. 하지만 그건 실천하지 못했다.

봉평 흥정계곡 앞의 펜션 '하이디 하우스'에서 묵었는데, 쥔이 저녁과 아침을 아주 맛깔스럽게 차려줘, 사먹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4월 1일부터 2일까지 봉평을 걸었다. 장평부터 걷기 시작해 봉평 흥정계곡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시 장평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장평과 봉평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막국수 전문식당이었다. 봉평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효석이 아니라 '막국수'라는 말이 나올 지경으로 이리 보아도 막국수 집, 저리 보아도 막국수 집이었다.

여주 천서리 역시 막국수가 유명한데 그곳은 한 곳에 막국수 전문식당이 밀집해 있는 반면에 봉평은 밀집 지역도 있지만 천서리 만큼 대규모가 아니고,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

장평 막국수
 장평 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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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울터미널에서 장평까지는 딱 2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12시 10분. 장평이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나? 배낭을 둘러메고 버스에서 서둘러 내렸다. 버스터미널에는 마른 바람이 분다. 주변을 둘러보니 특징 없는 도시 변두리 지역 같은 느낌이 든다. 점심시간이니 어디 가서 간단하게 식사나 하자, 하고 둘러보니 막국수 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식당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손님은 안쪽 자리에 남자 둘밖에 없어 한가롭다. 이 집에서 물 막국수를 먹었는데, 국물 맛이 시원하다. 값은 5천 원. 이 정도면 무난하다. 주방 안에 국수틀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직접 면을 뽑아서 막국수를 만드는 집인가 보다.

봉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이효석일 것이다. 덕분에 봉평에 가면 꼭 드는 생각.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효석은 자신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이토록 봉평에서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36살이었느니 말이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내일(4월 2일)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아무래도 하늘이 흐린 것은 그 전조인 것 같았다. 장평에서 봉평까지 거리는 9km 정도. 하지만 내가 걸은 거리는 그보다 훨씬 길었다. 자동차로 직선도로를 달린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길을 에둘러서 걸었기 때문이다.

도로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가늠해 봉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른 먼지를 풀썩이며 자동차 한 대가 빠르게 도로를 달려 나간다.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가 도로 위에 안개처럼 퍼진다. 배낭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한결 낫다.

판관대
 판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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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 율곡 이이의 자취를 확인했다. 판관대에서였다.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이 바로 봉평이란다. 판관대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다.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할 즈음, 아버지인 이원수 옹의 벼슬이 수운판관이었다고 해서 판관대라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자식이 후대에 길이 이름이 전해지면 더불어 부모까지 빛나는 법인가 보다.

판관대 말고도 율곡선생을 기리는 곳은 더 있었다. 봉산서재(蓬山書齋)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판관대에 얽힌 율곡선생의 잉태 설화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 사당에 율곡선생과 이항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봉산서재
 봉산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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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서재 출입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당 문 역시 열려 있었지만, 안을 기웃거리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둡고 음산한 느낌이 들어 선뜻 발이 내딛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곡선생을 만났으니, 이번에는 이효석을 만날 차례다. 도로를 걷다보니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마다 가로등 모양이 다른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가로등을 눈여겨본다. 양양에서는 송이버섯이 들어가 있더니, 봉평의 가로등에는 이효석의 캐릭터가 들어가 있다. 이효석을 아주 귀엽게 표현한 캐릭터로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봉평 이효석마을로 가는 길에, 마구간에 매어져 있는 나귀들을 보았다. 녀석들을 구경하러 가까이 다가갔더니, 이 녀석들이 나를 구경하려고 앞으로 나온다. 녀석들, 눈을 말똥거리면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효석 캐릭터가 들어간 봉평의 가로등
 이효석 캐릭터가 들어간 봉평의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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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빠질 수 없는 동물이다. 허 생원이 장에서 팔 물건들을 나귀 등에 싣고 다니기 때문이다. 허 생원과 동이가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 녀석들이야 나귀가 그런 존재인 줄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봉평에 가려면 아무래도 메밀꽃 필 무렵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처럼 메밀이 아예 보이지 않는 계절이라면 황량하고 쓸쓸한 봉평 풍경만 마주칠 테니까. 대신 한적해서 좋기는 하다.

