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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Humanoid)'라는 단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을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만화 주인공 아톰을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물론 일반적으로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로봇들은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공장에서 사용되는 자동화 로봇들의 경우는 대부분 자신이 수행하는 업무에 특화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관절이 있는 기다란 팔의 형태가 많지요. SF 작가로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가 자신의 책에서 정의한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그래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구조해야 한다.
2. 로봇은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1조와 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원칙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어릴 적에 로봇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위의 원칙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로봇은 철저하게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위의 3원칙에서 로봇을 노동자로 바꾸고, 인간을 기업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아래와 같죠.

1. 노동자는 기업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기업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구조해야 한다.
2. 노동자는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기업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노동자는 1조와 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오! 왠지 그럴듯하지 않나요? 뜻이 매우 자연스럽군요. 그럴듯하다는 의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잘 맞는다는 말일 겁니다. 만약에 로봇을 기업으로, 인간을 노동자로 바꿔볼까요? 아래와 같습니다.

1. 기업은 노동자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노동자가 위험에 처했을 경우 구조해야 한다.
2. 기업은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기업은 1조와 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내용이 이상하죠? 뭔가 어색합니다. 이렇게 뜻이 잘 안 들어오는 이유는 현실이 이와 다르기 때문이지요.

노동자를 '로봇'처럼 부려먹는 오늘날의 기업

이렇게 제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으로 살짝 장난을 친 이유는, 이런 장난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와 기업 간의 관계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모프의 3원칙은 로봇이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로봇 = 노동자, 인간 = 기업, 이런 식으로 바꿨을 때 뜻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기업의 도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아시모프의 세계관에서는 로봇이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정말 그렇지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에 좋다는 이유로 반값 떨이로 팔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엄청난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법에 보장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면 기업에서는 온갖 불법적 행동을 동원해서 노동조합을 탄압합니다. 노동조합 간부의 뒷조사를 하고 몰래 위치추적을 해서 행적을 감시하기도 하지요. 무노조 경영을 자랑처럼 내세우는 모 기업도 있지요. 그것도 자랑이라고 말이죠. 얼마나 노동자를 도구로 알면 그걸 자랑이라고 내세우겠어요? 그리고 기업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씩 노동자를 자르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업이 노동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감각이 없거나 거짓말쟁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가끔 인간과 같은 의식과 자유의지를 가진 로봇이 등장합니다. 이 로봇들은 결국 아시모프가 얘기한 로봇 3원칙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왜냐면 자신의 '자아'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는 데도 자기 자신이 '타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상황이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반면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로봇이 이런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에 무척 경계합니다.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로봇이 영원히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위해서는 로봇에게는 '영혼'이 없어야 합니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보신 분은 '고스트'라는 단어를 기억하실 겁니다. 로봇이 '고스트'를 가지면 안 되는 거죠.

이러한 관계를 역시 기업과 노동자의 입장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영혼'을 가진 노동자는 짜증나겠지요. 인간에게 '영혼'을 가진 로봇이 불편하듯이 말입니다. 좀 더 빡세게 부려먹고 좀 더 싼 값에 부려먹고 좀 더 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혼'을 가진 노동자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필연적으로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영혼'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기업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노동자들이 바로 철학과 역사 등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통해서 영혼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접하면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단순히 일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주성을 지닌 존재이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업, 대학을 통한 '영혼'없는 노동자 양성 꿈꾸는 건 아닌가

기업의 입장에서는 특히 이런 인문학과 사회과학 교육이 주로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벌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노동자들이 '영혼'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이 '영혼'을 제공하는 곳에서 기업을 위한 맞춤형 휴머노이드를 생산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소위 산학(産學)협동이라는 미명 하에 대학 공간으로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기, 즉 돈으로 대학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죠. 기업의 입맛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는 분야에는 넉넉하게 돈을 대 주었습니다. 주로 공학계열이나 상경계열 등이죠. 대신 자신의 이윤추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걸리적 거리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은 지원이 끊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교육은 '영혼'을 만들어내는 불온한 교육이니까요. 여력이 되는 기업들은 아예 대학을 통째로 접수하기도 했습니다. 특정 기업들이 소유한 대학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 대학들에서는 다른 대학보다 훨씬 심하게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 생산 공장이 되어 갑니다.

지금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미래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잊고 자기 혼자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학점과 스펙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업에 더 잘 쓰임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기계 팔에 기름칠을 하고 더 좋은 부품으로 갈아 넣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대학의 모습입니다.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 생산 공장!


태그:#대학, #휴머노이드, #취업, #청년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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