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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하늘은 오렌지 빛으로 물이 들었다. 굽이쳐 흐르는 아르노 강이 저물 무렵, 여행자들은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한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저 멀리 보이는 베키오 다리와 두오모의 붉은 돔을 되짚으면서, 자신들의 지나온 여정을 떠올리고 다시 한 번 행복한 추억으로 젖어든다.

진짜가 아니어도 좋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복제품이 있다.
▲ 다비드 상(왼쪽)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복제품이 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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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는 <다비드> 상이 세 개나 있다. 시뇨리아 광장과 미켈란젤로 광장에 복제품이 하나씩 그리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진품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진품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관은 물론이고 교회들도 대부분 입장료를 내야 한다. 더구나 어린이나 학생 할인도 따로 없다. 다비드 상이 유명하다고는 하나, 민박집 드나들라치면 가로질러야 하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지겹도록 복제품 다비드를 보아왔는데 우리 가족 입장료로 몇 만원씩이나 내고 들어가 진품의 초콜릿 복근을 확인하고 싶을 만큼 의욕적인 날씨는 아니었다(뜨거운 여름 날씨는 웬만한 것들은 포기하게 만든다).

더구나 진품을 마주하고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남들 다 들고 다니니까 나도 하나 사는 과시용 명품 가방과 다를 게 뭐 있으랴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을 마친 뒤 '진짜를 봤다' 하는 그 자랑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 뜨거운 여름날 길게 늘어선 줄에 따라가 붙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돌이켜 보면 늘 아쉽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지 않고 지나친 진짜 이유가 있었음을, 이틀 동안 피렌체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골목을 누벼본 자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먹자마자 달려나갔던,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오전 내내 줄만 서다 말았을 우피치 미술관이라든가,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이 등 유명 인사의 묘가 있는 산타 크로체 교회는 더 이상 우리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르네상스 3대 화가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카라바조, 보티첼리 등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미술관. 처음에는 메디치가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후에 메디치가에서 모은 미술품과 함께 시에 기증되었다.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하는 데만 2~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 우피치 미술관 르네상스 3대 화가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카라바조, 보티첼리 등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미술관. 처음에는 메디치가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후에 메디치가에서 모은 미술품과 함께 시에 기증되었다.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하는 데만 2~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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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피치 미술관 작은 방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타 크로체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해 부서지는 빛들은 별처럼 찬란했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 유명인들의 묘가 있는 산타 크로체 교회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난히 아름답다.
▲ 산타 크로체의 스테인드 글라스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 유명인들의 묘가 있는 산타 크로체 교회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난히 아름답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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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온 거리에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넘쳐나고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인 피렌체를 돌아다니다 보면, 굳이 미술관이나 교회를 따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골목마다 오랜 향기들이 스며들어 있고 인간의 손이 닿은 것마다 조각이 되고 예술이 되었으니, 굳이 진품 <다비드>를 보지 않아도 갈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가짜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할 만큼 훌륭하고 예술적일 뿐 아니라, 피렌체는 그 자체가 르네상스 예술의 전당인 것이다.

베키오 다리에서 춤을

아르노 강에 거울처럼 비친 2층 다리 베키오. 우피치 미술관에서 바라본 모습.
▲ 베키오 다리 아르노 강에 거울처럼 비친 2층 다리 베키오. 우피치 미술관에서 바라본 모습.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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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어둠이 내리고, 미켈란젤로 광장을 내려온 우리는 아르노 강을 따라 베키오 다리를 건넜다. 그 옛날에, 윗층엔 귀족과 부자들이, 아래층은 서민이 사용했다는 이층 다리 베키오는 지금은 보석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어둠이 내려서인지 벌써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다.

베키오 다리가 끝나가는 곳에서는 거리의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행자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연주를 경청하거나 다리 난간에 매달려 저물어 가는 하루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 휙 하며 스치는 게 바람인가 싶었다. 돌아다 보니, 한 여자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잠자리 날개 같은 쉬폰 스커트를 길게 걸친 서양 여자였다. 아주 젊지도, 그렇다고 늙은 것은 더더욱 아닌 그 여자는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까지 지긋이 감은 채로 그 여인, 날렵한 허리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춘다, 마치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들 모두 그 여인을 본다. 무아지경에 빠져 빙그르르 돌아가는 그 여인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조각상 사이로 시뇨리아 광장이 펼쳐치고 왼쪽으로 가면 베키오 다리로 이어진다. 또다시 그곳에 가면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을까.
▲ 시뇨리아 광장 입구 조각상 사이로 시뇨리아 광장이 펼쳐치고 왼쪽으로 가면 베키오 다리로 이어진다. 또다시 그곳에 가면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을까.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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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 여인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그 여인을 그렇게 춤추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저녁 강바람에 취해서였을까. 어쩌면 예술의 향기 가득한 이 도시에 혼곤히 취했던 걸까. 그랬나 보다. 피렌체의 향기에 마술이라도 걸린 게 분명하다. 분홍신을 신기만 하면 춤을 추는 것처럼, 피렌체의 향기만 맡으면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것처럼.

아니라면 그녀는 베아트리체일지도 모른다. 아홉 살에 처음 그녀를 본 단테의 가슴에 운명적인 사랑의 화살을 날렸던. 그 둘의 우연한 만남은 성년이 되어 베키오 다리에서 한 번 더 있었지만, 베아트리체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24세에 요절하게 된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베키오 다리에서의 그 둘의 만남은, 어린 시절 단테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성년으로 각색한 19C 화가 헨리 홀리데이의 그림일 뿐이라는 설이다.

어찌됐든 분명한 것은, 단테의 사랑으로 위대한 <신곡>이 탄생했으며, 베키오 다리는 운명적인 사랑을 미화할 만큼 충분히 낭만적이라는 사실이다.

베키오 다리를 빠져 나와 시뇨리아 광장을 거쳐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내내 춤추는 여인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차츰차츰 그녀는 화가의 그림 속 베아트리체와 오버랩된다.

어쩌면 베아트리체는 밤늦도록 베키오 다리 위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고 춤을 추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 여행자가 자리를 털고 사라진 후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은 다리 위에서, 비로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시공을 뛰어 넘어 환생한 베아트리체인 듯, 시간을 거슬러 환영처럼 나타나듯, 그렇게 거침없는 몸짓으로 춤을 추었을지도.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이 무엇이라 하든 내버려 두어라. - 단테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베키오 다리, #피렌체, #이탈리아, #단테,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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