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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꿈을 피워보기도 전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황금주 할머니
 일제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꿈을 피워보기도 전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황금주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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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주의보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은 15일, 부산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시는 황금주 할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황금주 할머니는 1922년 음력 8월 15일 충남 부여에서 한 선비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일제식민지 시대 조선의 백성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가난 때문에 가정형편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마저도 건강이 좋지 못해 늘 누워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집안 형편으로 인해 황금주씨는 13살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큰 장사를 하고 있던 함흥 최씨 집에 양녀로 가게 되었고, 2년 후에는 함흥집으로 옮겨서 집안 일을 도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말은 양녀였지만 집안의 궂은 일들을 해야 하는 남의집살이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 부인을 잘 만나 17살이 되던 때부터 2년 동안 야학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황금주씨에게도 식민지의 무서운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동네 일본 반장 부인이 일본의 군수공장에 3년 계약기간 동안 가서 일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면서 한 집에서 적어도 한 명은 나가야 한다고 권유하고 다녔습니다.

양모의 두 딸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 일로 걱정하던 양모를 위해 황금주씨는 빚을 갚고싶다는 생각에 자신이 대신해서 가겠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동네에서 1명의 여성과 함께 중국 길림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그 때가 황금주씨가 스무살이 되던 1941년이었습니다.

길림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5년 동안 황금주씨는 일본군성노예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24살에 해방이 되었지만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졌고, 혼자 걸어서 서울로 돌아와 야채장사, 국수장사, 식당 등 온갖 궂은 일 다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 소식을 알게 되었고, 황금주씨도 피해자로 신고를 했습니다. 이후 일본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1992년 8월에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함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직접 참석하여 증언을 하여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황금주 할머니는 1992년 8월, 당시 정대협 이효재 공동대표와 함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 1992년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한 황금주 할머니(왼쪽) 황금주 할머니는 1992년 8월, 당시 정대협 이효재 공동대표와 함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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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 미국, 캐나다 등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 진실을 알리며 일본정부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수요시위에 참석할 때마다 한국정부와 일본대사관을 지키고 있는 한국경찰들을 보며 "너희들이 쪽바리나라 앞장이냐?"하며 마이크를 잡고 욕을 해대는 바람에 '욕쟁이 할머니'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문제 해결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 할머니에게 치매라는 병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기억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죽을 때까지, 일본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나올 것이라며 외쳤던 할머니는 결국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전문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잊어도 정대협 윤미향은 잊지 않는다며 할머니를 방문하기 위해 요양원을 방문할 때마다 요양원 직원들이 "할머니, 할머니가 좋아하는 윤미향씨 오셨네요"했는데…. 날이 갈수록 할머니의 몸 상태는 나빠졌습니다.

황금주 할머니는 치매가 걸리던 2006년 이전까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 수요시위에 참석한 황금주 할머니 황금주 할머니는 치매가 걸리던 2006년 이전까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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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은 할머니가 혼자 일어날 수 없게,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얼굴에 남아 있던 눈노와 고통의 표정도 지워져, 온순한 표정만 짓고 있는 할머니.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최근 계속 하늘나라로 가시는 할머니들을 보며,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래서 새해 인사도 드릴 겸, 15일 할머니를 찾아뵀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할머니는 누군지 알겠냐는 질문에 "그럼 알지, 처녀 때부터 일했는데..."하십니다. 그리고는 바쁜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고 묻습니다. 할머니가 보고싶어서 일부러 왔다고 말씀드리니 대접할 게 아무 것도 없다며 미안해 하십니다.

할머니 만나고 나서 따님과 만나 점심하기로 했다고 하니 "그래? OO이가 온대?" 합니다. 할머니의 따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따님이 보고싶다고도 하십니다. 따님 만나면 꼭 전해드리겠다고 하니 좋아하십니다.

할머니께 뭐 드시고 싶은 것 없냐고 여쭈니 "있으면 뭣해? 내게 돈이 없는걸..."하십니다. 우리가 사드리겠다고 하니 "미안해서 안돼"하시고, 할머니께 다른 것 뭐 바라는 것 없으시냐고 여쭈니...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일본정부가 사죄하는 것 뿐이야. 치매가 걸렸어도, 다른 것을 다 잊었어도 잊을 수 없었던 바램은 일본정부가 사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황금주 할머니
ⓒ 윤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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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야. 일본이 우리한테 사죄하는것."

세월도, 치매라는 병도 일본정부가 사죄하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바람은 기억속에서 뺏어갈 수 없었나봅니다.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가 눈감으시기 전에 우리가 할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릴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졸립고 피곤하신 듯했습니다. "나 방에 들어가 자고싶어." 할머니를 방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침대에 누워 잠들려고 하는 할머니께 곧 또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시간이 없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생각이 잡히질 않습니다. 어서 서둘러야겠습니다. 일본정부가 국가의 전적인 책임을 인정하여 사죄하고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윤미향 기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입니다.



태그:#일본군'위안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대협, #수요시위, #일본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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