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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내려앉은 바닷가 녹색 등대
 안개가 내려앉은 바닷가 녹색 등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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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금)

안개 자욱한 아침이다. 온 세상이 뽀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게 자전거타기 참 좋은 아침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침나절엔 선선한 가을 날씨를 보여주지만, 한낮엔 여전히 짱짱한 여름날이 계속되고 있다. 안개가 덮여 있을 때, 부지런히 달리는 게 좋겠다.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는 아니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다. 해안을 따라 일정 거리를 두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 시설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강화도에 들어선 이후로 내가 둘러본 '돈대'와 '보'와 '진'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과거엔 동쪽 해안의 연미정에서 초지진까지 강화외성이 해안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숙종 때까지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를 축조했다.

강화도 해안 자전거도로
 강화도 해안 자전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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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 황산도를 떠나 강화도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인 해안 자전거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강화대교를 향해 올라간다. 그 길을 가는 도중에 광성보 높은 문이 언덕 위에 우뚝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멀리서 보기에도 꽤 웅장하다. 마치 서울의 광화문을 강화도 해안가 언덕 위로 옮겨다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냥 지나치기 힘든 풍경이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격전지다. 이곳에서 강화도에 상륙한 미국인 병사들과의 백병전이 있었다. 결과는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격렬한 전투 끝에 조선군 대다수가 숨을 거뒀다. 주변에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가 있다. 강화도 여러 돈대 중에는 용두돈대를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여타 돈대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이 특출나게 아름답다.

광성보 내 광성포대. 신미양요 격전지
 광성보 내 광성포대. 신미양요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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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용머리처럼 바다로 불쑥 머리를 내민 모습
 용두돈대. 용머리처럼 바다로 불쑥 머리를 내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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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와 주변 돈대들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한 청년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자전거를 타고 오다 넘어져 뒷드레일러(기어변속장치)가 부러졌다며 육각렌치를 빌려달란다. 무릎에 찰과상을 입은 게 영 남의 일 같지 않다. 나 역시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몸을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다 보니,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지워질 날이 없다. 다행이 육각렌치가 효용이 있어서, 당장은 자전거가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수리를 끝냈다.

강화대교를 넘어가기 전, 더리미마을 앞 강화대교가 멀리 올려다 보이는 곳에 선착장이 하나 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작은 선착장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닷가 풍경이 색다르다. 강화대교 아래 새우잡이배 대여섯 척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사부작이 앉아 있다. 마치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다 잠시 쉬어 가는 새의 형상을 닮았다.

멀리 강화대교 아래 정박해 있는 새우잡이배들이 보인다.
 멀리 강화대교 아래 정박해 있는 새우잡이배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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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닻에 걸린 풀들.
 쇠닻에 걸린 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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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로 갓 잡아올린 망둥어
 낚시로 갓 잡아올린 망둥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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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얼굴이 갯벌만큼이나 검은 빛을 띤 어부를 만났다. 그의 말이 얼마 전 내린 폭우로 강(한강과 임진강)에서 '잘피'가 진뜩 떠내려 와 그물을 내리지 못하고 있단다. 이런 때 그물을 던져 봐야 잘피만 잔뜩 걸려 올라오고, 그물만 망가지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의 낚시대에도 계속 풀잎이 따라올라 와 애를 먹고 있다.

잘피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거나 어디 한쪽 구석으로 몰리면 그때 다시 새우잡이를 나갈 수 있다는데 그때가 언제쯤일지는 알 수 없다. 강에서 일어난 일이 바다에도 영향을 미친다. 멀리 강 상류에서부터 떠내려 온 풀들이 바다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바다 생태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장에 고깃배를 피하게 된 바다 속 생물들이 일정 기간은 자신들의 성장과 번식에 전념할 수 있다. 당장 조업을 중단해야 하는 어부들에겐 안 된 일이지만, 그 역시 더 큰 수확을 위한 예비기간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바다나 인간이나 휴지기란 게 필요한 법이다. 그러면서 바다가 더 풍성해지는 게 아닌가.

