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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요시다 아키미 글·그림,이정원 옮김,애니북스,2010.10.20./8000원)

 

 

<이브의 잠>이나 <바나나 피쉬>나 <러버스 키스>라는 만화책을 그렸다는 요시다 아키미 님이 새롭게 그리는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운데 3권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을 보다. 이분 다른 만화책도 보고 싶은데 만화책방에 갈 때마다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는 잊고 만다. 아직 다른 만화책들은 판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더 까먹지 않는다면 즐겁게 장만해서 읽을 수 있겠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 님이 새롭게 그리는 책에 붙인 큰이름인데, 일본글로는 '海街diary'로 적는다. 그러면 이 이름을 한글로 옮길 때에는 '바닷마을 일기'나 '바닷마을 이야기'나 '바닷마을 편지'쯤으로 옮겨야 알맞은데, 엉뚱하게 '다이어리'라 적고 만다(이 나라 만화책 출판사 편집자 마음씀이 아쉽다).

 

일본사람은 워낙 영어를 일본말인 듯 여기며 함부로 자주 쓰지 않는가. 그러나 일본뿐 아니라 한국 또한 영어를 참 쉽게 쓴다. "열린 마음"이나 "너른 마음"이라 말할 줄 아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퍽 드물다. 으레 "오픈 마인드"를 주워섬긴다. 몇 해 앞서부터 시월 끝무렵에 한국방송국(KBS 아닌)에서 벌이는 책잔치 이름은 "책잔치"가 아닌 "북쇼"이다.

 

만화쟁이 요시다 아키미 님은 '바닷마을 일기'를 어느덧 세 권째 그린다. 첫째 권은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2009.5.)이고, 둘째 권은 <한낮에 뜬 달>(2009.12.)이며, 셋째 권은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2010.10.)이다. 앞으로 몇 권까지 더 그릴는지 모른다만, '바닷마을 일기'는 일본에서 '카마쿠라'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복닥이는 삶을 담아낸다.

 

언뜻 보기에 아무 이야기가 없을 듯하다 여길 수 있고, 썩 재미난 일이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참 작은 시골마을(또는 작디작은 도시이거나 시골 읍내쯤) 사람들 여느 삶을 수수하게 보여준다. 우리로 치면 우리 식구가 살아가는 신니면 산골마을 이야기라 할 만하고, 전라도 고흥군 풍양면 바닷마을 이야기라 할 만하다. 이 작디작은 시골마을 사람들이 하루하루 벌이는 자그마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바닷마을 일기'이다.

 

일본 만화라서 자잘한 대목을 잘 들여다보며 알뜰살뜰 만화 하나로 엮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한국 만화라서 자잘한 대목은 들여다볼 생각 없이 더 잘 팔리거나 더 눈길을 끌거나 더 남다르다 싶은 이야기에 휩쓸린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삶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내 살붙이와 동무랑 오순도순 지내는 맛을 안다면, 살붙이와 동무랑 복닥이며 하루를 빠르게 보내는 삶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눈물과 웃음이 있는가를 깨닫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재미있거나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놀랍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는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품는 짝사랑 하나로도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가슴에 차츰차츰 커 가는 또다른 사랑과 믿음 또한 그지없이 깊은 이야기로 여미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나누는 사랑은 어떠할까. 어른들이 하루하루 꾸리는 삶은 어떠한가. 아이들이 학교 안팎에서 배우거나 놀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삶은 어떠하겠는가.

 

날마다 일기를 꼬박꼬박 적어 보는 사람은 알 테지. 한 해 삼백예순닷새 일기 가운데 똑같이 적바림하는 일기란 나오지 않는다. 날마다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할지라도 날마다 똑같은 낱말과 말투로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글자수로 적바림하는 일이란 없다. 나 스스로 똑같다 잘못 생각할 뿐, 어느 하루조차 똑같을 수 없다.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한달지라도 날마다 날씨가 다르며,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이 다를 뿐 아니라,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라든지 보내는 겨를은 다르다. 햇살이 드리울 때하고 비가 쏟아부을 때가 다르다. 옷장에서 꺼내어 입는 옷이 다르다. 빨래를 할 때에 드는 품이 다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다르며, 텔레비전 구경을 좋아한다면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 또한 다르다.

