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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용기가 어디서 생긴 걸까.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나는 카메라를 슬그머니 만지작거렸다.

사진 찍지 말라면 안 찍고, 가지 말라면 안 가고, 하지 말라는 짓은 안 하는 게 '여행자의 예의'라고 믿어온 내가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앞에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최후의 심판>이나 천장화의 '천지창조'에 제대로 감동 먹어서, 라는 따위의 핑계는 대지 않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순전히 분위기 때문이었다.

1929년 독립국가로 승인된 바티칸 시국에 가면, 바티칸 박물관을 비롯해 시스티나 예배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둘러볼 수 있다.
▲ 바티칸 박물관 1929년 독립국가로 승인된 바티칸 시국에 가면, 바티칸 박물관을 비롯해 시스티나 예배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둘러볼 수 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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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에 처음 들어서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침 튀기는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사진은 절대 찍을 수 없다는 주의를 듣고, 카메라는 아예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박은 여행자라면 더욱 당황할 것이다.

추기경들이 회의하고 교황이 선출되는 곳인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들이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은 시장바닥처럼 북적대고 소란스러웠다. 카메라가 가방을 삐져나오는 순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목청을 높여 주의를 주는 감시자들이 여기 저기 포진하고 있었다. 그런 사진 촬영 제지 전담반(?)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메라 플래시는 대책 없이 마구 터지고 있었다.

하기사 이곳이 어딘가.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산 피에트로 사원과 바티칸 박물관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그 중에서도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이 아니던가.

<최후의 심판>의 그리스도가 기저귀를 차게 된 사연

온 사방 벽과 천장까지 가득 메워져 있는 500년 전의 프레스코화는, 천재의 걸작품을 보겠다고 전세계에서 몰려와 아귀다툼하듯 바글거리는 구경꾼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부 뒤쪽에 그린 프레스코화.
가운데 오른팔을 치켜 든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와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이 보인다. 사진은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
▲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부 뒤쪽에 그린 프레스코화. 가운데 오른팔을 치켜 든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와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이 보인다. 사진은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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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에 미쳐 있던 미켈란젤로는 천장화를 부탁받으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달라는 조건을 내걸 정도로 현실적이었지만, 피부가 썩고 등이 굽고 무릎에 물이 고이도록 그림을 그려내자면 지극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아무래도 힘들었겠지 싶다.

더구나 프레스코화라는 게 뭔가. 석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굳기 전에 그려야 하는 기법이다. 그래야 안료가 석회에 배어 들고 굳으면서 그 색이 석회 안에 가두어져서 오래도록 그림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두고두고 천천히, 룰루랄라하면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갔다 와서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놓치면 덧칠할 수도 없는, 순간순간 피 말리는 마감이 촉박한 작업이었을 터. 

그런 지난한 작업을 하려면, 천재의 열정뿐만 아니라 신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야 마땅하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서 발칙한 상상이 떠올랐다.

1541년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비난이 쏟아졌다. 그리스도가 이교신인 아폴론을 닮았다는 둥, 수염도 없다는 둥, 성자들이 죄다 알몸으로 등장한다는 둥, 예배당보다는 목욕탕 그림으로 어울린다는 둥.

이에 미켈란젤로는 "타락한 우리 신앙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라고 반박했다.

어쩌면 미켈란젤로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성스러운 그리스도를 일부러 홀딱 벗겨놓고, "이 ××놈아 이건 너무 추하잖아", 시비 걸면 "됐거든 댁이 더 추하거든" 이런 식으로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인간을 심판하는 신의 권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들의 다툼과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저한 신심으로 창작의 고통을 이겨냈다기보다는 못난 인간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그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때로 예술은, 아름다움과 선량함과 순수보다는 미움과 갈등에서 싹이 트고 상처를 자양분 삼아 승화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결국 교황 비오 4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수정하기로 결정한다. 벌거벗은 성자들에게 옷을 입히기로 하고 그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맡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기저귀 찬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사진 안 찍은 게 오히려 다행

천장 가득 그려진 천장화를 올려다 볼 즈음에는 이미 내 목은 과부하로 디스크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천지창조(아담의 창조)'는 확인해야겠기에, 아픈 목을 손으로 받쳐가며 올려다보았다.

목을 좀 쉬게 하려고 고개를 떨구자면, 여전히 아래는 와글거리며 소란스러운 구경꾼들로 가득하다. 위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가, 밑에는 여전히 시장바닥 같은 인간 세상이다. 

감시인이야 소리치든 말든 슬쩍슬쩍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솔직히 나는 좀 놀랐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 주고, 땡큐, 쏘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서양 사람들은 하라는 짓 안하고 무례한 짓 안 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 말라는 짓 몰래 하고, 찍지 말라는데 사진 찍고, 다른 사람 생각 안 하는 건 늘 무례한 '어글리 코리안'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편견은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완전히 깨져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 대한 배려와 공중도덕부터 배웠음직한 얼굴 하얀 백인들이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으니. 이쯤 되고 보니 나도 슬금슬금 마음이 동한다. 다들 찍는데 나만 순진한 거 아닌가,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감시인이 많은 걸 보면 그만큼 사진들을 찍어댄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닌가, 플래시 없이 찍는 건 괜찮지 않을까, 저 잘난 백인들은 플래시까지 터뜨리는 데 말야. 그렇게 가슴 졸이며 가방 깊숙이 처박아 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마침내 슬그머니 꺼내들게 된 건 결정적인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엄마, 우리도...... 찍자......"