물레방앗간은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물레방아는 돌지 않고 볼품없이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소품들이다.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자와 하룻밤을 보낸 곳이다. 다시는 처자를 만나지 못했지만 허 생원은 그이를 잊지 못하고 마음에 품은 채 살았다.

이효석 문학관
 이효석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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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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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위쪽으로 이효석 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문학관 옆에는 이효석 문학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는 이효석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생가 뒤에는 이효석이 평양에서 살았다는 '푸른 집'이 복원되어 있다.

'푸른 집'을 멀리서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푸른 색조는 전혀 없는 집이었던 것이다. 붉은 벽돌에 붉은 기와로 지은 집이 어째서 '푸른 집'이 되었을까? 그 의문은 아마도 담쟁이넝쿨이 푸른 잎을 잔뜩 매다는 계절이 되면 풀리리라. 담쟁이가 벽을 따라 올라가게 되면 집이 푸른빛으로 덮일 것이므로. 역시 너무 이르게 왔어.

이효석 문학관을 둘러보고, 문학관 옆의 찻집에 들어가 봉평을 내려다보면서 차를 마셨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누리는 호사스러운 여유다. 이럴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 이 찻집에서 이효석 책과 봉평의 특산물을 팔기도 한다. 메밀껍질을 넣은 베개가 너무 마음에 들기에 물었더니 한 개에 2만7천 원이란다.

그 베개를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나 어릴 적에 어머니는 늘 메밀껍질로 베개를 만드셨다. 그래서 베개는 당연히 메밀껍질로 만드는 것인 줄 알았다. 베개를 1년쯤 사용하고 나면 메밀껍질을 새것으로 갈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솜을 넣은 베개를 사용한다. 그것도 진짜 솜이 아니라 인조 솜이라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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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화마을을 전부 돌아본 뒤 흥정계곡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그 길에 자리 잡고 있는 평창무이예술관은 평일 해질녘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없어 입구에서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고 지나쳤다. 평창무이예술관은 예전에 폐교였던 곳을 예술관으로 재활용한 곳으로 다양한 예술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최종 목적지는 흥정계곡. 흥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어지는 계곡인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그 물이 봉평읍의 흥정천까지 이어진다. 흥정계곡의 길이는 10km가 족히 넘기 때문에 여름에는 사람들이 이 곳으로 물놀이를 하러 몰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흥정계곡으로 가는 길과 계곡 옆에는 펜션이 옹기종기 모여 제법 큰 마을을 이룬다. 서양식으로 깔끔하고 예쁘게 지은 펜션들을 지나려니 서양 어느 마을로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알록달록한 원색 페인트가 칠해진 집에서는 귀여운 요정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도 같다.

흥정계곡
 흥정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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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계곡을 따라 펜션이 60여 개가 늘어서 있고, 민박집까지 포함하면 80여 개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나 많이? 깜짝 놀랐다.

내 최종목적지는 흥정계곡의 중간 정도에 있는 펜션 '하이디 하우스'. 이곳 펜션들은 뒤쪽에는 소나무와 삼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앞쪽은 계곡이다. 겨울이라 가물어서 계곡 물은 바닥을 보이고 있지만, 한 여름에는 물이 제법 깊은 편이라고 한다.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두꺼운 눈얼음이 덮인 곳도 있지만, 물은 풀려 흘러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무척이나 맑다. 열목어가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참동안 물속을 들여다봤지만, 보지 못했다. 아직 날씨가 쌀랑해서 바위틈에 숨어 있나 보다. 흥정계곡을 찾기에 이른 철이지만 그래도 나처럼 이곳을 찾아든 손님들이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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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계곡은 여름에 가족이 하룻밤쯤 묵으면서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물놀이를 즐기기에 알맞은 곳인 것 같다. 계곡이 길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북적이지 않고 한가롭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내가 묵은 펜션 쥔장의 귀띔이다. 흥정계곡의 특징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흙탕물이 되어도 비가 그치면 삼십 분도 채 안 돼 물이 맑아진다는 것.

펜션에서 하룻밤을 잔 뒤, 이른 아침에 계곡을 따라 산책을 했다. 하늘은 흐릿했지만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하면서 촉촉한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져,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 날, 비가 온다더니 흥정계곡에서는 눈바람이 살짝 흩날렸다. 역시나 강원도의 봄은 멀었나 보다. 언제 봄은 고운 숨결을 타고 강원도에 내려앉으려나, 궁금해진 아침이었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봉평, #장평,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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