 

바닷마을 일기 셋째 권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을 가득 채우며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 같은 말마디를 하나하나 되씹어 본다.

 

- "어쩔 수 없지. 그런 부분까지 다 좋아했던 걸 테니까." (19쪽)

- '길지 않았지만 친구들도 생겼었고, 산도 강도 깨끗하고, 마을도 사람들도 다정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오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 따윈 바라지 않았다.' (24∼25쪽)

- '유아, 눈치 채고 있었구나. 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된 유야. 나서서 허드렛일도 챙기고, 혼자서 잠자코 재활 연습을 하고. 강하구나. 게다가 자상하기까지 하다. 뭐니,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50∼51쪽)

- "그저 행복해지고 싶다는 건데 그럼 안 되니?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병 때문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75쪽)

- "응. 곱게 유카타도 차려입었어." "유카타라." "그에 비하면 우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고."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집 배는 고기잡이 배니까 차려입으면 불편하다고. 슈퍼 비닐봉지나 들고 있고. 딱 아줌마네." "하지만 과자가 없으면 아쉬우니까." "피부도 까맣고." "어쩔 수 없잖아. 밖에서 뛰는 축구부니까." (86쪽)

- '지금쯤 유아도 어딘가에서 이 불꽃을 보고 있을까? 그 아이와 함께. 유아의 다리에 대해 알면서도 사귀는 걸 테니 분명 좋은 아이겠지. 유야의 다정함과 배려는 다른 모두에게도 평등하게 향해 있던 거구나.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더. 유아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멋대로 착각했을 뿐. 하지만 그 아이를 향한 유아의 마음은 역시 조금은 특별한 거겠지?' (94∼95쪽)

 

만화책을 보면서 잘 그린 그림이라서 집어드는 일은 거의 없다. 더없이 멋진 그림이구나 싶어 집어드는 만화책이란 아예 없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림책을 볼 때에는 참 잘 그렸구나 싶은 책을 사들 때가 있기도 하다만, 그림만 잘 되어 있을 때에는 몇 번 넘기기 힘들다. 솜씨만 빼어난 그림이라면 벽에 걸어 놓고 오래오래 두고두고 바라보기 어려우니까. 내 마음을 건드리는 만화나 그림이어야 즐겁게 넘기고 다시 넘기며 우리 딸아이한테까지 물려줄 만하니까. 내 삶을 밝히거나 빛내는 고운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이거나 그림책일 때에 비로소 기쁘게 장만하여 우리 집 책꽂이에 예쁘게 꽂아 놓으니까.

 

요시다 아키미 님 만화를 보면서 이분 만화결이 빈틈이 없다거나 예쁘장하다거나 맛깔스럽다거나 하고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결인지 아닌지조차 느끼지 않는다.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든 <한낮에 뜬 달>이든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이든 수수하게 붙인 책이름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시사람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시골사람 자잘한 이야기로 스며들어 엮은 줄거리가 내 마음을 얼싸안는다. 작은 사람들 작은 이야기를 살가이 보듬는 만화쟁이 마음씨를 느끼며 고맙다고 느낀다.