우리 딸이 누구인가. 바야흐로 사춘기, 지들끼리 비속한 욕지거리는 나눌지언정, 길가면서도 목소리 커서 창피하다며 내 입을 틀어막고(맹세코 난 목소리가 크지 않다), 뭔가를 가리킬 때면 가운데 손가락을 내미는 버릇이 있는 아빠를 여행 내내 주의시켜 스트레스 지수 팍팍 올리게 만들던 딸이다. 언젠가 티벳 사원에 갔을 때에도 '여자는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을 보고,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도대체 뭔가 잠깐 고개만 빼고 들여다 볼 때에도 내 옷자락을 잡아끌고 꾸짖은 건 딸이었다, 왜 예의도 없이 하지 말라는 짓 하냐고.

그런 딸이 찍잔다, 사진을. 어린 딸이 천재의 걸작품에 숨막히도록 감동한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순전히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게 면죄부를 주었다. 결국 내가 무너진 건 훌륭한 그림 때문이 아니라 딸에게 빙의한 악마의 속살거림 때문이라는 걸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눈 앞에 카메라를 갖다 대보지도 못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드는 순간, 한 떼의 무리들을 몰고 온 가이드가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공격적으로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퉁퉁하게 살집 오르고 가무잡잡한 여자 가이드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고 있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찍어 누를 듯한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딴 짓 하면 너네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사방에서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찍지도 않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적이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우씨, 왜 나만 갖고 그래.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한 건지 지우려고 한 건지 지가 어떻게 알고.

그러나 사진을 찍지 못한 건 잘된 일이다. 아니라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테니. 또 어디에다 그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놓겠는가.

나는 짐작한다, 이런 고백 뒤에 돌아올 비난의 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털어놓는 건, 예술을 마누라로 여기고 자신의 작품을 자식이라고 말했던 한 예술가의 명작을 보고 돌아온 자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쯤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또한 그런 어리석은 짓거리들 다 부질없으니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으시라는 의미쯤 되겠다.

사자 가죽 위의 헤라클레스로 추정. 이 조각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미켈란젤로는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 벨베데레의 토르소(바티칸 박물관) 사자 가죽 위의 헤라클레스로 추정. 이 조각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미켈란젤로는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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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빛깔의 푸른 대리석은 이제 더이상 나오지 않는 진귀한 것이라고 한다.
▲ 푸른 대리석(바티칸 박물관) 이 아름다운 빛깔의 푸른 대리석은 이제 더이상 나오지 않는 진귀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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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의 복도에 주욱 도열해 있는 대리석 조각들은 한결같이 나뭇잎을 걸치고 있다. 원래는 모두 나신이었는데 교황의 명령으로 나뭇잎 팬티를 걸치게 되었다고.
▲ 교황 때문에 바티칸 박물관의 복도에 주욱 도열해 있는 대리석 조각들은 한결같이 나뭇잎을 걸치고 있다. 원래는 모두 나신이었는데 교황의 명령으로 나뭇잎 팬티를 걸치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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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을 돌아볼 때 웬만한 천장의 그림들은 무시하는 게 낫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충분히 보기 위해 목을 아껴야 한다. 실제로 난 목이 너무 아파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실컷 보지 못했다. 꼭 명심하시길. 이건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조언.
▲ '웬만한' 천장의 그림 바티칸 박물관을 돌아볼 때 웬만한 천장의 그림들은 무시하는 게 낫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충분히 보기 위해 목을 아껴야 한다. 실제로 난 목이 너무 아파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실컷 보지 못했다. 꼭 명심하시길. 이건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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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후대책은 여행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부터 루체른, 인터라켄을 거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폼페이, 바티칸을 여행한 2주 동안 행복한 여름이었던 걸 기억한다. 여행기를 쓰면서 다시 곱씹으며 여행을 추억하는 5개월 역시 행복했다. 벌써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얼추 다 되어간다. 여행을 하면서 난 늘 예감한다, 최소한 1년은 행복할 거라고. 1년이 지나 약발이 떨어질 즈음이면 또다시 짐을 꾸리면 된다고.

가끔 내 늙은 나날들을 걱정할 때가 있다. 눈도 나빠져 책도 읽지 못하고, 귀도 나빠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게 될 때 무얼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때에는 여행했던 기억들을 떠올려야겠다. 여기저기서 먹었던 것들, 보았던 것들, 신기하고 새로웠던 것들을 영사기 필름처럼 돌리고 또 돌리고.

멀고 먼 훗날에 삶이 지루하기 짝이 없고, 희로애락에 덜 흔들리고, 생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될 때 한 푼 두 푼 꺼내서 써 먹어야지, 저금통에 모아 둔 푼 돈처럼.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내 노년을 위한 저금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3초가 행복하려면 섹스를 하고,
3시간이 행복하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루가 행복하려면 아침에 좋은 노래를 듣고,
5개월이 행복하려면 '오마이 뉴스'에 여행기를 올리고,
1년이 행복하려면 좋은 책을 읽고,
10년이 행복하려면 좋은 친구를 만나고,
50년이 행복하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남은 생이 행복하려면 여행을 하라.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그동안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좋은기사 원고료를 주신 분께 송구한 마음 전해드립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태그:#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예배당,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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