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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를 특정 시기로 끊어서 이해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한일병합 100주년은 한 세기의 시작과 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특별하다.

한일병합은 일제 식민 통치와 함께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도입된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근대화는 우리의 내적 역량이 배제된 채 진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근대화의 모순은 도시 형성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전통적 공간은 철저히 해체된 반면에 식민지 지배에 용이한 공간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단절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는 '부산'이다. 부산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일본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일본인 사회가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산의 근대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일제의 근대화를 이해하는 방법이며 무엇보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속의 일본, 부산

부산은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부산의 경우 개항 직후부터 일본인의 집단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후 식민통치 시기 내내 다른 도시에 비해 일본인의 비중이 높았다. 이것은 부산이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대일 외교의 중심지인 왜관이 설치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영사관  바다에서 바라본 부산영사관. 중앙의 깃대 있는 뒤쪽 높은 건물이 영사관이다. 뒤편으로 보이는 숲이 현재 용두산 공원.
▲ 부산 영사관 바다에서 바라본 부산영사관. 중앙의 깃대 있는 뒤쪽 높은 건물이 영사관이다. 뒤편으로 보이는 숲이 현재 용두산 공원.
ⓒ 부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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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강화도 조약(1876년)에 의해 초량 왜관 지역에 약 11만평의 일본 전관 거류지(專管居留地)가 설치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일본 전관 거류지는 일본 측이 경찰권, 징세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영토였다.

조선 정부는 또한 전관 거류지에 토지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와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설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결과 용두산 일대의 전관거류지에는 일본을 방불케 하는 시가가 형성되고 관리관청(1879년), 상업회의소(1881), 전신국(1884), 영사관(1884)과 같은 근대적 공공기관이 들어서게 된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묘사한 <만세전>에서는 당시 부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큰길로 걸어갔으나, 좌우편에 모두 이층집이 쭉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 집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중략) 전차가 놓이고, 자동차가 진흙덩어리를 튀기며 뿡뿡거리고 달아나가고, 딸국 나막신 소리가 날마다 늘어가고, 우편국이 들어와 앉고, 군아가 헐리고 헌병 주재소가 들어와 앉는다.'

근대 도시로 공간적 변형

부산의 근대화는 산을 헐어 바다를 메우는 '매축'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개항 당시 전관거류지는 해안선과 맞닿아 있어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이에 일본인들은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관거류지 해안을 중심으로 매축 공사를 진행한다. 한일병합 이전에 이미 두 차례의 매축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영선산 착평 공사(1909), 부산진 매축 공사(1913) 등이 꾸준하게 진행되어 부산 지형을 변화시킨다.

부산 시가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축 공사는 '북빈매축(1902)'이다. 북빈매축은 오늘날 중앙동 일대를 매립한 공사로서 매축지에는 부두, 부산역, 세관 등의 공공시설과 해운회사, 운송회사 등 근대적 상업시설이 대규모 들어선다.

다음으로 진행된 영선산 착평 공사(1909)는 '거류지 확장'과 '대륙 진출'이라는 일본의 이해를 무엇보다 명백하게 반영한 공사였다. 당시 영선산은 부산항이 위치한 '중앙동'과 경부선의 종착지인 '초량'을 가로막아 선박과 철도의 연계를 방해했다. 또한 초량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전관거류민들에게도 역시 영선산은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결국 영선산은 전관거류민과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면서 부산의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부산항 시가 부근 지도 1903년 제도한 지도로 북항 매립 이전의 일본 전관거류지 부근 모습
▲ 부산항 시가 부근 지도 1903년 제도한 지도로 북항 매립 이전의 일본 전관거류지 부근 모습
ⓒ 부산대학교 부산지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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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부와 주변부의 이원적 분리

부산 지명으로 유래된 지역인 '부산포'는 원래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산의 전통적인 행정, 문화의 중심 도시는 동래였다. 하지만 개항 이후 용두산 공원일대에 전관거류지가 설치되면서 두 도시의 위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부산'은 상업지역과 행정기구가 배치되며 근대화된 도시로 창조된 반면 전통적인 '동래'는 이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일제는 동래에서 중심지 지위를 박탈한 대신 온천 중심의 관광도시로 적극 개발한다. 이것은 동래가 내재적 역량에서 근대도시로 변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인들의 취향이나 식민 통치 목적에 맞게 개발된 것을 의미한다.

 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동래온천공중욕탕
 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동래온천공중욕탕
ⓒ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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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은 한일병합 이후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급속도록 발전하는데, 이 시기에 한국 내 일본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현지인도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당시 관광 안내서를 살펴보면 동래온천은 '조선 제일의 별세계', '조선 제일의 온천'이라고 일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하자 동래에 대규모 숙박시설과 유흥시설이 들어서게 되는데, 특히 부산에서 기반을 다진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호화로운 별장이 건설된다. 당시 대표적인 별장 중에 '하자마' 별장이 있는데, 이 건물은 천황의 친인척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 지주 하자마가 세운 것이다. 이곳은 지금도 '동래별장'으로 남아 있는데 당시의 화려한 이층저택과 돌로 된 욕조와 세면대 등이 잘 보전되어 있다.

동래별장 해방 이후 미군 휴양시설로 활용되다 이후 요식업을 거처 1999년 일반 음식점으로 변한다.
▲ 동래별장 해방 이후 미군 휴양시설로 활용되다 이후 요식업을 거처 1999년 일반 음식점으로 변한다.
ⓒ 오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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