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더"

▲ 영화 "마더" ⓒ CJ 엔터테인먼트

지난 1월 27일부터 프랑스에서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보러갔다. 파리 14구, 영화관들이 즐비해있고 유명한 식당인 Coupole이 있는 몽파르나스 지역에 조그마한 영화관이었다. 11시 20분 상영 영화였는데 조조할인이 있었다. 10유로(한화 약 1만 8천원)는 할 줄 알았는데, 오전시간이라 6유로에 관람할수 있었다.

 

과연 <마더>의 프랑스 상영은 어떤지 궁금해 관객들이 눈여겨 보았다. 한자리 건너 내 옆자리에는 일본 할머니인듯한 분과 앉으며 잠시 눈인사를 했었고, 시간이 오전이라 그런지 대부분 프랑스 할머니들, 노부부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몇몇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젊은 여성은 자막이 흐르는 가운데 아직 영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프랑스 유명한 문화 잡지인 프러미에르 사이트에 <마더>는 프랑스 영화 비평가들에 의해 8위에 올라와 있었다.

 

영화의 작품성은 익히 들어왔던 바대로 너무 잘 짜여져 있어 관객을 압도했다. 도준이 살인의 누명을 덮어쓴 것처럼 관객을 속이는데는 완벽했고, 관객들로 하여금 도준의 친구, 진태가 범인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질만하게 잘 구성되어 있고, 나중에 있은 반전까지 너무나도 탄탄했다.

 

마치 봉준호 감독은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마음대로 휘어잡고 있는 듯했다. 그의 휘둘림에 관객은 행복해하며 영화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을만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첫장면 갈대밭을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김혜자님의 모습과 슬픈 배경 음악에 처음부터 기분이 묘하게 슬퍼졌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어떤 모습도 다 이해할 것만 같았다. 갈대밭에서 느닷없이 추는 춤과 웃는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그녀의 모습에 마구 인간적인 동정이 일어 그녀의 어떤 것들도 다 품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데 나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상영실은 처음에만 히터를 틀어주고는 조금있다 꼈는지 추웠다. 몸이 떨리면서 소름까지 끼쳐오고 있었다. 저런 것도 모성애일까? 온전치 못한 자녀를 가진 엄마라면 저렇게 될수 있을까? 그녀는 모성을 빌미로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모성을 그리고 싶은데 그냥 평범하지 않은 모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의도한 바를 잘 그려내었다. 하지만 나는 감독도 국한시킨 모성을 좀 탈피하며 이 영화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어쩔수 없이 주어진 삶에 긍적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나약한 인간이 어떤 불가피한 상황과 만났을때 나름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보호본능(잊으려고 하고, 없었던 일처럼 해버리는)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부정적인 현상들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움을 이 영화에서 보았다.

 

그녀앞에 펼쳐진 잔인한 현실과 끊임없이 덮고 잊으려 몸부림치는 도피의 삶 사이에 끼어든 부정적인 기운들은 그녀를 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자신이 자초해낸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미 도준 엄마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본인이 보고 싶지 않을때는 눈을 막았고, 듣고 싶지 않을때는 귀를 막았을 것이다. 그녀와 관련되어 그녀 앞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것도 직면해서 관계속에서 풀어나가지 못하고, "자기"라는 성역 같은 울타리 안으로 가두고 살았을 것 같다.

 

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 무조건 잊고 싶어하는, 잊어야만하고, 없었던 일이라고 하며 깊은 망각의 늪으로 본인을 밀어넣지 않으면 안되는 잔인한 보호 본능이다.

 

그렇게 자아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사람이 자녀를 두게 되면서, 엄마가 되었을때 그녀의 모성은 성숙되지 못한 자아와 함께 결합되어 삐뚤어진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나인 것", 이 "자아"는 타고날 때부터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살면서 파묻어 버려 잃어버린 "자아"는 모성과 만났을때는 강한 나르시즘으로 발휘되면서 "내"가 거의 신격화 되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영화안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아무도 믿지마. 엄마가 구해줄께 "하며, "본인"만이 모든 것을 할수 있고, 아들을 완벽[?]하게 지켜내리라는 착각속에 빠지게 되어, 도준이 살인 누명을 덮어 쓰고 있다는 강한 자기 세뇌속에서 진범을 헛되이 찾아다니게 된다.

 

이 같은 강한 자아도취 현상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작게는 남편에게, 크게는 자녀들에게 성숙하지 못한 자아도취가 빚어낸 문제들을 많이 접해 왔었다. 깊은 망각의 늪으로 본인과 함께 모든 것들을 밀어넣은 나르시즘은 본인의 결점과 단점은 철저히 외면하게 감추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도준 엄마는 이미 온전치 못한 바보인 도준에게 누군가가 "바보라 그러면 다시는 그런말 못하게 하고, 한 대 때리면 두 대 패 주어라"고 자식에게 강요하게 된다. 결국은 그것이 자식을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남편이 없는 과부나.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서는 "자식은 나"라는 묘한 삐뚤어진 관계를 정립하게 되면서,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자식의 허물을 고쳐주려고 애쓰기 보다는 감싸고 품지 않으면 안되는 암탉 같은 모성만이 작용할뿐이다.

 

작두로 약초를 자르는 조심해야될 순간에도 길 건너편에서 놀고 있는 도준의 행동에만 정신 팔려있는 엄마, 본인의 손가락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안중에도 없는 엄마는 자식이 살인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강한 인정으로, 어느 누구나 봐도 알수 있는 골프채에 묻은 루즈 자국도 핏자국으로 보이게 된다.

 

그녀의 왜곡된 자기애는 고물상 노인을 만나게 되면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에 도준 엄마는 진범을 찾으러 다니면서 본인 아들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 같다. 누군가가 본인의 허물을 드러내면 강렬히 부정하며 비판하게 된다.

 

그녀의 끊임없는 자기 최면과 세뇌는 그 노인을 만나면서 "진실"이라는 끔찍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폭발적인 광기로 살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온전치 못한 아들에게 씌워진 누명을 외면하고는 그에게 묻는다.

 

"너는 엄마 없니? 엄마 없어?" 다운 증후군의 그 청년은 어눌하게 답한다. "아뇨"라고. 그는 구해줄 엄마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울부짖는다. 그 울부짖음은 "모성"이라는 강한 변명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는 외침같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새로운 복사판인 도준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완전범죄 현장을 뒤진 도준이 찾아낸 건 엄마의 침구통, 그것을 건네 받은 도준 엄마, 엄마와 아들은 서로의 살인을 알고 침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도준, 도준이 그녀이니까. 이건 엄마인 그녀가 자초한 삶의 결과일뿐이다.

 

아들이 본인의 살인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그녀는 잠시(?) 견디기 힘들어 한다. 하지만 다시 깊은 망각의 늪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세뇌를 시작한다. 가슴에 맺힌 울화, 한, 슬픔, 모든 것을 잊게 주는 그녀가 만든 침자리에 침을 놓고는 그녀는 미친듯이 달리는 버스안에서 춤을 추게된다.

 

춤으로 시작해 춤으로 끝이 나는 영화, <마더>, 그녀의 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녀는 미쳐가고 있었다. 미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삶, 그녀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싶고, 본인 마음에 들지 않은 일들은 잊어버리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고, 칭찬은 무조건 좋고, 나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은 상대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며, "나" 아니면 안될 것 같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옳고, 내 말을 꼭 들어야 하고, 나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극단의 모습이 아닐런지?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은 글입니다.

2010.02.27 15:16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실은 글입니다.
마더 망각 자기애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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