강화도에 내 발을 잡는 유적지가 너무 많다. 자연히 여행 일정이 조금씩 뒤로 미뤄지고 있다. 강화도를 제대로 알고 가려면, 적어도 3일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너무 서둘러 강화도를 떠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명포구 함상공원
 대명포구 함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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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를 넘어서는 곧바로 김포시 해안가에 진을 친 덕포진과 대명포구를 찾아간다. 덕포진은 해상의 군사 요충지로 배를 타고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접근하는 외적을 포를 쏴서 막는 기능을 수행했다. 마주보는 곳에 강화도의 초지진이 있어 강화해협을 지나가는 외적에 협공을 가할 수 있었다. 이곳 역시 초지진이나 광성보와 마찬가지로 신미양요를 겪었다. 덕포진 역시 광성보의 포대 진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덕포진 가장 안쪽에 손돌목 묘가 있다.

강화대교에서 초지진까지 내려가는 길은 해안선에서 가장 가까운 도로를 택했다. 처음엔 농로를 개척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농로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농로 한가운데에서 추수를 돕는 트럭에 막혀 되돌아 나와야 했다. 어제 한동안 농로에서 헤맨 기억도 있고 해서 바로 도로로 들어섰다.

대명포구에 최근(지난 8월) 함상공원이 들어섰다. 해병대 상륙함으로 임무를 수행하다 2006년 퇴역한 운봉함을 군사 체험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함상공원답게 내부 관람 시설은 최상이다. 하지만 특별히 눈여겨볼만한 대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월남전에 7회나 참전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대명포구에 게와 새우젓 등속을 사러 온 사람들이 북적인다. 평일인데도, 여느 시장의 주말 풍경 같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모두 정신없이 바쁘다. 사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낮은 가격을 치르려고 하고, 파는 사람은 생물이 조금이라도 더 신선할 때 팔아넘기기 위해 애를 쓴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번잡한 어시장을 만났다. 대도시에 가까운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다. 대명포구는 육지의 최북단에 있는 포구다.

초지대교에서부터는 해안가 철책 아래 도로를 따라 달렸다. 그런데 도로가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탓인지, 2차선 도로에 갓길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로가 차들로 발디딜 틈 없이 꽉 차 있다. 게다가 길가에 잡풀이 무성하고, 아카시 같은 나무들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자전거를 타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도로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길을 어떻게 빠쟈나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승용차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스쳐 지나갈 만한 공간이 생기는데, 대형버스나 덤프트럭 같은 것이 지나갈 때는 대책이 없다.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 여러 차례 지나갔다. 그렇다고 자전거를 되돌릴 방법도 없다. 외통수에 걸린 셈이다.

풀잎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얻어맞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가는데 그나마 30여 분을 달린 후부터는 교통 정체로 길가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때부터 도로 위에 서 있는 차들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는데 사생결단의 순간을 여러 차례 맞이했다. 이 길의 대부분은 공사 구간에 속한다. 도로가 엉망진창인 구간도 상당하다.

해안가 길이라고 해서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에서 낭만은 주워 먹으려고 해도 없다. 바다는 철책과 언덕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바닷가 공단 구역을 가로질러 지나가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한마디로 자전거를 타기 힘든 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이유도 없는 길이다.

여기에서 꼭 해안선을 고수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한다. 해안선에서 가장 가까운 길을 찾아 달리다 보니, 비록 길은 있어도 자전거를 타고 가기 어려운 길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러저러하게 자전거를 타기 좋지 않은 요소들이 있는데도 꼭 해안선에서 가장 가까운 길을 가야만 하는지 의문이 든 것이다.

즐거워야 할 여행길이 자칫 잘못하면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는 모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해안선을 포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길은 수만 갈래로 도처에 깔려 있다. 그중 어느 길을 가야 할지를 경정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 길이 자전거여행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것은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직접 가봐야 안다. 지도가 가진 맹점이 길의 유무를 그려 넣은 것 외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거기에 관광지나 주요 이정표를 표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정보는 지나치게 평면적이어서 길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

자전거여행자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정보는 전혀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갓길이 있는지 없는지만 알 수 있어도 꽤 도움이 될 텐데 기대난망이다. 공사중 표시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지도 자체가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지도를 절대적으로 과신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월미도 밤 풍경
 월미도 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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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월미도는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바닷가에 서서 하염없이 검은 밤바다를 응시하던 청춘들이 지금은 놀이기구에 올라타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는 거다.

어젯밤 밤늦게 너무 긴 사설을 풀어놓느라 기록을 정리하고 넘어가는 걸 잊었다. 어제 내가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87km다. 오늘 달린 거리는 77km. 누적거리 총 244km. 매일 80km 안팎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 중간에 길을 헤매거나 곁길로 새는 일이 잦아 실제 거리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태그:#강화도, #광성보, #덕포진, #대명포구,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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