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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서 '공부'란 것이 참으로 편협한 가치로 자리하는 것이 안타깝다. 공부란 책을 볼 때는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고개를 돌려 세상 어디를 볼 때도 현재진행형임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같다.

약 20년 전 중학교 영어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다. 한 원시 부족민에게 사진 속 마천루를 보여줬더니 "아름다운 화단"이라고 답했다고 했다. 고층빌딩의 존재를 아는 것은 '바나나가 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여전히 타성이 지배하는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물을 완벽하게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졌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식탁 한켠에 모로 누운 바나나에게 어떤 말로써 세상을 열게 할 것인가?

오늘 문득 시차증을 감지했다. 요며칠 오전 한때 시계를 보면 언제나 10시 15분경, 체감보다 한 시간 느린 시각이었다. 또 하나 밤 11시의 의식이 여느 때 그것보다 훨씬 묵직한 것. 그래서 아이 때처럼 TV를 켜놓고 잠든 게 여러 날이다. 이게 다 태평양 상공에서 잃어버린 1시간의 위력이었다.

태평양 상공에서 잃어버린 나의 1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태평양 상공에서 잃어버린 나의 1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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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집 떠나기 전 배낭을 꾸리며 가져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 물건이 있다. 두 해 전 가을 무렵 구입한 하모니카다. 한창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껴 그 돌파구로 회사 근처 음악학원을 등록했었다. 그때 큰 마음 먹고 산 것인데 겨우 한 달 수강에 그쳤다.    

처음 포부는 김현식의 '한국사람'을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거였다. 학원을 그만두면서도 연습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흐지부지였다. 그것이 늘 아쉬웠던지라 이번 여정을 화해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배낭을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배제했다.

하지만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것이 명백한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언어란 것이 세계와 다르지 않아 공부에 쉼이 없지만 사람 하는 일에 쉼이 없을 수 없다. 그때마다 감성의 각질을 제거시켜줄 유연제가 아쉽다. 

어린 두 배치 메이트가 현지 적응에 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늘에야 말하길 지난 주말까지 연수를 포기하고 그냥 귀국할까 고민했다 한다. 같지 않겠지만 본인 역시 막막함과 회의를 느끼던 참이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미 늦은 게 아닐까, 결국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십여 년 더디게 이십 대의 여정을 걷는 그들에게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란 경험을 얘기해주면서 본인 또한 위안을 받았다. 벗을 사귀는 지혜를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눈높이를 같이 하며, 그저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것. 어학연수를 왔지만 배우는 건 영어뿐이 아니다. 

당신에겐 눈 앞의 사물과 완벽하게,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가?
 당신에겐 눈 앞의 사물과 완벽하게,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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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한국은 이제 막 2011년 35분이 흘렀고, 이곳 필리핀엔 여전히 2010년 25분이 남았다. 두 시간의 공존이 재미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사방을 뒤흔드는 폭죽소리에 누워있기를 포기했다. 기숙사 마당엔 화약 연기와 냄새가 진동한다.

어학원 동기들과 새해맞이 행사에 가려 했으나 갑작스레 몸의 이상이 찾아왔다. 성탄절 이브엔 몸살이 나서 드러 누웠는데 이번엔 코감기와 눈병 의심 증세다. 반나절 전부터 안구에 이물질이 낀듯 불편하고 깜빡이면 따끔거린다.

어젯밤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이던 클럽에 다녀온 게 유일한 의심 요소다. 오늘밤 안에 말끔히 나으면 좋으련만, 전염병 판명시 격리조치되고 완치까지 수업을 들을 수 없다. 비싼 돈 주고 와서 그야말로 큰 손해다. "산타 할아버지, 성탄절도 그냥 넘겼으니 이번엔 힘좀 써주세요."

기숙사 옆 너른 잔디에서 여학생 몇몇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모습이 흡사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같다. 나이듦에 책임감만 커질 뿐 별다를 것도 없다 생각했지만 막상 새해맞이에 들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덩달아 감회가 새롭다.  

'2011년엔 사는 게 그저 고통인 생명들 신의 돌봄 먼저 있으시고, 사람들 횡포에 몸살난 지구 어쨌거나 잘 견디게 해주시며, 어리석은 인간들 정신좀 차리게 해주시고, 국내적으론 우리 대통령 4대강 욕심 버리게 해주시어, 부디 오래오래 이 좋은 세상 대대손손 누리게 해주십시오.'

어느새 12:40(현지시각). 오른쪽 눈에선 눈물이, 오른쪽 코에선 콧물이 흐른다. 다시 한번 바라옵건되 내일 아침 감기는 남아있돼 눈만은 회복되길. 끝으로 내 삶의 원천인 가족들 건강을 기원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제좀 조용해지면 좋으련만 총소리 같은 폭죽음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필리핀 바클로드에서 2011년을 기다리며.
 필리핀 바클로드에서 2011년을 기다리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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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과 멘토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태그:#크리스마스, #감기몸살, #하모니카, #마천루, #공정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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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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