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에 전해진 영화는 신기하고도 매력적인 볼거리이자 자본과 결탁한 근대적인 매체였다. 신문화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근대화의 살아 움직이는 교재였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인들에게 선전의 수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에 영화산업이 시작되었기에 조선영화인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식민지 조선영화의 토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영화계를 이끌었다. 이들 식민지 조선영화인을 살피고 되새기는 것은 지난했던 현대사를 이 땅의 영화인들이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영화사 이면의 기록이다. <기자 주>

1937년 8월 12일 밤,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우미관 화장실에서 중년의 행려자가 숨을 거뒀다. 아편중독자였던 그는 가끔씩 우미관에 나타나던 인물이었다.

"나리, 초기(허기)가 나서 못살겠습니다. 좀 적선합쇼."

어두컴컴한 객석 사이를 비집고 손을 내밀던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깜짝 놀라 얼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행려자의 이름은 서상호. 나이 49세. 활동사진계 최초의 스타로 그의 웅변식 설명과 '뿡뿡이 춤'은 관객들의 인기였다. 혹여 지방순회라도 갈 것 같으면 경성의 관객들은 그가 돌아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 서상호가, 변사로서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에서,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더럽다던 우미관 화장실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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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상호는 동학혁명이 들불처럼 퍼지고 조선이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던 1894년, 정변과 관련 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고향 부산으로 건너와 잠시 머물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경찰서의 전신인 수문동(水門洞)경찰서의 조선인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일본 경찰의 통역으로 활동하던 서상호의 구변은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주변 동료들은 서상호의 구변이 활동사진관 변사들보다 훨씬 났다며, 활동사진 변사로 진로를 전환할 것을 권유했다. 주변의 권유로 서상호는 일본경찰의 통역에서 고등연예관의 활동변사로 직업을 바꾼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던 1910년, 일본의 영화배급사인 다이아몬드상회는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인 고등연예관을 세웠다. 고등연예관 건립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활동사진은 상설상영되지 못했다.

고등연예관은 지금의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근에 지어진 흰색 외벽의 건물이었다.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 모두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를 함께 두었다. 고등연예관이 등장하자 변사가 활동사진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일본식 영화상영이 조선에 정착되었다.

고등연예관은 조선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서상호를 고용함으로써 두 명의 변사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일본인 변사가 오른쪽 막을 열고 등장해서 상영할 영화를 설명하고 들어가면 왼쪽 막에서 조선인 변사가 등장하여 우리말로 다시 설명을 하고 들어간 후, 10분내외의 활동사진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서상호는 혼자 등장해서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 모두를 상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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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는 고등연예관에서 변사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신파배우 임성구와 같은 진짜 스타가 되고 싶었다. 그는 신파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신파극단인 혁신선미단에 참여한다.

1910년경부터 조선인 신파극단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1909년에 조직된 임성구의 혁신단이 그 효시였다. 일본인 극장의 하족실(신발을 벗어 보관하는 곳)에서 일하던 임성구는 일본신파극단의 공연을 어깨너머로 보고 신파극을 익혀 공연했다.

처음에는 서툴기만 했던 그들의 공연은 날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졌다. 1910년대 초반에 이르면 혁신단의 공연은 일정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여 임성구는 당대의 스타로 관객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신파극이 인기를 끌자 변사들도 신파극단에 참여하여 임성구의 혁신단에 도전장을 낸다. 서상호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변사 중 한명인 우정식도 신파극단 이화단에서 활동했다.

1912년 조중장이 혁신선미단을 만들었다. 서상호도 이에 참여했다. 어깨너머로밖에 배울 수 없었던 임성구에 비해 서상호의 혁신선미단은 장점이 많았다. 외국어 학교 출신의 조중장이 단장이었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당대의 스타변사 서상호와 후지와라상회(藤原商會)를 운영하던 일본인 상인 후지와라 쿠마타로(藤原熊太郞)도 발기인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 신파를 조선식으로 번안해 상연한 임성구의 신파극은 수준이 떨어진다고 본 이들은 일본신파 그대로를 상연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이러한 움직임에 서상호, 우정식 등 유명변사들이 동참했다. 그 이유는 일본 신파 레퍼토리들이 대부분 활동사진으로 만들어져 유명한 신파 레퍼토리들은 변사들이 다 꿰고 있었던 바, 이들이 보기에 임성구의 신파극은 원본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서상호가 참여한 혁신선미단이나 우정식의 이화단은 곧 사라진다. 우선 일본 신파극을 그대로 재현한 이들의 신파극이 임성구의 그것보다 세련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하기에 조선인 관객들이 공감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주요 배역을 맡았던 스타변사들의 경우, 배우로 활동하는 것보다 변사로 활동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이점이 있었다. 활동사진관 경영자들은 관객에 미치는 영향이 큰 변사들에게 사택을 지원해 주고, 파격적인 금액의 월급을 주면서 이들을 붙잡아 두었던 반면 신파극단은 수익도 적었을 뿐더러 이를 단원들이 나눠 가져야 했다. 서상호는 몇 번의 공연을 끝으로 다시 고등연예관 변사로 돌아갔다. 혁신선미단도 곧 활동을 멈췄다.

1912년 12월, 종로 관철동에 우미관이 만들어졌다. 이즈음 우미관과 함께 대정관, 황금관이 만들어지면서 경성의 활동사진관은 총 4개로 늘었다. 본격적인 활동사진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정관과 황금관은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인 상설관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을 상대로 한 조선인 상설관이었다. 고등연예관의 유명 변사들이 황금관, 대정관, 우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상호도 고등연예관에서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자리를 옮겼다. 대우도 훨씬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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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연예관의 활동사진은 일본에서 상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구작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의 독점적 영화기업인 니카츠의 조선대리점으로 니카츠에서 만든 최신의 영화들을 직수입해 상영했다. 대정관과 경쟁하던 황금관도 1914년부터 니카츠에 대항하던 텐카츠의 조선대리점으로 텐카츠 최신의 일본영화를 다투어 상영했다.

조선인 상설관 우미관도 요코하마에서 직수입한 최신의 서양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우미관을 세운 이가 하야시다상점을 운영하던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였는데, 요코하마에서 들어오는 하야시다 상점의 화물에 최신의 활동사진들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고등연예관은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변사의 설명도 바뀌었다. 화면과 동시에 설명을 하는 중설(中說)이 가능해진 것이다. 서상호는 화면의 속도와 설명의 템포를 맞추는 데 있어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얻었다. 타이틀에 없는 말도 지어내어 재미를 배가 시켰다. 또한 필름을 갈아 끼우는 사이사이에 등장해서 그 특유의 '뿡뿡이 춤'으로 관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줬다.

'뿡뿡이 춤'이란 고무로 만들어진 자전거 경적을 다리 가랑이 사이에 끼워 추는 춤인데, 뿡뿡 소리에 맞춰 하와이안 댄스, 탭 댄스 등 각종 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은 코믹하면서 선정적이어서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좋아했다. 특히 여성 팬들의 연모의 심정을 담은 팬레터와 선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최홍련, 엄산월 등 당대의 명기들이 서상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서상호의 몸값과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신파배우 임성구에 못지 않은 스타가 된 서상호는 돈을 물 쓰듯 하며 주색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편에도 손을 댔다.

- 관련기사에서 2편 이어집니다.

서상호 우미관 경성고등연예관 활동사진 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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