 

따지고 보면, 만화결이 훌륭하다고 이 만화책을 사지 않듯이 글솜씨가 빼어난 작품이라 해서 이 글책(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예술을 다루는 책이든)을 사지는 않는다. 토박이말을 잘 살린 작품이라 해서 뛰어나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운 문학이 될까? 현대문학에서 손꼽힌다 하는 작품이라 하여 멋지거나 재미나거나 고운 문학이 될까? 노벨문학상을 탄다 한들, 이상문학상을 탄다 한들, 아쿠타가와상을 탄다 한들 무엇이 다르려나. 훌륭하기에 상을 받는 작품이 되기도 하지만, 상을 받은 작품이 내가 읽어서까지 빛깔 곱거나 아리따운 삶으로 녹아드는 이야기이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을 따스하고 넉넉하게 일구는 데에 길동무가 될 좋은 이야기 담은 책 하나를 만날 수 있으면 흐뭇하다.

 

조용하거나 한갓지다 느낄 수 있고, 들뜨거나 두근거린다 느낄 수 있는, 차분하면서 따사로운 말마디를 거듭거듭 되뇌어 본다.

 

- '산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지도 몰라.' (104쪽)

- "유야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안 순간, 실은 나 조금 안심했어. 혹시 유야랑 스즈가 사귀게 되어서 그런 두 사람을 계속 곁에서 봐야 한다면, 나 분명 속상해서, 속상해서 ……." (107쪽)

- '어쩐지 이상하다. 1년 전에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언니와 '자매'가 되는 일은 없었겠지. 마찬가지로 요시노 언니나 치카 언니와도 '자매'가 될 수 없었을 거다. 옥토퍼스(축구단)의 친구들도 감독님도 만날 수 없었다. 만약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그 야마가타의 작은 온천 마을에서 또다른 '가족'과 지금도 살고 있었겠지. 진학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이 달콤한 간식도 먹거나 …….' (128∼129쪽)

- '그때 언니는 잠자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딱히 슬퍼하거나 하지 않은 채, 그렇지만 무언가 알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133쪽)

- "그리고 그 '정말 소중한 것'은 누가 봐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74쪽)

- "사과하시더라구. 지금껏 못난 딸이 붙들고 있어서 미안했다고.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았어. 날 원망할 때가 훨씬 편했어. 부부는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그분들은 나처럼 도망칠 수도 없을 테니까." (179쪽)

- '마음의 병을 앓는 아내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쌓여 앞으로도 절대 지워지지 않겠지. 나는 그걸 계속 지켜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불만을 쌓아 가는 나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났다. 그래도 행복했던 그 시간들. 그건 대체 뭐였던 걸까?' (183∼184쪽)

 

좋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고운 문학이란 무엇인가. 맑은 문학이나 밝은 문학, 또는 기쁜 문학이나 예쁜 문학이란 어떤 모습이려나. 참된 문학이나 착한 문학을 생각해 볼 수 없나. 내 좋은 삶을 꿈꾸며 좋은 문학을 찾거나 즐기면 어떠하려나. 내 고운 삶을 일구려는 매무새로 고운 작품 하나 어깨동무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거듭날까. 착한 넋 착한 이 착한 말 착한 꿈 착한 삶으로 이어지는 착한 만화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낸다면 내 몸은 어떻게 달라질까.

 

제법 사랑받으며 읽히는 만화 '바닷마을 일기'일 테지만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리라 본다. 꽤 두루 팔리기도 만만하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바닷마을 일기'를 그린 요시다 아키미 님은 당신이 그리는 이 만화를 100만 사람이나 1000만 사람이 읽고 가슴 뭉클히 받아들여 주리라 바라지 않겠지. 10만이 아닌 1만 사람일 뿐이더라도, 1만조차 아닌 1천 사람이나 1백 사람일지라도, 가슴으로 따뜻하게 껴안아 줄 고운 벗을 기다리지 않을까 싶다. 그린이가 먼저 스스로 착한 사람으로 살면서, 읽는이 또한 스스로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곱고 맑은 온누리에서 즐거이 어깨동무할 보금자리를 바라 마지 않겠느냐 싶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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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 바닷마을 다이어리 3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애니북스(2010)


태그:#책읽기, #삶읽기, #만화책, #만화,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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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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